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AC 밀란]] 소속의 이탈리아 축구선수는 [[자코모 보나벤투라]] 항목으로... http://4.bp.blogspot.com/-uhhFCGhQMgA/TiG9Dhu6foI/AAAAAAAABvA/-SckfHtvzTo/s400/St.+Bonaventure.jpg?align=right&width=160 [목차] == 개요 == [[라틴어]]: Sanctus Bonaventura [[영어]]: Saint Bonaventure 1221년 경 [[이탈리아]] 바뇨레지오∼[[1274년]] [[7월 15일]] [[프랑스]] 리옹. [[이탈리아]]의 [[추기경]], [[가톨릭]] 신학자 및 [[교회학자]], [[http://www.ofm.or.kr/|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총장, [[스콜라 철학]] [[철학자]] 및 사상가. [[가톨릭]]의 [[성인]]이며 축일은 [[7월 15일]]. 바뇨레지오 출신이라 보나벤투라 다 바뇨레지오라고도 하며 별칭은 '''[[천사|세라핌]] [[박사]]'''. [[한국 가톨릭]]에서는 정식으로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 <[[야훼|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3갈래 길> 등의 저서를 포함하여 성서 주석, 500여 편의 설교를 남긴, 초대 교부들 뺨치게 권위 있는 교회박사다. 얼만큼이냐면 당대 [[이슬람]] 신자들에게도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상징물은 성체, 성합[* [[성체성사]] 때 신자들에게 분배할 성체를 담은 상자.], [[빨간색]]의 추기경 [[모자]]. [[이콘|성화]]에서는 열이면 아홉 [[수도복]]에 빨간 망토 같은 것을 걸치거나 [[추기경]] 모자를 쓰고 있거나 옆에 [[추기경]] 모자가 있다. 신학자 및 신학생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더불어 신학자에서의 위치가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위치도 탁월한 곳에 있는 사람인데, 스콜라 철학에선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이렇게 말은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그리스도교]]와 일치할 수 있을 때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그게 아닌 부분에선 가차 없다.]라고 일컬어진다. 신학적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재건한 제2의 창시자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시대에 기존 [[플라톤]]적 사상이나 교부들의 신학을 적절히 융통성 있게 지켰다는 의미가 있겠다. '''운이 좋다'''(good fortune)는 뜻을 지닌 이 이름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지어주다시피하여 붙여졌다. 경위는 아래 생애 항목에서 자세히 서술된다. 보통 남자 이름이나 [[세례명]]으로 쓰이며 성(姓)으로도 쓰인다. == 생애 == === 유년시절 === 본명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바뇨레지오(Bagnoregio)에서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 보나벤투라는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다.]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 대해서 딱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중요한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아기 보나벤투라가 큰 병을 앓았을 때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해줄 것을 청하자, 프란치스코가 기꺼이 이 사경을 헤매던 [[아기]]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란치스코는 '''"이것 참 좋은 소식이로구나!(O, Buona Ventura!)"'''라고 감탄했고, 그를 기념하여 아기의 이름도 조반니에서 보나벤투라로 바꾸었다. 보나벤투라는 이 이름을, 17살이 되던 1238년 [[http://www.ofm.or.kr/|작은형제회]]에 입회하며 수도명으로 그대로 썼다… 고 하는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강론에 따르면 그가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243년부터라고 한다. === [[파리(도시)|파리]] 유학과 교수 생활 === 1234년, 보나벤투라는 [[영국]]에서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알렉산더 핼렌시스(Alexander of Hales, 1185~1245)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도시)|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깊은 영감을 받았고, 또한 총애받는 제자가 되었다. 얼만큼이였나면 알렉산더가 이 때의 보나벤투라를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렇게 파리대학에서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마친 그는 알렉산더를 따라 [[파리(도시)|파리]]에 있는 작은형제회에 입회한다. 1250년부너 1252년까지 기념비적인 저서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금언에 관한 주석>을 저술하는 동안 1248년부터는 자신이 수학했던 파리대학에 [[교수]]로 부임, 1257년까지 교편을 잡았으며 같은 해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수도자]] 최초로 파리대학 [[신학]]박사 칭호를 받고 '''[[http://www.ofm.or.kr/|작은형제회]] 총장이 된다.''' 교수가 된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강의 활동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재속 [[수도자]][* [[수도자]]라 하였지만 이들은 엄연히 말해 세속에 속한 평신도이다. 알렉산더 헬렌시스도 재속 수도자로 보인다.]가 아닌 탁발 [[수도자]]를 교수로 인정하지 못하는 동료 교수들이 자꾸 [[츳코미|태클]]을 걸었던 것이다. 특히나 기욤 드 생따무르(Guillaume de St. Amour)라는 재속 교수가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인신공격 수준으로 맹비난했다. 