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항목 : [[실향민/대한민국]] http://special.mediatoday.co.kr/network/wp-content/uploads/2013/09/5585l.jpg?width=200 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 [[일제강점기]]인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변 동문동에서 방재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방재윤은 원래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아들이 없었던 방응모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갔으며, 방일영은 동생인 [[방우영]]과 함께 방응모의 양손자가 됐다. 유년기에 할아버지인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의정부시]]로 이주하였다. [[학교|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교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가 [[주오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그 후 1944년 할아버지 방응모의 부름으로 귀국,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장비서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자 조선일보 이사로 선출되었고, 이후 [[부산광역시]]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1980년 발행분까지 발행인 대표는 방응모로 되어 있었다. 1964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인 [[방우영]]을 사장으로 임명해 같이 일했다. 1975년에는 방일영의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을 매년 10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했다. 현재까지 3백3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규모를 넓혔다.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93년 조선일보 회장직을 동생인 방우영에게 넘기고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되었다. 말년에는 [[방(성씨)|온양 방씨]] 종친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1월 조선일보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나 7개월 뒤인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81세였다. 국내 최대 언론사인 조선일보의 사주인 그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밤의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변호사는 이 나라 여자들의 '''머리를 가장 많이 얹어준 사람'''이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분류:인물]] 방일영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