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목차] = [[후한]] 말의 군웅 = [include(틀:위서 동이원유전)] [[파일:attachment/f603918fa0ec08fa44cd3c6558ee3d6d54fbda26.jpg]] 袁紹 (? ~ 202년 6월 28일) >'''후한 말의 [[체자레 보르지아]].''' >'''수명과 후계자 문제를 빼면, 삼국지 내의 수많은 군웅들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지만 지나친 독선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망친 인물.'''[* 근데 이 점도 지나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게, 다른 군주는 이보다 결점이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다고 볼 수 없었다. 결국 하늘이 원소를 버린 셈...] == 개요 == [[후한#s-1|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지]]의 인물. 후한의 명사로 [[자(이름)|자]]는 본초(本初). 자모위용(姿貌威容)이라며 빼어난 용모를 가졌었고 말과 행동에는 위엄이 서려 [[왕]]이나 [[황제]] 같은 존재감을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지와 관련된 2차 창작물에서는 열에 아홉은 조조보다 못생기게 표현된다. 이는 이러한 창작물 대부분이 정사보다는 연의를 따라 인물들의 외모를 만들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 속 원소의 모습도 연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며, 옆에는 대놓고 원소를 조롱하는 한시가 적혀 있다. 원소는 정사와 연의에서 공통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지만, 실제 실적은 그에 반해 대단히 높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십상시]]와 [[동탁]]과 [[공손찬]] 같은 자들도 제압하는 등 삼국지 초반의 판도는 전적으로 원소의 주도하에 있었고, 천하의 [[조조(삼국지)|조조]]조차도 천자를 옹립하여 원소에게 대항하기 전까지 원소에게 필요할 때마다 동원되는 일개 제후에 불과했었으며,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 할 때에는 [[순욱]]에게 군을 돌려 후퇴할 것을 상의했을 정도로 원소는 강력했다. 정치적인 판단력과 선동능력이 뛰어났으며 이를 통해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갑자기 병사하는 바람에 그의 세력은 후계자들의 내분으로 조조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후에도 조조가 원소의 잔존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들였던 것을 감안하면 원소의 능력과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아래에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실제 원소는 냉혹하고 결단이 빨랐기 때문에 정사, 연의 삼국지 팬들이 흔히 아는 '''감정적이고 우유부단한''' 모습은 고작 사망 몇 년 전에 한번 보여준 것이 유일하다. 전반적으로 후대인들이 조조를 치켜세우기 위해 무능하게 왜곡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소를 실제에 가깝게 평가한 역사서는 후한서다.] == 초기 생애 == === 최고 명문가의 천출 ===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지만, 이는 가문의 본적이 여남군 여양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었을 뿐, 실제로는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원소 본인이 남긴 글에서 자신이 낙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동탁 진영에서 원소를 비하할 때 수도에서 나고 자라서 외모만 반듯한 겁쟁이니 변경에서 실전으로 백전연마한 자신들의 상대가 안된다고 호언하는 기록들에서 잘 드러난다. 고조부 원안(袁安)부터 4대가 모두 삼공(三公)의 작위를 얻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나 태생은 다소 복잡하다. 원소를 낳은 어머니가 [[노비]]인 것도 한 몫 한다. 후한서 본문에는 원소가 태위 원탕(袁湯=원소의 할아버지)의 차남 원성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공식적인 가계상으로도 원성의 아들이다. 그러나 후한서의 주석들 중에서는 원소가 원성의 친아들이 아니라 원탕의 삼남(세번째 아들)원봉의 자식이었고, 할아버지인 원탕의 장남(첫째 아들)과 차남(둘째 아들)이 모두 요절하여 삼남 원봉이 종가가 되고, 본래 원봉의 친자식이었던 원소가 차남 원성의 가계로 입적되었다는 견해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주석마다 내용이 달라 어떤 주석은 원성이 원소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도 있는등 서로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진수(삼국지)#s-1|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원소의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이 고조부 이래로 삼공을 지내 큰 집안이었다고만 설명되어 있다. 때문에 원소의 가계상 아버지는 알아도, 친아버지가 원봉인지, 원성인지는 설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원소가 얼자(孼子)라는 것이다. 얼자는 [[천민]] 출신의 [[첩]]에게서 나온 자식이라는 뜻이다. 