친구 [[토마스 아퀴나스]]나 [[프란치스코회]] 동료인 요크의 토마스와 힘을 합친 보나벤투라는 <마지막 시대의 환난>,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그의 입장을 조목조목 '''상냥하게''' 따져가며 반박하였고, 1256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기욤을 단죄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렇게 겨우 강의할 기회를 얻은 보나벤투라이지만,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작은형제회 총장으로 피선되어 곧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이 때 그의 나이 37세. ===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총장으로서 === 거기에서도 해결해야 할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본래 [[프란치스코회]]는 엄격한 청빈관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사후 30년이 훌쩍 지나 마땅한 중심이 없어진 공동체는 분열되기 마련이라 신령파와 이완파로 나뉘어 찢어진 상태였다. 신령파는 청빈을 지나치게 고집하였고, 이완파는 이제 좀 융통성 있는 수도생활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보나벤투라의 선임은 [[복자]] 조반니 다 파르마(Giovanni da Parma, 1209~1289)였는데, 일찍이 [[프란치스코회]] 수사 중 1명인 조아키노 다 피오레(Gioacchino da Fiore, 1135~1202)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완전한 청빈관을 따라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았다'든지 '[[야훼|성부]]와 [[예수|성자]]의 시대는 실패했고 [[성령]]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일종의 종말론적인 주장을 펴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었던 데다, 조반니 본인도 그 주장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파가 수도회 전체에 미칠 것을 우려하여 보나벤투라에게 후임을 맡긴 뒤 80세로 죽을 때까지 은수생활에 접어들었다(…). 이 조아키노는 [[개신교]] 쪽에선 제법 신선한 [[혁명]]을 일으켰다 평가하고 있으나… 어쨌든 [[교황]]은 그를 파문시킨 이후 [[예수]]와 [[12사도]]가 청빈한 생활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예수]]와 [[12사도]]는 여타 제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금전적인 지원도 받고 있었던 데다, [[12사도]] 중 몇 명은 집이 그냥 부자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치를 했단 소리는 아니지만, 딱히 청빈함을 내세워 설교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 총장이 된 보나벤투라는 먼저 교통정리를 실시했다. 각지에 설립된 수도원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수도회 내부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각 분파의 분쟁자를 화해시키려 편지를 써 돌린 그는, 그 안에서 동료들이 사도적 직무를 다 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수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가난함을 강조하는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자신이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성 프란치스코가 묵상 도중 [[성흔]]을 받았던 라베르나 산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며 <[[야훼|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을 썼다. 1260년에 나르본느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첫 회헌을 선포한 그는, 수도회의 일치에 기여하기 위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공식적으로 엮으라는 의뢰를 받아 작업에 착수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는 1263년에 완성되어 피사 총회에 제출되었고, 1266년에 열린 파리 총회에서는 이 대전기(Legenda Maior)[* [[베네딕토 16세]]에 의하면, [[라틴어]]인 '레젠다'(Legenga)는 ~~[[어둠에다크에서 죽음의데스를 느끼며|전설의 레전드]]~~ 상상의 산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읽어야 하는" 권위 있는 본문을 의미한다.]만 남기고 다른 프란치스코 전기를 모두 파기하기로 하기까지 한다. 이 덕분에 하나된 프란치스코의 의지 아래 수도회는 다시 뭉칠 수 있었으며, 중재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2의 창립자'''로 존경받게 된다. === 알바노의 [[추기경]]에서 선종까지 === ||<tablealign=center> http://1.bp.blogspot.com/_jWduGxiECYU/Sl3UG-r6kXI/AAAAAAAAA40/nFdpxo8Pl7Y/s400/bonaventure.jpg?height=410 || http://hi.djcatholic.or.kr/bbs/data/board/hawaii/file_in_body/5/becbb7babbea7e11.JPG?height=410 || || 빨간옷이 리옹 공의회에서의 보나벤투라이다. || 성 보나벤투라(左)와[BR][[안토니오|파도바의 성 안토니오]](右). || 보나벤투라는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로부터 [[영국]] [[요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1273년까지 파리대학에 출강하여 강의와 설교를 하였으며, [[프랑스]]의 왕 루도비코 9세 일가 앞에서도 설교할 정도로 저명있는 신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활발했던 활동은 자신의 업적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닌, 교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외부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바쁜 세월을 보내던 1273년 봄, 여느 때처럼 파리대학에서 [[천지창조]]에 대해 강의를 하던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지지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이탈리아]]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임명'''하니 이번에는 사양치 말고 [[로마]]로 튀어오라는 서한이 도착한다.