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프랑스의 역사]] [[분류:기독교]] Édit de Nantes [[영어]] : Edict of Nantes [목차] == 개요 == '''낭트 칙령'''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의 첫 번째 국왕이던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인 [[위그노]]의 종교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개신교와 가톨릭 교도간의 통합을 도모하였으며 이 칙령으로 인해 위그노에게 광범위한 종교적 자유가 부여되었으며, 사회사와 종교사 측면에서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첫 사례로 꼽힌다. == 상세 == 앙리 4세는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개신교의 특정한 권리를 인정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는데, 두 개의 공증된 문서로 작성된 이 칙령은 파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개신교도가 모여 집회를 할 수 있으며, 개신교도의 보호를 위해 라 로셰에 병력을 주둔하고 그 비용을 국왕이 지불하며, 위그노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 150개의 요새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 이후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자는 엄벌에 처하며, 이를 밀고한 자에게는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수여하는 개신교 탄압 법률이 폐지되었고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낭트 칙령의 선포로 위그노 전쟁이 종결되었다. == 폐지 ==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칙령을 폐기하였다. 이로 인해 1685년부터 1698년까지 20~30만 명의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프로이센]], [[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 등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많은 수학자, 과학자[*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호이겐스)도 [[위그노]] 이주집안 출신이다.][* 현재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가 [[제네바]], [[뇌샤텔]] 등 [[스위스]] 서부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것도 이 사건의 여파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위그노]] 시계공들이 같은 [[프랑스어]]를 쓰는 데다 [[칼뱅|지배자 역시 개신교도]]인 이 지역으로 집단으로 이주했기 때문. 훗날 프랑스 궁정에서 활동한 [[Jaquet Droz|피에르 자케 드로]], [[Breguet|브레게]] 같은 [[캐비노티에|시계 장인]]들도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사람이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패키지로 놓친 셈.], 상공업자들의 이주로 프랑스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후 신앙의 자유는 1787년 루이 16세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뒤에야 다시 가능해졌다. 낭트 칙령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