후한 시기까지 단순한 [[서자]]들은 출세에 큰 제약은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노비인 얼자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는 [[과거]]제로 사람을 뽑아 쓰던 시대가 아니였는지라, 주변의 평판이나 추천을 통해서 천거를 받았는데, 계급사회인 당시로서는 어머니가 노비라면 평판이 좋게 나오기 힘들었다. 후에 원술이 공손찬에게 편지를 보내 원소를 비난할 때 "우리집 종놈"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천민 출신 첩의 취급은 고대부터 [[성노예|성적 노리개]] 혹은 씨받이였고, 후에 원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6년상을 치루는 등 극도로 유교적인 행보를 보여야만 했다. === 청년 시절 === 어린 시절부터 삼공부 고위 관료들의 주목을 받아서 낭(=고관의 하급부관)으로 일하다가 20세에 벽소되어 복양현장에 임명되었는데 청렴하고 깨끗하다는 평판이 두루 있었다.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다. [[세설신어]]의 야사 중에는 조조와 원소가 젊은 시절에 다른 집의 [[신부]]를 잡아서 겁탈하려 하다가 원소가 가시덤불에 걸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조조가 "도둑이 여기있다!"고 외치고 원소는 기겁을 하여 뛰쳐나왔다는 웃기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전설이나 민간설화등을 기록한 세설신어의 특성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위나라 시대에 원소를 대하는 이미지가 이랬던 것이라고 봐야한다. 예를 들어 원소가 일구어낸 세력은 위/진의 토대로 흡수되었고, 후계 국가들은 조조를 띄우고 흡수한 세력들을 억눌러야 했기에 일부러 조롱하는 야사가 많았다. === 6년상 === 이때 원소의 적모(嫡母=원성의 정부인)가 죽었는데, 원소는 이를 계기로 벼슬을 그만두고 원씨의 본적이 있는 여남으로 내려가 시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지냈다. 탈상을 마친 후 곧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으나 상복을 입지 않았던 것을 추감하여 아버지 원성의 삼년상을 연이어 지냈다. 이런 기이한 행보로 인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덕분에 많은 빈객들이 찾아왔는데 이때 원소 또한 누구를 만나더라도 귀천을 막론하고 예를 갖춰 대하는 등 항상 정중하고 겸허한 태도를 유지했고 이는 곧 좋은 평판으로 이어졌다. 그때 한번이라도 원소를 만나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인하여 그의 집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주변의 거리가 마비되었다. 원소의 6년상이 어떤 고행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삼년상만 해도 목숨을 거는 중노동으로, 조선시대에도 삼년상 지내다 줄초상 나는 경우가 있었을 정도였다. 후한 말에는 이미 삼년상을 간략하게 고친 약식으로 상을 지내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삼년상을 지내는 사람들은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때문에 원소의 '효행'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도 적지 않았다. 후한서의 진번열전에는 (원소가 아닌) 비슷한 시기인 영제 시대에 삼년상을 지내 효자로 이름이 알려져서 천거되었던 선비에 대해 조사하던 중, 상을 치르는 기간 중간에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그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일화로는 예와 절차에 맞게 삼년상을 지내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고된 시묘살이로 인하여 초췌해져 탈진해 쓰러져 있는 아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겹이불을 덮어줬던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바람에 '겹이불을 덮었다'라는 소문이 돌아 하루아침에 빈객이 뚝 끊겼다는 사람의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원소는 복상 기간동안 그를 보기 위해 항상 거리가 마비될 정도로 인파가 몰렸으며, 당대의 명사였던 [[하옹]]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이는 곧 고된 시묘살이를 '''수많은 선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하나의 흠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탈상하자마자 추감하는 형식으로 안 지내도 될 삼년상을 또 다시 지냈다. 또한 원소가 6년상을 지내기 이전에 2차례의 [[당고의 금]] 사건으로 당인세력이 낙양에서 축출되어 형주와 예주 일대에서 숨어 지냈는데, 6년상 기간 동안 청류파의 명사였던 하옹 등 여러 당인(黨人)들과 교류하며 중앙정치의 부정을 성토하는 등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넓혀 갔다. 흔히 원가를 사세오공을 지낸 명문가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환관세력과 결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청류파 인사들이 원가의 배경을 가진 그를 처음엔 달갑게 여기진 않았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원소는 천출이라는 출신성분과 탁류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원가의 일원이라는 이미지를 [[무려]] 6년 간의 복상이라는 고행을 거침으로서 씻어내고 극복해낸 것이다. 