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순명을 어길 수 없는 그는 [[로마]]를 향한 여정을 떠났고, 무제로라는 곳의 작은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때마침 [[추기경]] 임명 칙서를 전하러 [[교황]] 사절이 도착했다. 그 때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부엌에서 친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으나, 이 모습을 표현한 성화가 존재할 정도로 그의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는 자기가 [[설거지]]를 다 끝낼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 1273년 5월 알바노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받은 보나벤투라는 대신 [[http://www.ofm.or.kr/|작은형제회]]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된 [[도미니코회]]의 피에르 드 타랑테즈와 페드로 훌리아는 각각 인노첸시오 5세와 요한 21세 [[교황]]이 되었는데…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 개최한 주된 이유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동로마]] 황제 미카일 8세와 많은 [[정교회]] [[주교]]들이 참석했으나, 이는 [[동로마]]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후 약 100년여 동안 동서 교회 일치 시도는 중단된다.]에 [[추기경]] 자격으로 참석한 보나벤투라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축일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자리에서 [[교황]]과 [[가톨릭]], [[정교회]] [[사제]]들 앞에서 강론을 한 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회기 중이던 7월 15일 새벽에 [[선종]]하였으며, [[교황]]과 모든 [[사제]]들이 그의 죽음을 크게 애석해했다. 대체로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게 정설이지만, 일각에선 보나벤투라가 [[추기경]]이 되자마자 선종한 것을 심상치 않게 여겨 [[독살]]당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카더라]]. 보나벤투라의 성해(聖骸)는 리옹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되었고,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더불어 1588년 3월 14일에는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던 1562년, [[개신교]] 중 [[장 칼뱅|칼뱅]]파인 [[위그노]] 교도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광장에서 관 채로 싸그리 불태워버린(…) 사건이 벌어지는데, 누군가가 그 와중에 그의 두개골만은 어찌어찌 빼돌려 잘 보관하고 있다가 [[프랑스 혁명]] 때 그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 [[망했어요]]. 그렇게 그를 기념할 만한 물질적인 것이라곤 그저 그가 남긴 숱한 저서들밖에는 없게 되었다. == 여러가지 일화 == 성 보나벤투라에 대한 일화는 대부분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들은 대학 동기였고, 같은 [[수도자]]였으며, 교류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친한 친구였을 거라 추측하는 쪽이 많다. 다만 [[이콘|성화]]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없기도 하고 사상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었으니, 절친까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성사|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교황]]의 명을 받아 각각 시를 지어와 누구의 시가 더 의도에 합당한지 대조하기 위해 서로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다.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고, 보나벤투라는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라고 칭찬하며 즉석으로 '''자신이 지은 시를 찢어버렸다.''' ~~그러니까 낭독을 안 했다.~~ 결국 시는 고를 것도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으로 뽑혔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bgcolor=#E9ECEF>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야훼|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예수|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神性)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人性)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야훼|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성체성사|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 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 또 하나는 보나벤투라가 한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전기>를 집필할 때의 일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투라를 만나러 왔다가 마침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집필 삼매경에 빠져있는 보나벤투라를 보게 되는데, "아이쿠 방해하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는 이야기. 기타 짧은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어떻게 그렇게 똑똑할 수 있음?"이라고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임."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와, 한 [[할머니]]가 보나벤투라를 만나 "님의 지혜를 [[야훼|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선 분명히 [[야훼|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임."