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정치 사건사고]] [[분류:살인사건]] [[분류:방송 사건사고]] [[분류:쇼와 시대]] [include(틀:사건사고)] 상위문서: [[민족주의 테러]] [목차] == 개요 == [[파일:attachment/uploadfile/Tokyostabbing.jpg]] [* 이 사진은 막 찌르려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왼편에서 달려오면서 칼로 찌르고 다시 오른쪽으로 튕겨나간 장면이다.] {{{#!html <iframe width="420" height="315" src="//www.youtube.com/embed/b7X6MsqzcVU"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浅沼稲次郎暗殺事件(あさぬまいねじろうあんさつじけん)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Tokyo Stabbing [[1960년]], [[일본]]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TV 연설회에서 극우 소년에게 살해당한 사건.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 靖)가 절묘한 순간에 찍은 사진의 영문 제목인 Tokyo Stabbing으로 유명해지면서 이 사진으로 나가오 야스시는 1961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으며, 또한 사진 뿐만 아니라 영상도 고스란히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최악의 [[방송사고]] 중 하나가 되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b7X6MsqzcVU&feature=related|동영상]] 18초부터 나오는데 찔렀을 때의 충격이 강했던지 순식간에 피의자와 피해자의 [[안경]]까지 동시에 날아간다. == 피해자 아사누마는 누구인가? == http://www5.sdp.or.jp/event/branch/images/081010_asanuma.jpg?width=300 아사누마 이네지로 [[1898년]] [[12월 27일]] ~ [[1960년]] [[10월 12일]] 아사누마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 노선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중도적 정치인이었으나 [[중공]]에서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공통된 적이라는 요지의 좌익 노선에 충실한 연설 등을 하던 정치인이었다. 복잡한 정치 행보 끝에 1960년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일본 자민당]], [[일본 민사당]][* 니시오 스에히로 등 사회당 일부 계파가 사회당을 탈당해 만든 정당. 1994년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했다.], 일본 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당일 미국과 일본의 협정을 비난하는 아사누마의 연설 도중 일본의 [[극우]]파들은 야유와 협박을 하였지만 아사누마는 계속 연설을 이어갔으며 그러자 17세인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달려와서 순식간에 아사누마의 복부를 긴 칼(코등이 없는 [[와키자시]])로 찌르게 된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였다. == 범인은 누구인가? == [[파일:Z5HDEoG.jpg]] 야마구치 오토야 1959년 16세의 나이로 [[대일본애국당]][* 전쟁 전부터 활동하던 [[반공]]주의자들이 모여 만든 정당.]의 [[아카오 빈]][* 과거에는 사회주의자였으나, 고등경찰에 끌려가서 한번 [[코렁탕]]을 먹고 나서는 "천황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반공, 반소비에트 주의자였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의 연설을 듣고 감회받아,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한다. 대일본애국당의 청년 본부 위원이 되었다. 이후 좌익 정치인의 연설에 난입해 [[깽판]]을 부리는가 하면, 아카오 빈의 연설을 비난하는 사람을 두드려 패는, 일종의 자발적 [[정치깡패]] 노릇을 하게 된다. 입당한지 반년 만에, 대일본애국당을 탈당한다. 이유는 '''"더 과격한 활동을 하게 될텐데, 이대로는 아카오 빈 선생과 당에 폐가 될거 같아서"'''(...). 1960년 7월 1일, 동지들과 함께 [[전아시아반공연맹]]을 결성한다.[* 이 단체는 훗날 [[방공정신대]]라는 정신나간(...) 이름의 단체로 발전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가선우익|임협우익]]"을 자처하며 행동대(를 자처하는 깡패)로 활동한다. 원래 이들은 1955년 결성된 방공신문사의 "방공신문사 청년봉사단"--[[엄마부대 봉사단]]?--으로 결성되었으나, 1960년의 [[안보 투쟁]] 이후 [[고다마 요시오]]와 점점 더 친하게 지내면서 과격화 되었다. 이후 방공신문사에서 파문당하고 난 잔여멤버들이 전아시아반공연맹과 합세하여 방공정신대가 된다. 트럭에 확성기를 올려놓고 거리에서 시끄럽게 연설하며 다니는 "가선 스타일"의 원조라고 자처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주주총회]]의 총회꾼 짓이나 어린 폭주족들을 꼬드겨서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일로 유명하다고 한다(...).] 1960년 10월 4일, 그는 집에서 우연히 [[와카자시]]를 찾아냈다. 