원성이 원소의 친부였던 양부였던 간에 원소가 시묘살이를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여남에 머무르며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넓혀나간 것은 사실이며, 이 과정에서 천출인 원소가 다수의 청류파 인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원씨의 문객과 고리 등의 지지기반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 재야의 거두 === 6년상 이후 탈상을 마치자 곧바로 낙양으로 이주했다. 당시 낙양은 이보다 앞선 176년 5월에는 당인을 보호하던 영창태수 조란을 찢어죽여 사대문에 효시한 뒤, 당인 및 그 보호자에 대한 연좌제가 시행되어 이들의 문객과 고리 그리고 5촌 이내의 친척 중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파면시키고 임용기회를 박탈하는 칙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때문에 낙양에서 청류파는 거의 전멸하였고, [[십상시]] 등 환관 세력이 날뛰어 부정부패가 들끓었으며 지사(志士)들은 대부분 낙양에서 도망치려 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한서 하옹열전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원소는 배짱 좋게도 이런 환관의 천하에서 당인이었던 하옹과 함께, 환관세력의 안방인 낙양으로 들어가 은밀히 당인들을 보호하고 십상시에게 억울하게 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왔다. 또한, 그를 중심으로 모인 당인들과 매양 장차 환관 체제에 타격을 가하고 전복시켜 정치를 바로잡을 방안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원소가 이토록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소의 가문이 있었다. 당시 원씨는 환관 체제에 협조적이었던 대표적인 탁류 가문이었는데 이미 칙령을 천하에 공표한 이상 문제를 공론화시켜 원소를 처형하려면 원소뿐이 아니라 자신들의 우군인 원씨 가문 전체를 절단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씨는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냈기에 그 문객과 고리들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는데 원씨를 제거한다면 이들 모두를 적으로 돌려야 했다. 원소는 비록 노비의 자식이었지만, 자신이 원씨라는 점을 그야말로 절묘하게 이용한 샘이다. 때문에 십상시는 섣불리 원소를 제거할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잔존한 청류파 세력은 원소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어 원소의 명망은 나날이 높아졌다. 또한 벼슬을 내리며 회유하는 조정의 소환에도 매번 병을 핑계대며 불응하였는데, 이 때문에 자연히 청류파의 대표로 두각을 드러내 모든 환관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며 환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원씨 가문과도 대립했다. 이때 원소는 천하에 명성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 암살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 같다. 환관들로서는 원소를 제거할 수단이 암살밖에 없었다. 설령 원씨들과 척을 지는 것을 각오하고 원소를 법정에 세우더라도 오히려 자신들이 손해를 감수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에 당고의 금이라는 희대의 언론탄압으로 수 십 년간 쌓인 자신들의 비리에 대한 반대여론을 표면적으로는 무마시켰으나 이미 환관 체제에 대한 식자층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만약에 원소를 법정에 세운다면, 원소가 법정진술에서 이를 성토하여 다시 불을 붙이어 환관 체제는 치명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원소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어려웠고, 반대로 벼슬을 내리며 회유하는 것은 원소 본인이 단호히 거부했다. 때문에 암살하는 수단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 하진 휘하로 임관 === 하지만 최소한 184년 무렵에는 대장군 [[하진]](河進)의 연(掾)[* 삼공 이상 고관의 속관으로 대장군연의 정원은 29명이다.]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중상시 중 하나인 조충이 원소가 명성만 키우면서 조정의 소환을 거부하는 동기가 불순하다며 주변 환관들에게 성토했고 이것을 들은 원외가 원소에게 "집안을 망칠 작정이냐."고 꾸짖자 벼슬에 응했다고 하지만 후한서에 의하면 원외의 말에도 끝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하고 있어 어떤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이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기 보다는 아마 시기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황건란을 계기로 당인들의 수배가 풀렸고 이에 당인들이 다시 조정에 진출했는데 이때 당인세력을 지지층으로 거느린 원소 또한 이에 맞춰 출사한 것으로 보인다. 임관 뒤 학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관리의 비리를 감찰 및 탄핵하는 시어사로 승진했으나, 평소 사이가 나빴던 [[원술]](袁術)이 상서로[* 시어사는 상서의 결재를 받는다.]