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문서 : [[야구 관련 인물(KBO)]], [[빙그레 이글스|빙그레]]-[[한화 이글스]], [[MBC 청룡]]. [[실향민/대한민국]] [[파일:attachment/배성서/Example.jpg]] ||<:><tablewidth=100%><-12><#fe5d0a> '''{{{#ffffff 빙그레 이글스 역대 감독}}}''' || ||<:><width=30%> 팀 창단 ||<:> {{{+1 →}}} ||<:><width=30%><#000000> '''{{{#ffffff 배성서}}}'''[BR]'''{{{#ffffff (1986~1987) }}}''' ||<:> {{{+1 →}}} ||<:><width=30%> [[김영덕]] [br] (1988~1993)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1552F8><:> '''{{{#ffff00 MBC 청룡 역대 감독}}}''' || ||<width=30%><:> [[유백만]] [BR] (1988) ||<:> {{{+1 →}}} ||<width=30%><#224488><:> '''{{{#FFFF00 배성서}}}'''[BR]'''{{{#ffFF00 (1989)}}}''' ||<:> {{{+1 →}}} ||<width=30%><:> [[백인천]] [BR](1990~1991) || || '''이름''' || 배성서(裵聖瑞 / Seong-seo Bae) || || '''생년월일''' || [[1944년]] [[5월 26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평안북도]] [[영변군]] || || '''학력''' ||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 - [[건국대학교]] || || '''포지션''' || 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소속팀''' || [[한일은행 야구단]](?~?) || || '''지도자''' || [[영남대학교]] 감독 (1973~1976)[br] [[동국대학교]] 감독(1977~1981)[br]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 코치(1982)[br] [[한양대학교]] 감독(1982~1985)[br] [[빙그레 이글스]] 감독(1985~1987) [br] [[MBC 청룡]] 감독 (1989) || [목차] == 소개 == [[대한민국]]의 전 야구 감독.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의 창단 감독이지만, 그가 부임했을 당시에는 빙그레의 성적이 좋지 않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강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기본기를 다듬었고, [[장종훈]]을 중심으로 한 초기 [[빙그레 이글스]]의 팀 컬러인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 된다. == 감독 경력 == [[1973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했으며. 가장 유명한 경력이 [[영남대학교]] 야구부 창단 감독인데, 이 당시 혹독하게 선수들을 훈련시켜 빠른 시간에 대학 리그 정상 등극에 성공한다. 당시 그 밑에 있었던 선수가 바로 내야수 [[김재박]]이었다. 아울러 만화가 [[이현세]]의 조카가 그 훈련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삼촌에게 소개시켜 줘서 탄생한 만화가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작품 속 지옥 훈련의 절반 정도가 실제 [[영남대학교]] 야구부 훈련이었다고 한다. [[흠좀무]]. 덤으로 드라마에서 감독을 맡았던 [[손병호]]의 모델이 바로 배성서였다는 점. [[영남대학교]] 감독 재직 후에는 1977년에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임명된다. 그 뒤 [[1982년]] 한국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MBC 청룡]]의 창단 당시 초대 감독으로 내정되었고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인사차 [[문화방송|MBC]] 본사에 갔다가, 날벼락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하던 [[백인천]]의 귀국 소식에 [[높으신 분들]]이 그를 대신해서 [[백인천]]을 감독으로 임명한 것. 이 때문에 프로 감독 진출은 무산되었다.[* 그 당시 하기 싫다고 버티던 배성서를 설득하여 [[문화방송|MBC]] 감독으로 추천했던 이는 당시 [[문화방송|MBC]] 스포츠국 국장이던 조광식([[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출신으로 후일 [[LG 트윈스]] 단장을 지냈다. 2011년 별세)이었는데, 평소 배성서와 호형호제하며 막역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백인천]] 때문에 배성서 감독 선임건이 없던 일로 되자 조광식은 몸둘 바를 모르며 동생뻘인 배성서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고 한다(...). "내가 프로팀 감독 못 해서 환장한 놈으로 보이느냐"며 펄펄 뛰던 배성서도 형님의 사과에 "차제에 잘 됐수, 국가대표 감독은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이라며 마음을 풀었다고.][* 감독 선임 무산과 상관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문화방송|MBC]]가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을 중계할 때 김용 캐스터와 합을 맞춘 해설가는 바로 배성서였다.] 