그는 즉시 [[메이지 신궁]]을 참배한 후, [[고바야시 다케시]] [[일본 교원 노동조합]] 위원장과 [[노사카 산조]] [[일본공산당]] 의장에게 전화를 건다. "대학의 학생위원인데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면담을 요청하지만 고바야시 다케시는 이사갔고(...) 노사카 산조는 여행중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10월 12일. 문제의 그 사건이 터진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의 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나는 너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을 즈음한 폭언과 국회난입의 직접적인 선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있어 나는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황기 2620년(1960년) 10월 12일 [* 원문은 다음과 같다. 汝、浅沼稲次郎は日本赤化をはかっている。自分は、汝個人に恨みはないが、社会党の指導的立場にいる者としての責任と、訪中に際しての暴言と、国会乱入の直接のせん動者としての責任からして、汝を許しておくことはできない。ここに於て我、汝に対し天誅を下す。 皇紀二千六百二十年十月十二日 山口二矢。] 살인범 야마구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원]]에서 [[치약]]으로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歲(칠생보국[* "일곱 번 거듭 태어나도 역적을 주살해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의미다. [[남북조시대]]의 남조 측 [[고다이고 덴노|근황파]] 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해 자결하면서 남긴 사세구로 알려져 있는데, 의미가 의미인만큼 [[일본 제국]] 시절 군국주의 교육에도 쓰였고, [[카미카제]] 대원들의 하치마키(머리띠)에도 쓰이기도 했다.], 천황폐하만세!)''' 라는 내용의 [[유서]]를 쓴 후 목을 매 [[자살]]했다. 참고로 [[소설가]] [[사와키 고타로]]에 따르면 자민당 실력자인 [[고노 이치로]]와 그 외 다른 정치인도 야마구치의 [[테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태평양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언설을 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 [[황족]]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좌익 세력을 아니꼽게 보고 있던 우익들은 천벌을 받았다며 그의 행동을 찬양하면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등 선전용으로 잘 이용해 먹었다. 지금도 그가 세상을 떠난 11월 2일에는 우익 단체에 의해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제의 이름은 山口二矢烈士墓前祭로, 구글에 검색하면 이미지가 많이 나온다. 야마구치 오토야의 아버지는 [[육상자위대]] 소속의 장교로 1959년에 1등육좌(대령)였다. 아들이 저지른 일로 인해 자위대에서 부담을 느껴 그는 전역해야 했다. == 후폭풍 ==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이 패배할 것 같았으나[* 물론 사회당이 낸 후보자수가 196명 정도라 정권교체 될 가능성은 적었다.]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296석/467석 57.4%), 민사당이 유탄을 맞아 의석수가 40석에서 17석으로 줄어들어 참패했고 사회당은 의석수를 122석에서 145석으로 늘리기는 했으나 [[1958년]] 총선 때보다 의석수가 적었다. 참고로 아사누마가 암살당한 뒤 사회당에서는 그의 부인인 아사누마 쿄코(浅沼 享子)가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3년 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입후보하지 않고 사퇴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전일본이 어린이들에게 "날붙이 추방 운동"을 실시하면서, 규제에서 제외 대상이었던 히고노카미[* 肥後守. 일본형 접이식 사무용 및 미술공작용 칼]와 연필깎이 칼[* 안전 칼집이 있고, 날이 [[기요틴]] 날처럼 비스듬한 날이 가진 칼.] 등을 1963년 4월 5일 총도법(銃刀法. 총포도검류등단속법(銃砲刀剣類等取締法)의 준말) 개정안에 추가로 적용시켰다. 여담으로 일본 래퍼 NORIKIYO의 노래인 仕事しよう의 뮤직비디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 기타 ==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2007년 벌어진 [[아르메니아]]계 [[터키]] 언론인 흐란트 딩크 암살사건이다. 범인인 사마스트 오군은 1990년생으로 야마구치랑 똑같은 17살이었다! 터키 극우파인 오군인 [[아르메니아 학살]]을 연이어 보도하던 딩크를 살해했으며 잡혀가는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다음은 [[오르한 파묵]] 차례다! 라고 외치는 통에 오르한 파묵은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야 했다.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사건사고 (원본 보기) 도쿄 찌르기 사건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