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분류:소련/인물]][[분류:군인]][[분류:제2차 세계대전/군인]] [include(틀:소련군/원수)] [[파일:attachment/malinovskyportrait.jpg]] 이 초상화는 http://www.tonnel.ru/gzl/806648353_tonnel.gif 이 사진을 보고 그려졌다. 거의 유일한 노년의 말리놉스키 사진. [목차] == 개요 == ||||http://forum.valka.cz/attachments/osobnosti/Ceskoslovensko/MalinovskyRodYakov.jpg?width=400|||| ||<:>이름 ||<:>[[러시아어]]: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br] [[영어]]: 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br] [[한국어]]: 로디온 야코플레비치 말리놉스키 || ||<:>출생 ||<:> [[1898년]] [[11월 23일]], [[러시아 제국]] [[오데사]] || ||<:>사망 ||<:> [[1967년]] [[3월 31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 ||<:>복무 ||<:>[[러시아 제국]]군(1914-1917) [br] [[소련군]](1918-1967) || ||<:>최종 계급 ||<:>[[육군]] [[원수(계급)|원수]] || ||<:>주요 보직 ||<:>소련 [[국방장관]] || ||<:>주요 참전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br] [[스탈린그라드 전투]] [br] [[만주 작전]] ||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br] [[레닌훈장]] 5회 || [[소련군]] [[육군]]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계급)|원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무공을 남겼고, 전후에도 소련군의 전투력 강화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근데 은근 듣보라 그런지 구글에서 검색하면 99% 타이틀의 초상화만...~~ == 생애 == === 유년기와 1차대전, 적백내전 시기 ===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무슨 이유인지 살해당했고,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가족]]들을 이끌고 우크라이나의 시골 마을로 이주해 [[재혼]]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식솔이 늘어서 좋을 게 없다고 말리놉스키를 박대했고, 결국 열세 살 때 집에서 쫓겨나 농장 일을 하거나 [[오데사]]의 [[이모]] 집에 얹혀 살면서 식료품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등 거친 생활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말리놉스키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병역 의무도 질 필요가 없었지만, 너무 팍팍한 삶 때문이었는지 동부전선으로 향하던 군용 열차에 몰래 탑승해 [[러시아군/역사|러시아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1915년에는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한 공로로 성 게오르기 메달 4급을 수훈받았지만, 직후 심한 부상을 입어 육군 병원에서 요양해야 했다. http://www.echo.msk.ru/att/element-722543-misc-1.jpg 까리했던 1916년. 퇴원한 후에는 [[프랑스]]로 가서 재불 러시아인들이 조직한 원정군에 합류해 계속 싸웠고, 종전 후 1년 뒤인 1919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붉은 군대]] 육군에 입대했다. [[적백내전]] 시기에는 [[시베리아]]에서 저항하던 백군을 상대로 여러 전과를 올렸고, 내전 종결 후에는 정식 지휘관 교육을 받은 뒤 [[소총]] [[대대]]의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 전간기와 2차대전 시기 === 1926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1927~30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졸업 후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던 제3[[기병]][[군단]]의 [[참모장]]으로 근무했고,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6~38년에는 [[좌파]] 공화군을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으로 파견되었다. 덕분에 비슷한 시기 소련에서 진행된 [[대숙청]]의 풍파를 피할 수 있었고, 귀국한 뒤에도 오히려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레닌훈장]]과 [[적기훈장]]을 받았다. http://www.echo.msk.ru/att/element-787731-misc--1938.jpg 1938년. 어째 갸름했던 젊을 적보다 야무지게 생겼다. 이런 다부진 인상은 노년까지 이어진다. ~~[[김정은|살 안 찐 뚱땡이우스]]?~~ ~~[[김정은|정은]]아 운동해라~~ 이후 프룬제 군사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독소전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1941년에 이전 상관이었던 국방장관 티모셴코의 부름을 받고 야전 업무에 복귀했고, 오데사 군관구 소속의 제9군 산하 제48[[소총]]군단 [[군단장]](계급은 [[준장|소장]])에 부임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수뇌부는 독일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말리놉스키는 티모셴코나 [[게오르기 주코프|주코프]] 등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현실화되었다고 예견하고 전투에 대비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제9군은 [[루마니아]]와 맞닿은 프루트 강의 국경지대에서 [[독일군]]과 처음 맞닥뜨리게 되었다. 말리놉스키는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등의 대담한 행동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일시적이나마 독일 육군의 진격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강한 독일 육군의 공세 때문에 결국 [[흑해]] 연안을 따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 도중 말리놉스키의 부대는 미콜라이우에서 독일 육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지만, 이 포위를 뚫고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로 탈출했다. 