그 뒤 서울 세계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 코치와 [[한양대학교]] 감독을 거쳐 1985년에 창단한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에도 [[MBC 청룡]] 감독 내정 후 무산 때처럼 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빙그레 초대감독으로 선임되기 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처남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빙그레 프론트에서 감독직을 간곡히 청해 결국 부인과 아들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스파르타식 훈련과 기초 체력을 중시하는 야구로 훈련을 많이 시켰지만, 신생팀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재계약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임으로 영입된 [[김영덕]] 감독은 선수들의 기본기가 많이 좋아졌다며 그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 [[김성갑]]의 말에 따르면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382&aid=0000051684|훈련이 참 빡셌고, 팀 성적은 나빴어도 선수들이 감독과 정으로 똘똘 뭉친 사이였는지라 구단 사무실에서 모든 선수와 이별의 악수를 하는데 절반 이상의 빙그레 선수들이 울었다고 한다.]]] 그 뒤 1988년 시즌 후에 [[유백만]]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팀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강한 훈련으로 기강을 바로잡아 달라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항명 파동의 주인공이 된다. 세 차례 합숙 전지훈련을 감행했는데, 마지막 전지훈련에서 투수 [[정삼흠]]이 "여기가 [[공산당]]이냐"고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242265|반발한 것]].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즌 도중에는 고참 선수들이 구단 사장과 만나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초유의 하극상을 일으켰다. 그 결과 단 1년 만에 또(...) [[백인천]]에게 감독직을 넘겼고, 그 뒤로 프로 무대에 다시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극상이 일어난 이유는 배성서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MBC 청룡]] 선수들의 느슨한 태도 및 파벌이 결부된 결과라고 전해진다. 선수 육성 능력은 나름대로 뛰어나서, 밑에서 길러 내어 프로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이 많다. 앞에서 말한 [[영남대학교]] 시절의 [[김재박]]도 있고, [[동국대학교]] 시절에 [[김성한]], [[한대화]][* 1982년 세계선수권 당시 대표팀 코치이던 배성서가 [[한대화]]를 국가대표로 추천하였다. [[한대화]]는 이 때의 인연으로 1986년 [[해태 타이거즈|해태]]에 트레이드되기 전에 고향 팀인 빙그레로 보내 달라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등을 키워냈다.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 시절에 연습생으로 발탁한 내야수 [[장종훈]]도 있다. == 각종 일화 == 매서운 듯한 외모, 지옥훈련 이미지와 달리 굉장히 유머 감각이 풍부한 면을 갖고 있다. 몇 가지 일화를 주워 섬겨 보자면, * 1986년 창단 첫 해 [[빙그레 이글스]]는 무려 29번의 1점차 패배를 당했다. 1987년 시즌 중반 배성서가 기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올해는 1점차 패배가 많이 줄었다" 면서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표정을 구기며 한 기자에게 귀띔하기를, '''"그런데 2점차 패배가 늘었단 말이지. [[젠장]](...)"''' * 배성서는 [[영남대학교|영남대]] 감독 시절부터 등번호 88번을 애용했다. 자신의 몸무게가 '''88kg'''나 나간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대나(...). ~~그럼 [[김응용|코끼리 감독]]은 세자릿수 번호 달아야 하나?~~ 빙그레에서도 88번을 달았는데 이유가 좀 달랐다. 선수들이 '''팔팔'''하게 움직이라는 의미였다고. * [[대전일보]] 체육부 소속이었던 이원재 기자[* 이 분은 [[대전일보]]를 거쳐 주간야구, [[SBS 스포츠|한국스포츠TV]] 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1997년 외환 위기|IMF]]의 여파로 1998년 실직한 후 2002년 만 50세의 나이로 [[법무사]] 시험 최고령 합격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지금은 [[법무사]]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와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다. 