로 있었기에 결국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186년 이후에는 호분중랑장(虎奮中郞將)이 되었는데 당시 종정이었던 [[유우]]와 함께 황실의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갑훈]], 유우와 모의하여 근위대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마침 [[장온]]이 갑훈을 경조윤으로 전임시키도록 조정에 건의했고, 갑훈을 꺼려하던 [[건석]](騫碩)이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 부쳐 통과시키는 바람에 불발에 그쳤다. 188년, [[서원팔교위]]가 창설되자 원소는 형식상 서원군의 2인자인 중군교위로 전임되었으나 실권은 상군교위인 [[건석]]이 독점했다. 이후 189년, 영제가 승하하고 대장군(大將軍) 하진이 권력을 잡자 원소는 다시 하진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 십상시의 난 === 하진은 본디 천민이었으나 환관들에게 줄이 닿아 여동생을 후궁으로 넣으면서 낭중으로 벼슬을 시작했고, 여동생이 영제의 총애를 받음에 따라 승진을 거듭해 하남윤까지 출세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군으로 임명, 진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막강한 위세를 얻은 인물이었다. 영제가 서원군을 창설하고 환관인 건석을 수장으로 삼은 것은 중앙군을 강화해 하진을 견제하기 위함으로 서원군은 황제의 직할군이며 건석은 비록 교위에 지나지 않지만 황제를 대리해 그 직할군을 지휘하는 역할이었으므로 군부의 최고위인 대장군도 상군교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건석 또한 평소 하진을 벼락출세한 무식쟁이로 여겨 항상 지나치게 깔보았는데, 영제의 임종을 지켜며 하진을 죽이고 진류왕 협을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하진은 이를 간파하고 선수를 쳐 외조카인 변황자를 황제로 옹립한다. 유혈 충돌은 없었으나 이를 기점으로 양자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때 원소는 하진의 측근 장진을 통해 하진에게 먼저 접근해 환관 세력을 축출할 것을 권하는 등 직속 상관인 건석을 배신하고 하진을 부추겼다. 비슷한 시기 호분중랑장을 맡고 있던 [[원술]] 또한 하진에게 포섭되면서 하진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고, 불안해진 건석은 서원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하진과 군사적으로 전면적인 대결을 벌이고자 했으나, 하진과 가까운 환관들의 밀고로 간파당해 다시 선수를 맞고 처형당한다. 건석이 이끌던 서원군은 해체되어 하진의 휘하로 편입되면서 하진은 모든 권력을 독점했으며 서원군의 2인자 격이었던 원소는 이 과정에서 하진의 핵심 측근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 것으로 보인다.[* 하진과 '친한' 문객 장진을 통해 조심스럽게 설득하던 때와 달리 서원군 해체 이후 시점부터의 원소는 하진의 면전에서 뺀질나게 직언을 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있다.] 본디 십상시의 후원으로 출세한 하진은 건석을 제거한 시점에서 기존 십상시 등 환관세력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나 원소를 필두로 하는 강경파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원소는 수도의 행정,사법을 총괄하는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어 환관세력 축출을 주도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십상시의 난]] 항목 참조. 그러나 하진이 십상시를 축출하던 도중에 암살되었고, 원소는 도성을 장악하기 위해 십상시중 하나인 장양(張讓)이 임명한 사례교위 등 친환관계 관료들에게 선수를 쳐 그들을 모두 살해한 뒤 궁정에 돌입해 환관세력을 철저히 주살했으나, 장양과 남은 환관들이 천자와 유협을 데리고 궁밖으로 도주하였고 마침 지방에서 올라와 있던 [[동탁]](董卓)이 원소보다 먼저 황제의 신변을 획득했으므로 결국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결국 정권은 엉뚱하게도 동탁에게 넘어갔으며, 원소는 황제인 유변을 폐위하고 진류왕 유협을 새 황제로 추대하려던 동탁과 대립하던 끝에 결국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폐위를 둘러싼 동탁과의 언쟁중 폐위를 강행하겠다는 동탁의 협박에 칼을 뽑아 읍하며 '''"천하에 힘있는 자가 동공 뿐은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 것은 유명한 일화. 동탁은 원소에게 분노하여 현상금을 걸고 원소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하옹과 오경 등이 원소와 친했으므로 원소를 두둔하며 회유할 것을 권했다. 동탁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원소의 명망이 높고 가문 또한 큰 것을 봤으므로 이에 동의해 원소를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임명하여 원소의 세력권을 추인하는 등 회유에 나섰다. 원소는 태수직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본래의 직함이었던 사례교위를 자칭했다.[* 사례교위는 수도를 통치하는 장관이며 관리의 감사권도 가지는 관직이다. 원소는 소제-하진 정권의 실력자였고 또 동탁이 이끄는 새로운 제실(유협)을 유명무실한 동탁의 괴뢰로 보며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전 정권의 정통성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고, 뒤에 언급될 정통성 분쟁과도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 동탁은 또한 어사중승 [[한복]]을 기주목으로 삼아 원소를 견제하도록 했다. 