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 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0403/htm_20040326175755a000a100-001.JPG || || 대중에게 잘 알려진 모습인 흰머리와 수염을 기른 문 목사. || [[분류:목사]][[분류:사회운동가]][목차] == 개요 ==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직할시|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테니까"''' - 1989년 그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아들인 문성근이 낭독하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aja5_hXZzEA|유튜브]]] 중 에서.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강성철]]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광주민주화운동|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박혜정]] 열사여! [[표정두]] 열사여! [[황보영국]] 열사여! [[박종만]] 열사여! [[홍기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한 명연설.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다.[* 문 목사의 절절한 몸짓과 애절한 목소리가 영상으로 남아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kAVJf7fpiCA|유튜브]]]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과 대조적이게, 보수성향이 아닌 진보성향의 교단이다. [[한상렬]]도 여기소속] 소속의 [[목사]], [[한신대학교]][* 교회의 보수성을 비판하던 한국신학대학교(조선신학교) 총장 김재준 목사가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목회자들에게 배척당하고 예수교 [[장로회]]에서 제명된 후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설립하였는데, 그 한국신학대학교의 후신이 [[한신대학교]]다. 이런 탓인지 신학교임에도 대단히 사회참여적,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신대학교 [[경제학과]]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중심인 곳이다. 김수행, 정운영, 이해영 등 유럽유학파 출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이 모두 이곳 교수였다. 단 한신대학교가 교단 분리 당시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비판받았던 것과 달리, 칼 바르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이다.] [[교수]], [[성서학자]][* 1970년대 천주교-개신교 공동성서번역에 장로회 대표격으로 참여하였다.], [[통일]] 운동가, [[시인]] [* 그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 한뫼의 신화 등의 여러 시를 작시 한 시인이다. 그의 시를 모은 시집 또한 있다.] , [[작사가]][* 그는 21세기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의 김재준, 조원길과와 공동 작사가이다.]. [[문재린]] 목사-김신묵 사모의 [[아들]]이며, 배우 출신 정치인 [[문성근]]의 [[아버지]]이다. 부인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박용길 장로이며 남동생 [[문동환#s-2]] 목사도 같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 형의 그늘에 많이 가려졌지만, 문동환 목사도 기독교교육학자로 한신대 교수를 지냈으며, 형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재야세력의 대표로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던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통일운동을 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었다. 첫 사회 활동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 유학을 거치고 한신대 신학교수로 재직하던 전형적인 개신교 목사였다. 현재 1994년 창립한 통일운동단체 '통일맞이-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 초반 생애 == [[만주]] [[북간도]] 용정 출생이다.[* 문익환 목사 집안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등과 함께 5가문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용정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선인 공동체가 생겨난다. 한때 안중근 의사가 문목사 집에 머물면서 총연습을 하셨다고 한다.] 만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사촌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장준하]], 장군 [[정일권]]과 절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자신이 고심해 적은 시를 보여주자 윤동주의 반응은 "이게 시냐?"라는 것이었다고(...). 이에 쇼크를 받은 문익환이 시인의 길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아들인 [[문성근]]은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윤동주, 장준하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있었다"며 "윤동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내 차례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라고 말했다.[* 이 3명은 간도 명동소학교 동창이다. 실제 [[윤동주]] 시집이 발간시에 ~~문익환 목사가 서문을 썼다.~~ 서문은 경향신문의 기자로 있던 연희전문 친우인 [[강처중]]의 도움으로 [[정지용]](당시 경향신문 주필)이 작성했다. (참고로, 발문은 강처중이 작성함.) 1976년 민주구국선언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1975년 장준하의 의문사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이들 3명과 반대의 길을 간 [[정일권]]까지 합치면 이래저래 한국 현대사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4명의 동창생들이다.] 이후 [[평양]]신학교[* 현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려 했으나, [[근본주의]]적인 학풍을 가진 평양신학교를 다니는 것보다는 일본 유학을 가는것이 좋겠다는 부친의 권유로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원래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중시하는 [[장로회]] 출신의 문익환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는 익숙하였으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비평하는 것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학교수의 충고를 받고 학문적인 영역으로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만주국]] 봉천신학교를 나왔으며,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 현 [[한신대학교]]. 중간에 교단분리되었을 때 잠시 조선신학교로 이름을 바꾼다.]를 졸업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 미군통역장교로 할약하였다.[* 197~80년대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 되는 문익환, [[리영희]], 정경모도 모두 미군통역장교 출신이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4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귀국하여 연세대, 한신대 등에서 신학 강의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동번역성서]] 구약 번역에 참여했다. == 통일·사회 활동 == http://img.hani.co.kr/imgdb/resize/2009/0930/6000321811_20090930.JPG 좌측이 [[김일성]]. [[1970년대]] 말까지는 주로 본연의 업무인 목사 겸 신학 교수로 활동했으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길로 접어든다.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1994년]] 77세로 사망할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함석헌]], [[장준하]]와 함께 [[진보주의]]의 [[개신교]]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활동을 하던 [[가톨릭]] 대표인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문규현]] 바오로 신부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980년대 내내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의 상징이였으며, 1980년대 말 격렬하게 대립하던 학생운동권 그룹에서 모두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였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임팩트가 강했던 사건은 위의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던 사건.[* 하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허가 없이 북한에 방문해서는 '''절대 안되며''', 이것은 엄연한 '''범법 행위'''이다. 절대로 따라하지 말자.] 이 사건은 이어지는 전대협의 [[임수경]] 방북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다. 실제 당시 [[김일성]]과의 합의 내용은 이후 1991년 남북합의서와 2000년 남북 공동선언에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https://jhkhj.wordpress.com/2012/07/15/%ED%95%98%ED%83%9C%EA%B2%BD%EC%9D%80-%EB%AC%B8%EC%9D%B5%ED%99%98-%EB%AA%A9%EC%82%AC%EC%9D%98-%EC%A3%BD%EC%9D%8C%EC%9D%84-%EC%99%9C%EA%B3%A1-%EB%A7%90%EB%9D%BC/|링크]] 이렇듯 말년에는 특히 통일 문제에 주력하다 1994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활동한 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 대해 [[북한]]이 대남 공작용으로 이용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여기에서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말년에 일방적으로 북한에 끌려다닌다고 판단한 범민련을 해산시키고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 노력의 일환이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60705203318252&p=segye|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여사도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고]] 더불어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2011년]] [[9월 25일]]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7840.html|별세하였다.]] == 기타 == 여담으로 [[강풀]]의 <[[26년]]>에 잠깐 나온 적이 있다.[[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357|#]]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 속 흐름 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영화)]]에 잠깐 등장한다.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기를 성격이 시니컬한면이 있어 학생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문이꽝이었다고한다(...) 한성격하는 분이셨기에 아들에게도 냉정하게 대한적이 더러 있었다고. 문성근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문익환 목사와 똑같은 외모가 되어가고 있다. ~~[[김흥국|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사람이라 카더라.]]~~ 문익환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