근데 이원재 기자와 배성서 사이엔 묘한 [[징크스]]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 기자가 홈 경기 플레이볼 전에 배성서에게 '''"이원재 이 새퀴! [[한번 죽어볼래|너 한번 죽어 볼래?!]]"'''라는 식으로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먹으면 그날 빙그레의 승률은 거의 100%에 가까웠다는 것. --아무리 막역해도 이 기자는 좀 황당했을 듯(...)-- 그래서 이 기자는 빙그레 홈 경기 때마다 고향 팀을 위해 덕아웃에서 배성서에게 공연히 욕을 먹어 주곤 했는데, 어느 날 배성서가 홈 경기를 앞두고 이 기자를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경기 종료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그날 상대 선발이 [[해태 타이거즈]]의 [[선동열]](...). 질 것이 뻔한데 괜히 욕 먹을 필요가 있냐며 잠적해 버린 것이었다. * 배성서는 [[육성선수|연습생]]으로 들어온 [[장종훈]]을 유난히 예뻐했다. 대형 유격수의 자질이 보이기도 했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아들[* 그가 바로 [[북한]]에 억류당했다가 풀려난 케네스 배(배준호)다.]과 1968년생 동갑이어서 그랬기도 했다. 그런데 배성서는 경기 중 [[장종훈]] 타석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싶으면 [[장종훈]]을 불러 '''[[거시기]]'''를 주무르곤 했는데, [[장종훈]]에게는 하늘같은 감독이라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다. 신기한 건 그러고 난 후 [[장종훈]]은 70~80%의 확률로 안타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종훈]]은 아예 자진해서 만져 달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중에 배성서는 "종훈이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던 것" 이라고 밝히기도. 그런데 이 [[징크스]]는 포수들만 차던 급소 보호대를 [[장종훈]]도 차기 시작하며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생활 잡지식을 모아놓은 어떤 책에서 '''남자가 긴장하면 오그라드는 것'''(...)이란 제목으로 이 사례를 들었는데, 긴장해서 오그라들었으면 안타를 못 치고, 멀쩡하면 안타를 쳤다는 후문이 있었다. * 배성서는 애연가였다. 그런데 피우던 [[담배]]를 2번 바꾸었는데, 애초에 피던 담배는 '''아리랑''' 이었지만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나니 역전패가 많다"''' 라는 주변 얘기에 담배를 '''솔'''로 바꾸었다. 하지만 솔은 (상대팀에)점수를 '''"솔솔"''' 내준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얼마 안 가 끊어 버렸고 그 다음에 바꾼 담배는 '''태양''', 타격이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태양의 효과가 나타난 것은 배성서의 후임으로 [[김영덕]] 감독이 부임한 1988년 이후였다(...). * 1987년 6월 5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청주야구장|청주]] 홈 경기 때 빙그레 마운드는 [[김성한]]에게 3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9회 초에 다시 [[김성한]]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미 승부는 [[해태 타이거즈|해태]]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상황이라 투수 '''손문곤'''[* 1965년 1월 29일생. 1986년 빙그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으나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특별지명을 받고 이적하여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6시즌 통산 성적은 5승 16패 1세이브.]은 배성서에게 거르겠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배성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면승부를 하라고 지시했다. 손문곤은 '4연타석 홈런이란 대기록이 걸려있는데...?' 라며 의아해했지만, 배 감독의 지시대로 정면승부로 맞섰고, 결국 큼지막한 외야 플라이로 [[김성한]]을 간신히 잡아냈다. 경기 후 기자들이 "왜 그때 정면승부를 지시했는가?" 라고 질문하자 배성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딱 한 마디만 했다. '''"흥, 어차피 [[김성한]]도 내 새끼 아닌감?"''' [[김성한]]은 [[동국대학교|동국대]] 시절 배성서 감독의 제자였다. ~~결국 그날 [[김성한]]이 세우지 못한 기록은 13년 후 [[박경완]]이...~~ * [[한국프로야구/1987년/신인드래프트|1987년 신인 2차 지명]] 때[* 1986년 11월 24일에 열렸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으로 [[이정훈(1963년생)|이정훈]]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바가 있다. 1986년 시즌의 성적을 보자면 빙그레는 최하위, [[청보 핀토스]]는 6위에 그치며 2차 지명에서 각각 2차 1순위 지명권을 2장씩 받아 전체 1, 3순위와 2, 4순위 지명권을 [[득템]]했는데, 지명회의가 열리기 직전 청보 박정삼 단장이 빙그레 노진호 단장과 배성서 감독과 환담을 나누며 '''"우리가 어차피 먼저 뽑는데 서로 카드를 공개하자. 