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관련 항목 : [[대한민국 국군/인물]], [[정무직공무원]] [include(틀:국내 정치인)] http://ndarticle.joins.com/pad/2011/11/11/20111111140005609.jpg (사진은 서울특별시장 당시) 金玄玉 1926년 10월 27일 ~ 1997년 1월 9일(향년 70세) ||||||||||||||<tablealign=center><tablewidth=500><:> [[역대 대한민국 광역시장#s-1|역대 정부직할 부산시장]] ||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9/Symbol_of_Busan.svg/220px-Symbol_of_Busan.svg.png?width=150 || ||<width=30%><:> 정부직할 부산시 승격 ||<:> {{{+1 ←}}} ||<width=30%><:> '''초대 김현옥''' ||<:> {{{+1 →}}} ||<width=30%><:> 2대 [[김대만]] || ||||||||||||||<tablealign=center><tablewidth=500><:> [[서울특별시장#s-3|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1/Seal_of_Seoul.svg/128px-Seal_of_Seoul.svg.png || ||<width=30%><:> 13대 [[윤치영]] ||<:> {{{+1 ←}}} ||<width=30%><:> 14대 김현옥 ||<:> {{{+1 →}}} ||<width=30%><:> 15대 [[양택식]] || [목차] == 소개 == 한국의 전 군인, 관료이다. 좀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들에게는 '''원조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 근현대 [[서울특별시]] 개발사를 놓고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흔히 서울특별시의 3대 관선 시장으로 박정희 통치기간의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을 꼽는다.[* [[윤치영]]은 강력한 서울시 개발억제책을 썼기 때문에 박통시절 재임했지만 대개 서울 3대 시장에서는 빼는 추세.] == 일생 == === 군인 시절까지 === 1926년 10월 27일 [[경상남도]] 진주군(현 [[진주시]])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8.15 광복]] 후인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0년 육군 제3항만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961년 [[5.16]]에 가담하였다. 이듬해인 1962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관료, 정치인, 교육자 === 1962년 예편 후 바로 [[부산광역시장|부산시장]][* 이듬해인 1963년 부산시가 [[경상남도]]에서 분리, 정부 직할의 시가 되었다. '[[직할시]]' 명칭은 1981년 인천, 대구의 직할시 승격 당시 함께 부여받았다. 이전까지는 그냥 '''[[대한민국]] 부산시'''였다.]에 임명, 4년간 근무하며 관료 커리어를 시작하는데, 이 때부터 김현옥이란 이름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국 현대사에 각인되게 된다. 1966년, [[윤치영]]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전임자 윤치영 시장은 서울의 인구증가에 대해 강력한 개발억제노선을 취하면서 심지어 "지방민들을 이사 못 오게 법령으로 막아서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평양직할시]]??~~ 이는 당시 실권자인 대통령 [[박정희]]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개발을 외치는데 그 밑에 서울시장이 개발 반대를 하고 있으니... 그리하여 윤치영은 경질되어 다른 자리로 가고 부산시장이던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그 명성(?)답게 취임 다음날부터 숫제 서울의 지도를 바꿔놓을 정도의 대사업을 시작한다. 이 당시 김현옥이 벌여놓은(?) 대공사는 * [[세종로]], [[명동(서울)|명동]] 지하도 건설 :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방공호를 겸했다. 윤치영의 서울 성장억제책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특히 박정희는 포병 장교 출신이라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 [[세운상가]] 사업 : [[종묘]]앞에서부터 중구 필동까지, [[일본 제국|일제]]가 [[태평양 전쟁]] 당시 공습 폭격에 의한 화재 확산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뚫어 놓은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이를 소개공지라고 했는데 이 공터는 6.25 이후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거대한 무허가 판자 집창촌이 되어 있었다. 김현옥은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모더니즘적 입체 공중도시를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 [[강변북로]] 건설 : 1966년 홍수로 인해 서울시내까지 한강물이 역류하여 하수도가 다 넘쳐서 소동이 벌어지자 제방사업 및 교통난 해소를 위한 강변도로 정비사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영등포 인근 제방 안쪽에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택지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여의도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야 신난다 땅이 생긴다~~ * [[여의도]] 개발 : 여의도에 제방(윤중제)을 쌓고 [[밤섬]]을 폭파했다. * [[고가차도|고가도로]] 및 [[터널]] 건설 : 1960년대 후반의 서울은 밀려드는 상경 인구와 전차, 버스 등이 뒤엉켜 극도로 혼잡한 상태였다. 