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include(틀:문묘 배향 18현)] [목차] == 개요 == [[조선]] 전기의 유학자,관리. 본관은 서흥.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다. [[남효온]]의 친구이기도 하다.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32|참조]][* 사실 동방 18현에서 조선시대 초기 4명을 이어놓으면 이렇게 되는데, 즉 조선 성리학의 초기계보이다.] == 생애 ==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을 읽으면서 수기를 하였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극찬했는데,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고 칭찬했다. 40세가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다(...).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65|참조]] [[연산군]] 시기인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도]] [[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 2년 후 다시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이때 조광조가 김굉필이 유배왔다는것을 전해듣고 배움을 청하게 된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향년 51세였다. 그 후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도의 창녕으로 내려간다.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 여담 == [[소학]]을 좋아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서는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그 제자인 조광조 역시 소학을 매우 좋아했다.[[http://www.itkc.or.kr/itkc/post/PostServiceDetail.jsp?menuId=M0444&clonId=POST0018&nPage=7&postUuid=uui-4b7ea821-8445-4449-baac-0334|참조]] == 참고 ==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65|사옹(蓑翁) 김굉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 == 관련항목 == * [[도동서원]] [[분류:조선/인물]] [[분류:유학자]]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문묘 배향 18현 (원본 보기) 김굉필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