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감독/목록]] http://s.tf.rs/2012/11/19/Rajko-Mitic.jpg?width=340&height=355 레드 스타의 5성 중 필두 || 이름 || 라이코 미티치 [br] (Rajko Mitić) || || 생년월일 || [[1922년]] [[11월 19일]] || || 사망년월일 || [[2008년]] [[3월 29일]] || || 국적 || [[유고슬라비아]] || || 출신지 || 벨라 팔랑카[* 현재로 따지면 [[세르비아]]] || || 포지션 || 스트라이커, 인사이드-라이트 || || 신체조건 || 173cm / 74kg || || 등번호 || 9[*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1950년 월드컵]]], 8[*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년 월드컵]]] || || 소속팀 || OFK 베오그라드 (1938-1944) [br]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45-1958) || || 국가대표 || 59경기 / 32골 (1946-1957) || || 감독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1966-1970) || [목차] == 생애 == === 어린 시절 === 미티치는 1922년 [[유고슬라비아]]의 벨라 팔랑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일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축구를 배웠다. 그의 부모는 그가 축구하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는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1937년부터 그는 코슈트냐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1938년에는 당시에 잘 나가던 팀 중 하나인 BSK 베오그라드에서 뛰게 되었다. === 클럽 === 미티치는 1940년에 처음으로 1군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전쟁]]으로 인해 미티치 역시 세계 각지의 많은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임시 리그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하면서 실력을 키워갔고 1945년에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레드 스타]]로 팀을 옮겼다. 그리고 특유의 [[리더십]]으로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첫 [[주장]]에도 선임되었다. 하지만 1947년 시즌은 무릎 반월판 부상으로 인해 미티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미티치가 이끄는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1948년 처음으로 컵 대회에서 최대 라이벌 [[FK 파르티잔]]을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미티치는 이것이 커리어 사상 가장 좋았던 기억이라고 회고했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염원하던 첫 리그 우승도 이루어냈다. 그가 뛰는 동안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거칠 것이 없었고 유고슬라비아 내에서는 큰 성공을 이루어냈다. 1948년부터 10년 동안 3번을 제외하면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고, 컵 대회 결승에도 6차례에나 나갈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장 라이코 미티치가 있었다. 그래서 라이코 미티치는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5인의 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국가대표로도 미티치는 여러 대회에 나가 활약을 하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에 두 번씩 나간 것. 하지만 [[스티에판 보베크]], [[블라디미르 베아라]], 브랑코 제베치, 제이코 차이코프스키 등 여러 스타 선수들과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국제무대에서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1948 런던 올림픽|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티치는 4강에서 영국 단일팀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결승에서 만난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에게 3대 1로 패함으로서 준우승 확정.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2년 후의 월드컵]]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예선 1조에 속했던 유고슬라비아는 잘 나갔다. 조별 예선 최종전을 앞두었을 때 성적은 유고슬라비아가 1위, 개최국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이 2위였다. 하지만 시합을 앞두고 유고슬라비아에게 큰 불운이 찾아왔다. 미티치가 [[에스타디우 두 마라카낭|마라카낭 경기장]]에서 경기를 앞두고 입장하다 철제 대들보에 머리를 부딪친 것. 미티치는 이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고 20분간 치료하느라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경기는 이미 [[아데미르]]의 골로 기울어 있었고, 미티치는 뒤늦게 경기장에 들어갔지만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지뉴]]의 추가골을 얻어맞고 유고슬라비아는 2대 0으로 패배. 2위를 차지했음에도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와야 했다. [[1952 헬싱키 올림픽|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미티치는 6골을 넣으며 같은 팀의 브랑코 제베치에 이어 득점 전체 2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결승 상대는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유고슬라비아도 강했지만 헝가리가 너무 강했고, 결국 2대 0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스위스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8강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을 만났고 서독에게 2대 0으로 패하며 짐을 싸고 말았다.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다음 월드컵]] 예선에서 유고슬라비아가 탈락한 것이 미티치에게는 마지막 국가대표 출전이었다. 미티치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 총 32골을 넣었으며 3번의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 은퇴 이후 === 은퇴 후 미티치는 친정팀 츠베르나 즈베즈다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그 후 1966년부터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그의 최고 성과는 츠베르나 즈베즈다의 후배 [[드라간 자이치]]를 축으로 하여 이끈 [[유로 1968]]에서의 준우승이었다. 비록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에게 아깝게 패배하였지만 그들의 실력은 유럽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970년 에 사령탑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츠베르나 즈베즈다의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 플레이 스타일&평가 == 기술적으로 꽤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발 슈팅은 강력한 무기였다. 또한 리더십이 뛰어나 주장으로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였다. == 뒷 이야기 == * 미티치의 리더십은 처음부터 발휘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 브랑코 스탄코비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명령을 듣지 않기도 했다고. * 미티치의 마지막 시즌인 1958년. 하이두크 스플리트와의 원정경기 도중 팬들이 던진 돌에 레드 스타의 보라 코스티치가 맞았다. 미티치는 선수들을 이끌고 경기장에서 철수하였는데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는 츠르베나 선수 9명에게 한 달간의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 수상 == === 클럽 ===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5회: 1938–39(이상 OFK 베오그라드), 1951, 1952-53, 1955-56, 1956-57(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4회: 1939–40(이상 OFK 베오그라드), 1948–49, 1950, 1952(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4회: 1948, 1949, 1950, 1958(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컵 준우승 2회: 1952, 1954(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세르비아 리그[* [[제2차 세계대전|2차 대전]] 당시 임시 리그] 우승 3회: 1940–41, 1942–43, 1943–44(이상 OFK 베오그라드) === 국가대표 === * 올림픽 준우승 2회: [[1948 런던 올림픽|1948]], [[1952 헬싱키 올림픽|1952]] === 감독 === * [[유로컵]] 준우승 1회: [[유로 1968|1968]] 라이코 미티치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