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금석문]]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national_treasure/1612182.jpg 丹陽 新羅 赤城碑 [목차] == 개요 ==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신라]] 시대의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198호. == 상세 == 원래 [[고구려]] 영토였던 단양 지역을 [[정복군주]] [[진흥왕]] 시대 545~550년경에 공격해 차지한 뒤 현지 주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비석에는 440자 정도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사부]], [[탐지]], [[비차부]], [[김무력]] 등 [[삼국사기]]에서도 이름이 나오는 공신들의 이름이 나오고[* 삼국사기의 기록과 한자는 다르다. 예를 들면 [[이사부]] 장군은 적성비에서는 伊史夫, 삼국사기에서는 異斯夫로 나온다.] 이들에게 교시를 내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할 때 큰 도움이 됐다가 사망한 현지인 야이차(也尔次)와 그의 가족에게 포상하고, 다른 현지 원주민들도 야이차처럼 신라에 충성하면 상을 받을 것이라거나 하는 내용이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를 전후해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해 [[경상도]]에 국한된 지역 패권국가에서 삼국시대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진흥왕]] 시대에 세운 여러 비석 중 하나지만 다른 비석들과 달리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 순수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순수비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영토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보살피고 왕이 지나간 자리에 꽂아놓는 비석이고 적성비란 명칭대로 성을 쌓은 다음에, 만일 무너지면 공사한 놈은 디진다라고 한 축성비이다. [[삼국사기]] 내용을 토대로 545~550년 경 축성한 것으로 추론시 [[북한산비]]보다 시기가 먼저다. 비석은 1978년 1월 6일 [[단국대]] 정영호 교수가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해 찾아왔다가 한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숙였다가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고 한다. [[분류:신라]][[분류:금석문]][[분류:대한민국의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