비록 후퇴하기는 했지만, 말리놉스키는 독일군의 침공에 강하게 맞선 전과 덕에 8월에 제6군의 참모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계급)|중장]] 계급을 받고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독일군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고 돈바스 지방으로 후퇴한 제6군은 재빨리 병력과 물자를 보충받아 개편되었고, 말리놉스키는 제12군과 합동으로 독일군의 동진을 저지하는 작전을 펼쳤다. [[겨울]]이 되자 독일군의 진격은 둔화되었고, 말리놉스키는 12월에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당시 남부전선군은 세 개의 [[야전군]]과 두 개의 [[기병]]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부대든 인력과 물자의 소모가 막심했고 기병 군단의 경우 사실상 [[사단(군사)|사단]] 정도로 축소된 [[현시창]]이었다. 하지만 말리놉스키는 전의를 다잡고 역공을 가해 독일군 방어선을 어느 정도 서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1942년 5월에는 티모셴코가 지휘한 남서전선군의 일원으로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가했는데, 소련군의 역량을 너무 과신한 티모셴코가 무리한 전략을 짰다가 [[역관광]] 당하면서 첫 대패를 당했다. 이 패배의 책임은 주로 티모셴코가 졌기 때문에 말리놉스키는 크게 문책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의심병 환자 스탈린은 말리놉스키가 서방의 반공 성향 [[정치인]]들과 내통하면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져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근거없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입은 손실 때문에 남서전선군은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말리놉스키도 북[[캅카스]] 전선군으로 옮겨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스탈린은 말리놉스키에게 로스토프로 진격해 오던 [[빌헬름 리스트]]의 독일 A집단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말리놉스키는 무리한 명령이라고 생각했지만 ~~까라면 까야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방어전은 우려했던 대로 또 실패해 탈탈 털리고 말았다. 소련군이 [[볼가 강]]까지 밀리게 되자 스탈린은 말리놉스키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비하려고 도시 북동부에 급조한 제66군 지휘관으로 앉혔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말리놉스키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는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부의 [[정치장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에게 말리놉스키의 동태를 철저히 관찰하라고 지시했다. 말리놉스키가 맡게 된 제66군은 그 때까지 전투 경험이 전무했던 [[뉴비]] 부대였지만, 1942년 9~10월 동안 진행된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에서 스탈린그라드 북부 방면의 포위 위기를 막아내고 진격을 둔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11월에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바실렙스키]]가 입안한 천왕성 작전으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던 독일 육군 제6군이 포위되자,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돈 집단군에 스탈린그라드 남서 방면에서 소련군 포위망을 돌파해 제6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헤르만 호트]]가 이끈 기갑 집단을 선봉에 내세운 돈 집단군은 명령대로 남서 방면으로 진격했지만, 말리놉스키는 이를 발견하고 제2친위군을 동원해 호트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리고 소(小) 토성 작전의 일환으로 돈 집단군을 역으로 포위하는 작전까지 실행했지만, 포위 직전 호트 기갑 집단은 가까스로 퇴각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 방치되어 있던 독일 육군 제6군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련군에 항복하면서, 소련은 독소전쟁 개전 이래 독일을 상대로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전으로 조공을 맡았던 말리놉스키도 [[중장|상장]]으로 승진했고, 동시에 수보로프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43년 2월에는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해 [[로스토프]]에서 만슈타인과 맞붙었고, 여기서 만슈타인 군을 분쇄하고 [[우크라이나]]로 통하는 길을 여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대장(계급)|대장]]이 되었고,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돈바스 공업지대를 재탈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말리놉스키는 10월 중순에 독일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해 자포리자에서 섬멸하는데 성공했고, 이 결과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양단되고 말았다. 이후 말리놉스키는 제3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개칭된 남서전선군을 계속 지휘했고, 1943년 12월부터 1944년 4월까지 독일 남부집단군을 탈탈 털면서 자신의 고향 오데사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해방시켰다. 