원소는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한복이 부관들을 보내 행동을 낱낱히 감시했으므로 거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모]]가 삼공부의 지령을 날조해 각지의 거병을 부추기는 격문을 돌리자 한복이 원소와 동탁 사이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다가 마침내 원소의 거병을 승인했다고 한다. 이 이전에 동탁은 나름대로의 민심 수습책으로 영제 시대의 부패한 분위기를 청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청류파의 명사들을 대거 기용하며 각지의 자사,태수로 임명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게 역효과가 되어 이렇게 임명된 태수와 자사들이 모두 원소의 거병에 호응하고, 동탁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하면서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게 된다. [[18로 제후]]가 이것이다. === 난세의 초래 === 군사를 일으킨 원소는 하북의 여러 국상, 태수들과 함께 하내에 주둔했다. 하지만 기주목 [[한복]]은 여전히 업에서 대기했는데 업이라는 지리와 기주목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보았을 때 연합군의 후방의 보급과 군사업무를 총괄한 것으로 보인다.[* 한복이 이러한 행보를 보인 것은, 종사 유자혜(劉子惠)가 연합에 나서지 말 것을 권하였기 때문이다.] 하남 지역에서 거병한 관리들은 따로 산조에 모여 주둔했다. 그 지역에 거점을 둔 제후국이나, 훗날의 절도사와 같은 지방 군벌이 아니라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파견나간 관리들(삼호법에 따라 모두 현지 출신이 아니다.)이 서로 연합하고 군대를 조직해 중앙정부를 공격한 일은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이는 동탁 정권이 기존의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겨우 9살이었던 [[헌제|유협]]을 사실상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던 만큼 그 정통성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탁은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경악하였고 이에 곧바로 [[소제]]를 살해했는데 이는 소제가 연합군의 구심점이 되어 복위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동탁은 그 다음달에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하고 군대를 낙양에 주둔시켜 관동지역에서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3월, 호족들의 대다수가 원소에게 귀부하여 원소가 관동지역을 수중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자 태부 [[원외]]와 태복 [[원기]] 및 원소의 친어머니와 누이를 비롯한 낙양에 남아 있는 원씨 일가 50인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몰살시켰고 이후 호모반, 음수, 한융 등 조정의 명사들을 칙사로 보내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지만 원소는 하내태수 [[왕광]]을 시켜 호모반 등을 처형하고 시체를 조리돌리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황제의 칙사를 살해하여 수만명의 군사들에게 조리돌림하는 충격적인 행동을 보였음에도 관동지역의 호족들은 오히려 더욱 원소를 지지했고 전국 대다수의 군현에서 원소에게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켜 거병하기 시작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맞물리는데, 첫째로 당시의 제실은 동탁이 마음대로 기존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운 형태였다는 점과 홍농왕으로 격하된 전 황제를 시해했다는 것, 또 후한 2백년의 수도였던 낙양을 초토화시키며 무자비한 천도를 강행하고 황실과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싹쓸이하는 등의 광포함에 대비되듯 원소가 그동안 보여 왔던 올곧고 청렴하며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인해 당시 호족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던 청류파의 대표로서 평판이 매우 좋았던 것에다가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동탁이 원씨의 고리였다는 점도 호족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한대의 태수나 자사는 사실상 그 지역의 임금에 해당하였고 고관에게 징소되어 정계에 진출한 고리와 문생들은 제후와 신하의 관계처럼 얽혀졌다. 고리와 속관은 자사와 태수를 (사실상) 주군으로 섬겨 충성을 바치고, 자사와 태수는 다시 황제를 구심점으로 삼았었다. 동탁은 단경에게 천거되고 사도 원외가 벽소하여 속관으로 삼았으니 원가의 고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가 관동에서 기의하자 원외와 그 일가를 모조리 도륙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 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동탁은 노인과 어린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것도 모자라 몰래 파묻어 묘소조차 세울 수 없게 만들었다. 