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 '''[[모용선비/왕사|후연의 역대 군주]]''' || ||<width=30%> '''[[후연]] 건국''' || {{{+1 ←}}} ||<width=30%> 1대 세조 성무제 || {{{+1 →}}} ||<width=30%> 2대 열종 혜민제 || ||<width=30%> [[모용위]]([[전연]]) || {{{+1 ←}}} ||<width=30%> 모용수 || {{{+1 →}}} ||<width=30%> [[모용보]] || ||<tablealign=right> '''생몰년도''' || 326년 ~ 396년 음4월(71세)[*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향년을 적용.] || || '''재위기간''' || 384년 음1월 ~ 396년 음4월(13년)[*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재위기간을 적용.] || || '''[[묘호]]''' || [[세조]](世祖) || || '''시호''' || 성무황제(成武皇帝) || || '''연호''' || 연원(燕元) 384.1~386.2 [br] 건흥(建興) 386.2~396.4 || || '''부모관계''' || 아버지: [[모용황]] / 어머니: 난씨 || [목차] * [[중국사 관련 정보]] * [[모용선비/왕사]] * [[모용선비/계보]]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에 [[선비족]]이 세운 [[후연]]의 초대 군주. 후연은 [[전연]]을 계승했으므로 전연까지 포함하면 4대 군주이다. 전연 이전 모용부의 [[모용외]]부터 세면 5대 군주. '''거듭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일세의 효웅인 동시에 오호십육국시대 [[배신]]의 아이콘.'''[* 그래도 본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모용수의 배신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매우 많고, 그 자신도 되도록이면 의리를 지키려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유비(삼국지)|유비]]?~~ 뭐 그만큼 오호십육국시대가 막장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자.(...)] 처음 이름은 패(覇)였지만 뒤에 수(垂)로 고쳤고, 자는 도명(道明), 시호는 성무(成武)이다.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5남으로 태어났다. 더욱이 그 유명한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에 앞장서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이 있어서 맏형 [[모용준]]의 견제를 받았지만, 모용준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전연이 화북의 절반[* 화북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태행산맥의 동쪽으로 관동(關東)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는 화남이 아직 개발되지 못하여 사실상 중원의 1/3에 해당하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나머지 2/3는 태행산맥 서쪽의 관중(關中)과 회하 남쪽의 강남(江南).]을 석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용준이 죽은 뒤 정권을 잡은 숙부 모용평이 자신을 모살하려 하자 달아나 [[전진]]으로 망명했고, 고국인 전연은 이내 전진에게 멸망당했다. 그러던 중 전진이 [[비수대전]]의 대패로 [[시망]]하자 이를 틈타 전연의 고토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황제로 즉위, 59세의 나이로 멸망한 지 14년 만에 연나라를 부활시키고 옛 전연의 영토를 모두 수복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후연에 협력하던 방침을 내버리고 독자노선을 걷자 태자 [[모용보]]를 보내서 북위를 공격했다가 참합피에서 대패했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던 중 [[참합피 전투]]의 현장을 목격한 충격으로 숨지고 말았다. == 일생 == [[모용황]]의 5남으로, [[전진]]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시망]]하자 부견을 돕는 척하며 몰래 빠저나와 384년에 전연을 재건하여 후연을 세웠다. 애초에 모두가 말리던 부견의 [[동진]] 정벌을 유일하게 편들던 사람이 모용수였다... 