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파일:attachment/Bai_Nian_Xue.jpg]] 29세, 태평 레코오드 전속 당시의 사진. [[파일:attachment/Bai_Nian_Xue2.jpg]] 촬영 당시 나이 불명. 1970년대로 추정됨. [[파일:/image/020/2011/06/13/37966826.12.jpg]] 白年雪, [[1915년]] [[5월 19일]] 출생 ~ [[1980년]] [[12월 6일]] [[사망]]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李昌珉 혹은 李昌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 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인기를 누렸다. == 생애 == 1915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통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 이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1978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 친일 행적 ==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 위키의 [[친일인명사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문화예술인의 경우 판단의 근거로 사용되는 자발성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있다. 문학인 [[이원수]]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이오덕]]이 쉴드를 쳤을 정도다. 이오덕이 다소 지나칠 정도로 일본어 잔재 청산에 적극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채소]]가 일본식 한자어라는 근거가 불명확한 이야기도 이오덕을 통해서 나왔다.) 더군다나 대중 예술인의 경우 당시엔 '딴따라'라 천대받았고 기획사에 묶인 처지였기 때문에 자발성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8868&cid=4491&categoryId=4491|#]] 그런 점에서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일본의 [[리샹란]](중국인으로 위장해 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펼친 일본인 여가수)이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29만 원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 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친일인명사전]]은 어디까지나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기는 소중한 자료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정치적인 목적으로 누군가를 무조건 폄하하기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인명사전이라는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반성과 교훈을 주는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폄하하는 데에 사용되는 나쁜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백년설이 실제로 친일파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보다 그 근본적인 정황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이 글을 읽는 위키러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분들의 흑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 백년설이 부른 군국가요들 === 아래에 있는 곡들은 백년설이 불렀던 것으로 확인되는 군국가요 11곡이다. 표기방식 : <제목> (XX 작사, YY작곡, 음반번호, 발매년도) * <아리랑 만주> (윤해영 작사, 전기현 작곡, 태평 5020, 1941) * <모자상봉(母子相逢)> (조명암 작사, 노시로 하치로 작곡, 서영덕 편곡, 오케 31126, 1942) * <아들의 혈서>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편곡, 오케 31093, 1942) * <위문편지> (조명암 작사, 남방춘 작곡, 서영덕 편곡, 오케 31126, 1942) * <이 몸이 죽고 죽어>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편곡, 오케 31121, 1942) * <즐거운 상처>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편곡, 오케 31102, 1942) * <망루의 밤>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편곡, 오케 31145, 1943) * <부모이별>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편곡, 오케 31172, 1943) * <옥토끼 충성>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편곡, 오케 31159, 1943) * <조선해협>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편곡, 오케 31192, 1943) * <[[혈서지원]]>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편곡, 오케 31193, 1943)[* 백년설의 가장 대표적인 [[흑역사]](...). 이 곡은 [[남인수]]와 [[박향림]]도 같이 불렀다. 이 곡에 참여한 분들이 거의 다 [[친일인명사전]]에 사이좋게 등재되었다.] == 유명한 곡 == * 나그네 설움 * 번지없는 주막 * 알성급제 * 복지 만리 * 대지의 항구 * 눈물의 수박등 * 고향설 * 산 팔자 물 팔자 * 만포선 길손 * 삼각산 손님 [[분류:한국 가수]] 백년설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