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Gregorius IX [[이탈리아어]]: Gregorio IX [[영어]]: Pope Gregory IX ||||||||||||<-5><:><table align=center> [[역대 교황]] || ||||||||||||<-5><:> http://www.universitario.com.br/noticias/imagens_noticias/papa_7.jpg?w=284&h=270 || || 177대 [[호노리오 3세]] ||←|| 178대 그레고리오 9세 ||→|| 179대 [[첼레스티노 4세]] ||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178대 [[교황]]. 재임기간 1227년 3월 19일부터 1241년 8월 22일까지, 14년 5개월 3일. 전전임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로, 1145년 아나니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30년 뒤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파 [[이탈리아]]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수난을 당한 '아나니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다.] 속명은 우골리노 데이 콘티 디 세니(Ugolino dei Conti di Segni). 막강한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인 덕분에 파리와 볼로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1198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206년 오스티아 교구 [[주교]] 추기경을 지냈고, 이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활동을 정력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청빈을 강조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수도회의 규율 문제를 놓고 논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였다. 이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강조한 엄격한 청빈함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나, 좀더 온건한 규율로 더 많은 수도회원을 끌어들이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수도회]]의 규율 문제를 둔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결국 [[프란치스코회]]는 [[http://www.ofm.or.kr/|작은형제회]], [[http://www.ofmconv.or.kr/|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http://www.capuchin.or.kr/|카푸친 작은형제회]]로 갈라지게 된다.] 실제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요청에 따라 프란치스코회의 후원자를 자침하였고, 글라라 수녀회의 회칙과 재속수도회인 제3회의 회칙 작성을 맡기도 했다. 1227년 3월 18일 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선종하자 바로 다음날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즉위하자마자 1228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1232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이단자에 대한 망치'로 불린 교회학자 [[안토니오#s-2.2|파도바의 안토니오]]를, 1236년에는 [[독일]] 출신의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엘리자베트 튀링겐을 시성하였다.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지속적인 옹호와 지원, 관심 외에도 그레고리오 9세는 또다른 강력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도 지원하였다. 이를 위해 1234년 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코]]를 시성하였고, 당시 급속히 세력을 불린 [[프랑스]]의 알비파를 상대하기 위해 [[도미니코회]]에 이단심문 권한을 주었다. 이들이 가진 종교재판의 권리는 막강하여 [[주교]]들이 반발하기도 했으나, [[교황]]은 [[도미니코회]]를 옹호하였다.[* 이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성과 할거성이 강했던 [[중세]] 지방교회를 통제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도미니코회]]는 [[교황]]에게만 충성하고 복종하였으므로, [[교황]] 직속의 이단재판관을 지방에 내려보내는 것은 지방에 토지를 갖고 지방 권력자와 밀착하기 쉬운 [[주교]]들에 대한 강력한 견제 카드이기도 했다.] 한편 1230년에는 라이문도(Raimundo)로 하여금 1918년까지 '''700년'''(!) 가까이 유효했던 교회법전을 편찬하도록 위임하기도 했다. 이 외에 그레고리오 9세 시기에 가장 치열했던 것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15~1250)와의 권력투쟁이었다. [[독일]]에 거느린 거대한 봉토 외에도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영토로 가진 [[프리드리히 2세]]는 남북으로 [[교황령]]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라 [[교황]]이 황제의 권력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2세]]는 시대를 앞서간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타문화에 개방적이고 비종교적인 인물. [[교황]]이 이런 성향의 황제에게 불신을 가지고 적대한다고 해도 당시 시대상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고, 결국 [[교황]]과 황제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레고리오 9세는 제4차 십자군의 탈선, 제5차 십자군[* 1215년 실시된,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의 실패한 원정. 일부에서는 정규 십자군 원정으로 보지 않기도 한다.]의 실패 등으로 위축된 동방 십자군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요구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이 자기 영토를 공격할 것을 걱정한 데다 비종교적인 성향 탓에 원정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레고리오 9세가 파문으로 위협하며 강력하게 요청하자 결국 제6차 십자군을 실행했는데, 도중에 병을 얻었다는 이유로 귀국했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에 처했고, 이 조치에 분노한 황제파 세력이 [[로마]]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바람에 [[교황]]은 페루자로 피신해야 했다. [[시칠리아]]에서 정양한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6월 20일, 파문이 철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출정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1229년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그리스도교]] 세력은 나자렛과 [[베들레헴]]을 포함한 성지를 확보하였고[* [[이슬람]] 성지인 오마르 모스크만은 예외로 하였다.], 자유로운 순례도 허용되었다. 기한은 10년 6개월로 한시적이었는데, [[아이유브 왕조]] 쪽에서 갱신을 원했기에 일단 1244년까지 15년 동안은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측에 일시적으로 귀속되었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교]] 쪽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한 성공이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파문이 여전히 유효했기에 '''[[성지]] 전체가 파문에 처해지는''' 희대의 병크가 일어났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개의치 않고 1229년 3월 17일 [[예루살렘]]에 입성해 [[성지]]와 성소들을 순례하고 참배하였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성지 [[예루살렘]]에 입성한 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가 유일하다.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들도 물론 [[예루살렘]]에 입성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프리드리히 2세]]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교황]]의 요구대로 십자군 원정을 잘 수행했기에 [[교황]]은 명분상 파문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1230년 파문령을 물리고 황제와 일시적으로 화해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둘러싼 영토 문제로 두 사람은 대립을 끝내지 않았고, 결국 1239년 [[교황]]이 다시 황제를 파문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번에는 순순히 따르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 [[교황령]]을 위협하였다.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압박하는 가운데, 그레고리오 9세가 사태 타개를 위해 소집한 시노드는 황제가 [[주교]]들의 참석을 방해했기에 개최조차 되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결국 1241년 8월 22일 그레고리오 9세가 선종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은 간신히 끝났다. 여담으로 [[고양이]] [[학살]]에 대한 1등 공신이다... 1233년 6월 13일, 고양이는 악마의 분신이라 무조건 죽이고 키우는 사람도 처벌한 근거가 된다는 칙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9세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