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http://media.web.britannica.com/eb-media/60/47760-004-3B01BB2F.jpg [[제2차 세계대전]] 시절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c/Maxwell_D_Taylor_official_portrait.jpg/250px-Maxwell_D_Taylor_official_portrait.jpg [[합참의장]] 시절 '''Maxwell Davenport Taylor''' 1901년 8월 26일 출생 ~ 1987년 4월 19일 사망 [[미 육군]]의 [[군인]]이자 [[외교관]]. 1922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제82공수사단]]에서 [[참모장]]을 지내며 공중강하를 자주 했는데, 여러 [[유럽]]인들과 어울리던 이때 외국어 능력을 잘 써먹었다고.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조직된, 우리에게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친숙한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이자 미군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린 육군[[소장(계급)|소장]] 빌 리 [[장군]]이 심장마비 증세로 입원하자 공석이 된 101사단장 자리에 보임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휘하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채 낙하산을 탔다. 당시 부사단장인 육군[[준장]] 돈 프랫 장군은 [[글라이더]] 도중 사고로 전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버로드 작전]] 전체에서 최고계급 전사 기록이었다고. 여담으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데이비드 웹스터 이병이 강하 직후 똑딱이[* 암구호 대신 사용했던 피아 식별용 장난감이다.]를 잃어버렸다가 똑딱이 소리가 들리자 똥줄타서 소속 부대와 성명을 쫙 읊어서 쏘지 말라고 외쳤더니 그 상대방이 사단장 테일러 장군이었더라... 하는 카더라가 있다. 101사단을 2차대전 내내 지휘했지만 정작 이미지는 좋지 않았는데, 하필 본국에서 회의 같은거 한다고 소환해서 끌려갔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르덴 대공세]]를 비롯한 수많은 혈투에서 그는 부재중이었고 부사단장이던 육군준장 앤서니 매콜리프 장군이 사단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6화에서 사단장 순시가 있을때도 매콜리프 장군이 나온다.] 때문에 많은 사단 [[장병]]들이 맥스 테일러에겐 딱히 좋은 감정을 지니진 않았고, 테일러 장군도 그것을 알았기에 바스토뉴에서 함께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며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e/TheCadetHonorCodeMonument.jpg/220px-TheCadetHonorCodeMonument.jpg 전후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임명되어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의 Honor Code를 제시하기도 했다. 육사 교장을 거친 이후 유럽으로 다시 배치되었다가, [[6.25 전쟁]] 후반기에 [[미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에 배치되었고 [[주한미군]]의 전신 극동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며, 이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였다.[* 전임은 다름아닌 82사단 시절 사단장으로서 자신의 멘토 역할을 했던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리지웨이와 테일러의 2차대전/한국전쟁기 커리어는 꽤 유사한 흐름을 탔으며, 실제로도 리지웨이는 테일러의 멘토이자 절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 [[아칸소]]주 리틀록에 101사단이 흑인 학생들의 경호 병력으로 배치될 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를 따라 일처리를 주도하기도 했고, 이후 1959년 퇴역했다. 임기 후반기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핵전력 의존정책을 비판하기도 했고 합참이라는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는등 [[높으신 분들]]과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커리어의 끝이 아니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이후 [[피그만 침공]]이 [[망했어요]]로 끝나자 새 [[합동참모의장]] 인선에 나서서 마땅한 현역이 없길래 그냥 퇴역한 테일러 장군을 다시 불러서 현역 복귀시킨뒤 합참의장에 임명해버렸다.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후보 이전 시절부터 아이크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비판하며 테일러와 뜻을 같이 하였던 인물이라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특히 [[로버트 F. 케네디]]와 친해져서 RFK가 아들의 이름을 매튜 '''맥스웰 테일러''' 케네디라고 짓기도 했다. 하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커티스 르메이]]와 함께 [[쿠바]] 공습을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남베트남의 쿠데타와 [[응오딘지엠]]의 하야와 처형 등의 여러 현안으로 전운이 돌던 1960년 초중반에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합참의장으로서 적절한 조언을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응오딘지엠의 하야를 부른 군부 쿠데타에다 8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 당시 일련의 행동들은 1997년 [[H.R. 맥마스터]] 육군[[소령]][* 2014년 상반기 현재 계급은 소장으로, [[척 헤이글]] 국방장관에 의해 중장 진급이 내정된 상태다. 21세기에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과 관련하여 미 육군 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로 꼽혀서 중장에서 더 나아가 이후 여러 중요 대장 보직에의 내정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 발간한 서적 <직무유기(Dereliction of Duty)>에서 통렬한 비판을 받는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석기시대 매니아]] 장군의 행보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1964년 퇴역한 후 [[남베트남]] 대사로 임명되었고 [[베트남 전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군복을 벗은 후에도 [[롤링썬더 작전]], 일명 '''북폭'''을 주장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란 결말이 나온 것도 [[안습]]. 주월대사를 역임한 이후엔 [[린든 B. 존슨]] 행정부의 말기와 [[리처드 닉슨]] 행정부 초반에 대통령 직속 정보자문위원장을 지냈다. 말년에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 일명 [[루 게릭]] 병을 앓다가 1987년 4월 19일 사망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맥스웰 테일러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