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Dorothy Day""([[도로시]] [[데이]]) [[1897년]] [[11월 8일]]~[[1980년]] [[11월 29일]]. http://www.catholicnews.co.kr/news/photo/201211/8472_21911_723.jpg [목차] == 생애 == >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께서는 ‘[[십시일반|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언제나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습니다." - 1978년 세계성체대회 > "그녀는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 - 노트르담 대학 레테르 훈장 수여식[*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제도적인 개선의 노력이 첫번째고, 두번째로 영적인 운동을 통해서 편안한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는 뜻이다.] > “나는 네명의 위대한 미국인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마틴 루터 킹]], 토마스 머튼 그리고 도로시 데이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015년 미국 의회 연설시 [[미국]]의 크리스천 아나키스트, 여성운동, 진보적 가톨릭 운동, 노동운동, 반전평화운동가 [[1897년]]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언론인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재학 시절 미국 사회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고, 졸업 후 사회주의 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간호실습생 일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시절 낙태를 경험하고 이에 대한 [[트라우마]]로 종교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된다. 아니키스트 포스터 배더햄과 동거하며, 아이를 낳았으나,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 세례를 받길 원하자 헤어졌다고 한다. 이후 피터 모린과 함께 "가톨릭 노동 운동"이라는 노동자 신문과 "환대의 집"이라는 [[홈리스]] 시설을 모금을 통해서 운영해나갔다. 이 후 반핵, 노동운동, 반전운동, 인권운동등으로 평생동안 투옥을 반복하며, [[KKK]]등의 과격단체의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봉사와 사회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1980년 11월 29일, 한평의 주거공간도 재산도 소유하지 않은 그녀가 떠나면서 남긴 묘비명은 "Deo gracias.(하느님 감사합니다.)"... [[분류:미국의 인물]][[분류:사회운동가]] == 기타 == * 뉴욕 교구의 스펠만 추기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스펠만 추기경은 냉전시대 미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49년 교구소속의 인부들이 파업도중 당시 주교이던 스펠만이 인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후 스펠만이 [[베트남]]에 가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는 동안, 도로시는 국내에서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도로시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평화주의 선언을 위해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스펠만은 주교들에게 이 항목을 빼자고 주교들을 선동하였다고 전해진다. * 도로시 사후에 뉴욕 교구는 비교적 빠른 3년 후인 1983년에 시성절차를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종]]" 칭호를 받았다. 현재 "가경자"이며 시복심사절차가 진행중이다. * 도로시 데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로 어둠속의 천사(미국,1996년)가 있다. 모이라 켈리와 [[마틴 신]]이 주연을 맡았다. * 미국 대선 후보였던 [[샌더스]]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교황의 미의회 연설시 그 이름을 언급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도로시 데이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