이라고 칭찬하자 "나보다 할머니가 [[야훼|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 있음."하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보나벤투라는 ~~그렇게 지루하다는~~ [[단테|단테 알레기에리]]의 [[신곡]] 천국편 12곡에 등장하여, 단테에게 안내자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단테 본인이 [[토마스 아퀴나스]]나 보나벤투라의 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도 있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11곡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찬양하는 대신 자신이 속한 [[도미니코회]]는 대차게 깠고, 보나벤투라는 다음 12곡에서 성 [[도미니코]]의 업적을 말한다. == 보나벤투라와 [[스콜라 철학]] == 보나벤투라의 성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미적인 신비가'''. [[머리]]보다 [[가슴]]이 더 중요한 사상가이다. 지금이야 [[니체]]와 [[프로이트]]의 철학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뜬구름 잡기식의 이야기겠지만, 13세기는 철학이 [[신학]]과 기민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신학]]이 없는 철학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철학계의 큰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1255년 3월 파리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종교에 융합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와 충돌점이 아주 많았고, 잘못하면 종교적 사상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열광하여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먼 자연주의적 사상을 채택한 사람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든 [[그리스도교]]에 흡수시키려 노력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데, 후자에 속하는 인물 중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바로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보나벤투라 및 [[로저 베이컨]]이나 [[도미니코회]] 회원인 대 [[알베르토]][* 축일 11월 15일.] 및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아베로에스(Averrhoës)라는 [[에스파냐]] 출신 [[이슬람]] 철학자의 소개가 중요한데, [[이슬람]]식 이름으로 이븐 루슈드(Ibn Rushd)라고 하는 그는 자신이 크게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그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한 업적으로 유럽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까지 나타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플라톤]]으로 메우려 했던 [[이븐 시나]]까지도 까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감쌌다. 이렇게 지나치리만치 진취적이었던 아베로에스는 [[이슬람]] 사회에서 대차게 까였는데, 역으로 [[유럽]]에서는 여태까지 영향을 끼치던 이븐 시나를 밀치고 일명 '라틴아베로에스주의'를 구축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 그 사상이 [[니체]]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신은 죽었다|신이 밥 먹여주냐며.]]~~ 조심스러운 중립적 성향이었던 보나벤투라는 처음부터 아베로에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리 비판적인 성향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파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아베로에스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낀 이후로는 태도가 바뀌었다. 大 알베르토는 물론이요 그에게서 배운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의 사상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접목 방식으로 새로운 철학을 구축했던 것과 달리, 보나벤투라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인 로저 베이컨의 지나치리만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주장을 비판해야만 했다. 가만 들어보니,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 그의 주장은 [[신학]]도 결국 [[과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수도자]]로서는 잘못된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나벤투라가 1267년 아베로에스파의 주장을 보수적 성향의 [[파리(도시)|파리]]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에게 [[고발]]함에 따라, 1270년에는 파리 교구가 아베로에스파가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13개 명제를 단죄, 로저 베이컨도 [[이단]]으로 규정되어 수도회에서 쫓겨났다.(…) 이것만으로 아베로에스파의 활동이 멈추지 않아 보다못한 [[교황청]]이 1277년 1월 탕피에에게 자료를 가져오라 하지만, 성질 급한 탕피에는 자기가 직접 219개의 명제를 만들어 그 내용을 몽땅 단죄해 버린다. 이 사건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긍정적으로 생각한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게도 위기로 다가왔다. 