이를 전진의 부견이 망하게 하기 위한 책략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모용수는 부견의 전진군이 비수대전에서 산산조각이 났을 때 부대를 온존한 상태로 부견을 맞아들여 보호했을 뿐 아니라 흩어진 전진군을 그나마 수습한 것도 거의 모용수의 힘이었다. 그 후에 전연의 옛 지역으로 가서 후연을 세우기는 했지만 사실 부비 등의 전진 세력은 모용수를 계속 견제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 때까지는 모용수도 성실하게 전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전진에서 독립한 것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부견은 후에 모용수가 자립할 때도 특별히 못되게 굴지 않았다. [* 부견은 몰락 후 [[요장]]에게 살해되기 직전 훗날 [[서연]]에 의해서 모용씨를 핍박하긴 한다. (물론 서연은 모용수에게도 적대적이었지만) 이때 탈출한게 손자 [[모용성]].] 그는 단순히 [[전연]]의 이름만 빌린 게 아니라 '''말그대로 전연을 후연으로 [[부활]]시켰다.''' 실제로 영역이나 국력등 여러 면모가 전연과 유사하다. 세력을 파죽지세로 확장하여 구 전연의 영역이였던 [[요동]],[[요서]],[[하북]]은 물론 394년에는 [[산동]]까지 장악하고 순식간에 화북의 패자로 등극했다. 전연-전진-동진의 삼국정립은 다시 후연-후진-동진의 삼국으로 재정립되었다. 사실 [[강족]]의 [[요장]]이 다스린 후진은 [[전진]]의 잔존세력이나 서연, 서진(西秦), 후량, 남량, 북량, 서량, 남연 등을 진압해야했고, 신진세력인 [[북위]]와 갈등해야했다는 점에서 후연이 더 우세했다.[* 애초에 관동이 관중보다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세력에서 후진을 압도했다. 모용수 사후에 후연이 북위의 침공을 받고 몰락하고 후진이 주변을 정리하고 세력을 불리자 후진이 후연을 능가하게 된다.] 그러나 늙으막에 그의 몰락이 시작된다. 386년 [[북위]]를 세운 [[탁발규]]를 초기에 지원했던게 화근이었다. 391년 탁발규의 동생 탁발고를 볼모로 삼고 군마를 요구했으나 어차피 부자승계할 생각이었던 탁발규는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395년 북위를 토벌하기 위해 태자 [[모용보]]를 보냈으나, 탁발규는 모용보를 속여 모용수가 이미 죽은 것으로 착각하게 했다[* 모용수의 나이가 당시 일흔이었다.]. 모용보는 급히 회군했고, 참합피 전투에서 개발리고 만다. 하지만 급히 회군한 모용보가 만난건 아직 정정하게 살아있던 모용수... 모용수는 복수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해 방비가 허술한 [[평성]]을 쉽게 점령했으나[* 탁발규도 모용수의 습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평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은신할 정도로 모용수의 공격은 노련했다.], 참합피를 지나다가 참패한 후연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룬 모습을 목격하고 울분에 피를 토하며 396년에 화병으로 사망했다.[* 모용수만 충격을 받은게 아니라 후연의 병사들도 함께 충격을 받아 대성통곡했고, 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고 한다.] 제위는 모용보가 계승했으나 탁발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연의 영토를 유린했다. 모용수의 죽음과 함께 후연도 [[북위]]에게 밀려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4대 황제 [[모용희]] 때 결국 [[고구려]]까지 덤벼드는 바람에 국력을 만회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결국 멸망했다. 아들들이 꽤 많다. 전처 단씨의 소생인 모용전(全)[* 자치통감에는 모용령(令)이라고 되어 있다. 모용수가 전연에서 전진으로 망명하자 이를 따라갔다가, 왕맹의 계략에 속아 전연으로 돌아가서 유배되어 죽었다.]·[[모용보]]·[[모용주]](宙), 후처 단씨의 소생인 모용랑(朗)과 모용감(鑒), 그리고 여러 희첩들의 소생인 모용린(麟)·모용농(農)·모용륭(隆)·모용유(柔), [[모용희]]가 있었다. 관련 가계도는 [[모용선비/왕사]] 항목을 참고. 모용농은 [[고국원왕]]이 빼앗은 [[요동]], [[현도군]]을 수개월만에 되찾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처소생이라 그런지 그게 다 일뿐더러, 지략이 없었는지 뒤에 보듯 단속골의 난과 난한의 난에 휩쓸려 다른 황제들처럼 죽임을 당했다. 그 처참한 내용은 모용보 항목 참조. [[무협소설]]에 흔히 나오는 [[연]]나라의 부활을 위해 암약하고 음모를 꾸미는 [[모용세가]] [[당주]]의 원형격이다. [각주] [[분류:위진남북조/황제]] [[분류:모용선비]] 모용수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