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감독/목록]] http://s24.postimg.org/v816oamud/mo_a.png || 이름 ||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br] (Благоје Марјановић / Blagoje Marjanović) || || 생년월일 || [[1907년]] [[9월 9일]] || || 사망년월일 || [[1984년]] [[10월 1일]] || || 국적 ||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 현재 국적으로 따지면 [[세르비아]]이다.] || || 출신지 || [[베오그라드]] ||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 || || 신체조건 || 171cm / 72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SK 유고슬라비아(1920-1924) [br] SK 올림피아(1924-1925) [br] BSK 베오그라드(1925-1939) [br] SK 쿠카리츠키(1939-1941) [br] FK 디나모 판체보(1945-1948) [br] NK 프롤레터(1949) || || 국가대표 || 57경기 / 36골 (1926-1938) || || 감독 || BSK(1953-1956) [br] [[토리노 FC]](1957-1958) [br] [[칼초 카타니아]](1958-1959) [br] FK 포베다 프릴렙(1959) || [목차] == 생애 == 마르야노비치는 1907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의 마르야노비치는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살았고 그의 형제 니콜라와 공을 갖고 놀기를 즐겼다. 그러다 몇몇 소년들이 보여준 축구 묘기에 넋을 잃은 마르야노비치. 이 순간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렇게 축구에 꽂혔고 돈을 탈탈 털어 축구공을 산 그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구 연습을 하는데 시간을 쏟았다. 이런 마르야노비치를 처음 주목했던 팀은 바로 SK 유고슬라비아였다. 이 팀에서 그는 어린 선수로 남아있었지만 라덴코 밀로비치에 의해 BSK 베오그라드로 팀을 옮겼다. 마르야노비치는 이 곳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보였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였던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와 강력한 공격 옵션으로 활약했다. 그래서였을까, BSK 베오그라드는 처음 선수들에게 돈을 줄 무렵 그와 티르나니치에게만 돈을 주기 시작했었다. 이 당시 대략 32달러[* 현재 가치로는 대략 450달러쯤 된다.]를 받았다고 알려졌었는데 그만큼 큰 사랑을 받는 선수였고 전 선수에게 돈을 줄 때도 가장 많은 돈을 받았다.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서도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올림픽]]에서는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을 만났고 2대 1로 패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모사[* 마르야노비치의 별명.]는 출전 자체를 못했고 [[네덜란드]] 관광만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2년 후의 초대 월드컵]]에서는 달랐다. 전 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했고 한골을 넣었다. 그리고 여러 친선 경기들에서 그는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당시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에는 친정팀 BSK, 이탈리아 등지에서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1961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우반신 마비와 말을 못하게 되었다. 모사는 1984년에 사망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마르야노비치는 초기 선수 생활에는 패싱에 맛을 들여서 득점을 많이 기록하진 않았지만 BSK에서 그의 스타일을 바꾸었다. 슈팅 파워는 평범하여 힘이 실린 슈팅을 구사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슈팅으로 수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온 몸이 무기인 공격수였다.[* 발뒤꿈치, [[가슴]], 심지어는 [[배#s-3|배]]로 득점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발리슛에 능하여 공이 어디로 오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축구 지능도 뛰어났고 [[프리킥]] 역시 잘 찼다. 30년대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축구 스타였고, 탁월한 골 스코어러였다. 주로 활동했던 [[OFK 베오그라드|BSK 베오그라드]]에서는 당연히 역대 최고의 선수이고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대표팀]]에서도 총 36골을 넣어 역대 득점 4위에 이름이 올라있다. == 뒷이야기 == * 모사는 선수 생활 도중 몇 차례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는데,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1934년 [[베오그라드]]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을 상대로 기록한 해트 트릭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는 브라질을 8대 4로 이겼는데, 이 경기가 바로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최다 실점이 기록된 경기였다. 그리고 이 경기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모사의 기술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중에는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명장 [[우고 마이슬]]도 있었다.[* 1930년대를 주름잡았던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분더팀]]의 그 감독 맞다.] 그는 마르야노비치가 분더팀에 있었으면 완벽한 팀이 되었을 것이라 극찬했다. * 마르야노비치는 자신의 명성을 즐기며 살았다. 또한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그의 바람기는 하이두크 스플릿과의 경기를 앞두고 한 달마시안 여성을 만나면서 끝을 맺었다. 그녀의 이름은 플라닌카 쿨리치. 결국 마르야노비치는 쿨리치와 1938년에 결혼하였고 이는 대중과 기자들에게 큰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 2010년에는 '''몬테비데오, 신의 축복이 있기를''', 2014년에는 '''몬테비데오에서 봐요''', 이 당시의 유고 대표팀을 다루는 2편의 영화가 세르비아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몬테비데오, 신의 축복이 있기를에서는 당시 유고 대표팀의 거의 모든 선수들이 다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사와 티르나니치고 그들의 우정과 사랑싸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 수상 == === 클럽 ===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6회: 1924(이상 SK 유고슬라비아), 1930–31, 1932–33, 1934–35, 1935–36, 1938–39(이상 BSK 베오그라드)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4회: 1926(SK 유고슬라비아), 1927, 1929, 1937-38(이상 BSK 베오그라드)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1회: 1934(BSK 베오그라드) === 개인 ===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득점왕 3회: 1930, 1934-35, 1936-37(이상 BSK 베오그라드) === 감독 ===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54-55(BSK)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2회: 1953, 1955(이상 BSK) [[분류:축구선수]] [[분류:축구감독]]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