다만 그 때는 보나벤투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고 다 죽은 후였기 때문에…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철학]]을 [[신학]]의 우위에 두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죄당하지 않았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철학은 신학의 시녀]]'''(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간단히 말하면 보나벤투라에게 쫓겨난 로저 베이컨은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고, 大 알베르토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대세였던 그 사상을 [[그리스도교]]와 잘 버무려 어떻게든 유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중도적 입장, 보나벤투라는 새로 밀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신경 쓰기보다 본래의 [[플라톤]]적 관념에 더 충실한 입장이었다. ===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 === >우리 지능이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음까지 감동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 영적인 보나벤투라와 지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각은, 최상위의 윤리의식이자 양심의 불꽃이라 불리는 '신데레시스(synderesis)'에 대한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보나벤투라는 "이성은 분명 [[야훼|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빛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으며, [[진리]]란 명상과 [[기도]]로 영혼을 끊임없이 단련하여 [[야훼|하느님]]과 직접 일치할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성이 아예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1차적인 단계이자 도구라는 이야기이며, 간단히 말해 머리로 지식을 습득한 뒤에도 가슴으로 통찰까지 하여야만 [[야훼|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일단 [[야훼|하느님]]을 본 경험을 이끌어내는 '''이성'''의 단계와 그를 통해 [[야훼|하느님]]을 본받은 영혼을 느끼는 '''감각'''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야훼|하느님]]과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종의 황홀감, 즉 '''관조(觀照)'''의 단계에 이르는 3가지 과정이 중요하다는 관점. [[아우구스티노]] 같은 초대 교부들의 의지를 그대로 받든 것이며, 그야말로 [[수도자]]답고 [[사제]]다운 발상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진리의 인식은 그와 반대로 작용한다. 기도나 명상으로 영혼의 단련을 통해 [[야훼|하느님]]을 보지만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야훼|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으로 '응시하는' 것을 통해 머리를 굴려 그 뜻을 이해하라는 이야기다.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굴려 이해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창하는 것은 실천적 지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리스도교]]를 그 나름대로 융합한 결과이다. 이 의견의 차이는 그들이 속한 [[수도회]]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보나벤투라가 속한 [[프란치스코회]]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절반은 폐쇄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속한 [[도미니코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고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야훼|하느님]]의 말씀을 교육시키고 전파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보나벤투라가 '''[[천사|세라핌]] [[박사]]'''라 불리는 이유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성흔]]을 받은 라베르나 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여섯 날개 세라핌의 환영을 보았던 것도 있고, 그런 그가 저서 <[[야훼|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야훼|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그 세라핌의 여섯 날개[* 실제 챕터 수는 7개.]로 나누어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bgcolor=#E9ECEF>1단계: [[야훼|하느님]]에게 올라가는 단계와 그분의 흔적을 통하여 관상함에 대하여 (DE GRADIBUS ASCENSIONIS IN DEUM ET DE SPECULATIONE IPSIUS PER VESTIGIA EIUS IN UNIVERSO). 2단계: 이 감각적 세계 속에 그분의 흔적 안에서 [[야훼|하느님]]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EI IN VESTIGIIS SUIS IN HOC SENSIBILI MUNDO). 3단계: 타고난 능력에 각인된 그분의 형상을 통하여 [[야훼|하느님]]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EI PER SUAM IMAGINEM NATURALIBUS POTENTIIS INSIGNITAM). 4단계: 은총의 선물에 의해 재형성된 그분의 형상 안에서 [[야훼|하느님]]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EI IN SUA IMAGINE DONIS GRATUITIS REFORMATA). 5단계: [[야훼|하느님]]의 일차적인 이름인 존재를 통하여 [[야훼|하느님]]의 하나이심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IVINAE UNITATIS PER EIUS NOMEN PRIMARIUM, QUOD EST ESSE). 6단계: 선이신 그분의 이름 안에서 [[야훼|하느님]]의 [[삼위일체]]를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BEATISSIMAE TRINITATIS IN EIUS NOMINE, QUOD EST BONUM). 최종 단계: 호한 사랑 속에 [[야훼|하느님]]을 향하여 상승하는 영혼에게 휴식을 주는 신비로운 영적 황홀에 대하여(DE EXCESSU MENTALI ET MYSTICO, IN QUO REQUIES DATUR INTELLECTUI, AFFECTU TOTALITER IN DEUM PER EXCESSUM TRANSEUNTE). || [각주] [[분류:성인(기독교)]] 보나벤투라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