누굴 뽑을 건가?"''' 라고 묻자, 노 단장이 당시 2차 지명 신인 중 최대어인 투수 [[이동석(야구선수)|이동석]][*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 - [[동국대학교|동국대]] 출신의 투수로, 연고 팀인 [[해태 타이거즈|해태]]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빙그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88년 4월 [[해태 타이거즈|해태]]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의 쾌거를 이룩했는데, 상대 투수가 무려 [[선동열]](...). 이후 1992년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하여 7시즌 통산 12승 16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5.01의 성적을 남기고 1993년에 은퇴했다. 이후 [[화순고등학교 야구부|화순고]]와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의 감독을 지냈다.]을 뽑을 것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외야수 [[정상진]]이라고 했는데, 옆에 있던 배성서가 '''"투수가 부족한데 투수를 더 뽑아야지, 야수는 필요없다"'''고 펄펄 뛰는 것이었다. 이에 박 단장은 '''"어라 빙그레는 [[이정훈(1963년생)|이정훈]]에 관심이 없나 보네? 그럼 우리도 2순위로 투수를 찍고 4순위로 [[이정훈(1963년생)|이정훈]]을 뽑아야지"''' 라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지명회의 시작. 앞서 말한 대로 빙그레는 [[이동석(야구선수)|이동석]]을 1순위로 지명했고 이어 청보는 투수 이상훈[* 야생마 [[이상훈(1971년생 좌완투수)|이상훈]]과 동명이인.]을 2순위로 지명했는데, 3순위에서 빙그레는 기습적으로 [[이정훈(1963년생)|이정훈]]을 지명했다. 순간 박 단장은 속았다는 생각에 눈 앞이 캄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청보 핀토스]] 감독 [[강태정]]은 책상을 발로 걷어차는 등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이렇게 배성서의 허허실실로 빙그레의 유니폼을 입은 [[이정훈(1963년생)|이정훈]]은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 데뷔 첫 정규 시즌 중 [[김시진]]에게 끝내기 홈런을 뺏어내기도 했고,[* 그 끝내기 홈런은 빙그레 창단 후 최초의 끝내기 홈런이었다.] 22경기 연속 안타 등 맹활약을 펼치며 0.335의 고타율로 그 해 신인왕을 수상, 배성서의 기대에 100% 이상 부응했다.[* 이 때 이정훈은 1987년 최우수 신인선수로 선정되었을 때 뉴스데스크에서의 인터뷰에서[[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7059_12931.html|'''"배팅이 안 맞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고심을 하고, 노력하다 보니까 오늘 이 좋은 상을 타게 됐는데 특히 배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인터뷰를 했었다.] == 근황 == 야구계를 떠난 후로는 대구에서 보험업에 종사한다고 알려졌다. 현재는 [[수원시]]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11월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본명:배준호)의 아버지로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이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의 한 교회에서 배성서가 아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예배를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알려졌다. 아들 상봉을 위해 [[북한]] 당국의 동의를 얻어 방북, 케네스 배와 [[평양순안국제공항]]에서 상봉하였다.[* 절대로 [[코렁탕]] 아니다. 모두 당국의 승인을 받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529576|상봉 당시의 사진]]이다. 아들이 15세 되던 해에 온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배성서가 [[빙그레 이글스]]의 초대 감독을 맡게 되어 귀국한 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노력 끝에 케네스 배는 [[2014년]] 11월에 석방됐으며, 동네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다가 석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684875|#]] [[경상북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군]]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북을 잘 안다. 그러니 다시는 [[북한]] 근처로 아들이 못 가도록 막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분류:야구선수]] [[분류:평안북도 출신 인물]] [[분류:1944년 출생]] [[분류:타자]] [[분류:포수]] [[분류:우투우타]] 배성서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