또한 일본 도쿄의 [[시부야역]]과 평양의 건설 등에 자극받아 서울에도 고가도로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 때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고,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차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또한 남산 1, 2호 터널과 삼청터널, 사직터널도 이 때 건설되었다. 아현, 서울역, 서소문 고가도로는 청계고가도로와 연결되어 서울을 관통할 예정이었으나 예산부족과 기술부족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산터널의 원안은 1, 2호 터널이 중간에 교차하고 그 안에 약 30~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시설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 [[시민아파트]] 건설사업 : 19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무허가 건물이 판을 치고 있었고 지번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며 밀려드는 인구로 주거난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아파트]]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건설 과정에서 비리, 부실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김현옥 시대 최대의 병크인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났고, 김현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러나 주거난과 도심재개발에 의한 병크는 이후로도 끊이지 않아서 결국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대형 쟁의로 폭발하게 된다. 다만 이것은 후임인 [[양택식]] 시장 대의 일. ~~시장님!! 이건 심시티가 아닙니다!!~~ ~~대체 몇 개를 삽떠놓은거냐~~ 그런데 건설의 화신이자 불도저 시장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지하철 사업은 계획만 세워놓고 실제 삽은 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도 공사를 많이 벌여놓다 보니 서울시 재정이 파탄 직전이어서'''였다.(...) ~~1970년 서울 아시안게임이 취소된 또 하나의 이유~~ 재정담당자가 공무원들 월급을 못 줄 위기에 처해 국무총리실에 지급보증을 걸어놓고 시금고를 맡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직원들 월급을 주고 다시 메꿔놓고를 반복했다고 하며, 이 부채는 여의도 개발 후 양택식 시장이 여의도 땅을 팔아서 겨우 숨통을 틔워놓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10억원을 끌어와 지하철 1호선을 삽뜰 수 있었다는 건 덤.[* 양택식은 철도청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철도 관련 사업에는 자신이 있어서 여의도와 함께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 사업이었다고 한다.] 시장직을 물러난 후인 [[1971년]]에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출마하였으나 [[신민당(1967년)|신민당]] [[노승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의 여파로 경질된 [[오치성]]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으로 복귀, [[1973년]]까지 있었다. 이후 [[박정희]]가 피살된 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관료형 부정축재자로 몰리게 되어 중앙 정계에서는 축출된다. 1981년 5월 경남 양산군(현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http://img.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__icsFiles/afieldfile/2007/04/09/VN19952157-00_01235304.jpg [[1995년]] 대한민국 제1회 지방 선거에 [[무소속]]으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169,652표로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 [[민주당(1991년)|민주당]] [[노무현]]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사망 당시 직접적 원인이 기도폐색인데, 한 마디로 노인이 감기에 걸려 가래가 끓어 수면 중에 사망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한 원로 관료는 "서울시장 시절엔 그렇게 불도저처럼 온 동네 길을 뻥뻥 뚫어놓더니 어찌 갈 때는 자기 목의 가래 하나도 못 뚫고 가시는가." 하며 씁쓸한 말을 남겼다고... 2016년 7월 1일부터 8월 21일까지 [[경희궁]] 옆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불도저시장 김현옥' 특별전을 전시했다. [[http://www.museum.seoul.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02&sso=ok&seq=20160629095851771|#]] ==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rowbgcolor=black> {{{#white 연도}}} || {{{#white 선거종류}}} || {{{#white 소속정당}}} || {{{#white 득표수(득표율)}}} || {{{#white 선여부}}} || {{{#white 비고}}} || ||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 - || 낙선 || || ||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 [[무소속]] || - || 낙선 || ||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국내 정치인 (원본 보기) 김현옥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