이 공로 덕에 그 동안 서방 끄나풀 아니냐고 의심하던 스탈린도 말리놉스키를 다시 보게 되었고, 1944년 5월에는 말리놉스키를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속시켜 [[몰도바]]를 해방시키고 [[루마니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말리놉스키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은 [[표도르 톨부힌]]과 함께 첫 공세를 시작했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을 앞세운 독일군의 강한 저항을 만나 실패했고, 8월 말에 마찬가지로 톨부힌과 연합해 더 강하고 기습적인 대공세를 벌여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을 합쳐 415,000명의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신나게 두들겨맞은 루마니아는 그 동안 철권 통치를 휘두르던 친독 성향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를 쫓아내고 [[연합국]]으로 돌아섰고, 말리놉스키는 이 공로로 톨부힌과 함께 소련 [[원수(계급)|원수]] 계급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말리놉스키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은 트란실바니아알프스 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진격했고, 10월에 [[데브레첸]]을 점령했다. 이어 소모된 병력과 물자를 톨부힌의 제3우크라이나전선군과 새로 편성된 루마니아 제1군/제4군의 협력으로 보충한 뒤 12월 말에 [[부다페스트 공방전|부다페스트 점령 작전]]을 시작했다. 히틀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다페스트를 내줘선 안된다면서 여섯 개의 [[슈츠슈타펠|무장친위대]] 기갑사단과 다섯 개의 육군 기갑사단을 동원해 반격하도록 명령했지만, 이미 수많은 전투 경험을 갖추고 장비 면에서도 훨씬 우세했던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한 달 반 가량 계속된 격렬한 시가전 끝에 말리놉스키는 [[부다페스트]]를 점령했고, 그 기세를 계속 이어서 [[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키고 1945년 4월에 [[오스트리아]]의 [[빈(오스트리아)|빈]]을 점령했다. 말리놉스키의 진격은 4월 말에 [[체코]]의 브르노를 해방하면서 끝났고, 소련은 이 연이은 공세의 성공으로 루마니아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유럽 전선의 전쟁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말리놉스키는 극동 지역의 트란스바이칼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만주 작전]]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수많은 야전 경험을 쌓았고 장비도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육군|일본 육]][[일본 해군|해군]]에 비해 훨씬 좋았던 소련군은 겨우 열흘 동안 관동군을 신나게 털었고, 말리놉스키는 이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받았다. === 종전 후 === 2차대전 종전 후 말리놉스키는 트란스바이칼-아무르 군관구의 사령관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고, 극동군 총사령관 시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중국 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과 [[북한]] [[조선인민군]]의 훈련과 물자 보급을 맡아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또 스탈린으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받아 [[소련 최고회의|소련 최고 소비에트]] 의원(1946)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1952)으로 임명되는 등 정계에도 진출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가 해체된 뒤에도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직했고, 이후 흐루쇼프가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 끝에 [[서기장]]이 되자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과 국방차관에 임명되었다. 독소전쟁 시기부터 말리놉스키를 눈여겨 보던 흐루쇼프는 그가 주코프보다 덜 반항적이고 체제 순응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켜주고 있었다. 결국 주코프가 흐루쇼프의 핵무장 방침에 반발하다가 1957년 10월에 [[국방장관]] 자리에서 축출되자, 말리놉스키는 주코프의 후임으로 자리를 이어받았다. 물론 말리놉스키도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핵만능주의|핵무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훨씬 유화적이고 외교적인 수사로 흐루쇼프를 설득해 [[핵무기]] 개발과 재래식 군대의 현대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흐루쇼프가 실각한 뒤에도 고도의 처세술을 발휘해 계속 국방장관으로 재임했고, 군의 현대화와 독자성 확보에 주력하다가 1967년 3월에 병환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여타 소련 육해군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소련 육군 기갑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 말리놉스키 명칭 기갑학교로 개칭되었고, 모스크바 군관구 산하의 육군 제10우랄스코-르봅스카야 근위전차사단에도 말리놉스키의 이름이 붙었다. == 수상 경력 ==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1945, 1958) * [[전승훈장]] (1945) * [[레닌훈장]] 5회 (1937, 1941, 1945 2회, 1958) * [[적기훈장]] 3회 (1937, 1944, 1950) * 수보로프훈장 1급 2회 (1943, 1944) * 쿠투조프훈장 1급 (1943) *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훈장 (1964) *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별 훈장 1급 (1956) * [[몽골]] 수흐바토르훈장 (1961) * 몽골 적기훈장 (1945) * [[체코슬로바키아]] 백사자훈장 1급 (1945) * [[미국]] 훈공장(Legion of Merit) (1946)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2급) (1945) * [[루마니아]] 조국수호훈장 1~3급 (1950) * [[헝가리]] 공화국훈장 1급 (1947) * 헝가리 해방훈장 (1946) * [[모로코]] 군공훈장 1급 (1965) * [[북한]] 국기훈장 1급 (1948)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소련군/원수 (원본 보기) 로디온 말리놉스키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