문생과 고리가 온 천하에 가득한 원씨였으니, 그들 모두의 분노를 산 것도, 원소가 동탁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관동지역 전체가 호응한 것도 그저 까닭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원소의 위세는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때 한복은 원소가 지나치게 민심을 얻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원소가 아무리 명성을 드높였다곤 하나 실제적인 관위는 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후한의 대주인 기주의 목이었던 한복은 당연 원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자금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관위상으로도 원소를 통제하는 상관이 된다. 애초에 동탁은 어사중승(감찰부의 수장)이던 한복을 원소의 감시역으로 파견한 것이다. 원소와 동탁 사이에서의 이득을 저울질하던 한복의 태도로 봤을때 원소의 거병을 승인한 것은 어느정도 원소를 통제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계산이 있었고 이후 원소에 대한 지지가 너무 강해지자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원소가 쓴 글에서도 한복이 자신과 동탁 사이에서의 득실을 계산하며 계략을 꾸몄다고 적고 있다.] 이에 원소의 군대에 공급하던 군량을 끊으어 원소군을 붕괴시키려 했고 이에 원소는 별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내에 주둔한 채로 시간을 보낸다. 190년 겨울,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은 이후 원소와 한복이 어떤 경위를 거치며 서로 타협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원소는 한복과 함께 당대의 명망높은 황족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시도했다. 간신(=동탁)은 수도를 불태우고 패악을 저지르며 꼭두각시인 어린 황제는 연락이 끊겨 관동이 무주공산이 되었으니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명망과 위엄을 갖춘 황족을 추대하여 새로운 질서를 새운다는 명목이었는데, 상기한 이유로 인해 동탁과 장안 조정의 정통성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원소의 지지도와 발언력은 막강했으며 유우 또한 훌륭한 통치와 그 인품으로 당대 인덕의 아이콘으로 여겨질 정도로 오랬동안 모든 계층에게서 존경을 받았기에 헌제와 장안의 조정은 전국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공손찬과 원술을 필두로 한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평소 유우와 견원지간이었던 공손찬은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며 원소와 한복 등의 행동을 역모로 규정,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했다.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 또한 원소에게 유독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어 원소가 정국을 주도하며 지지를 받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 이에 원소와 한복의 행동을 역모로 규탄하며 장안으로 진군해 동탁을 격파하고 황제를 구출할 것을 주장했다. 오서에 의하면 이는 원술 본인이 개인적으로 무군지심을 품어 한황실의 쇠퇴를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겼기에 유우 같은 능력있는 인물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조조 등이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호걸들이 원소를 따랐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의 중론은 유우의 옹립으로 무게가 기울어 진 쪽으로 봐야 한다. 우선 동탁이 이끄는 제실과 황제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져 각지의 장관과 유력자들은 조정과 연락을 끊고 황제의 인가 없이 멋대로 관직을 남발하는 등 후한 왕조와 무관하게 군벌화하고 있었고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던 대표적인 세력인 원술과 공손찬 역시 이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오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장안 조정에 대한 충심은 전혀 없고 단지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원소, 유우를 견제할 정치적 대의명분을 확보하려 한 것에 가깝다. 이토록 동탁과 장안 조정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했던 원소의 논리는 각 주와 군의 군벌화를 부추기며 중국을 군웅할거의 무질서 상태로 몰고 갔다. 하지만 원소는 물론 --원술같은 유니크한 견해를 가진 인물이 아닌 이상-- 기존 장관들의 대부분도 관직과 법령이 남발되는 무질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바랐던 것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바로잡힐 필요가 있었고 유우는 명망과 능력면에서 당대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그 중심에 서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이 무렵 [[원술]]은 남양에 주둔하면서 부장인 [[손견]]을 선봉으로 내세워 동탁과 접전을 벌였고 눈치만 보며 나서지 않던 다른 제장들과 달리 직접 행동으로 나서서 정말로 동탁군을 격파했으며 곧 낙양을 수복하였다. 이로 인해 대단히 주가를 올렸으나 한편으로는 전비 조달을 위한 영지에서의 지나친 학정과 수탈로 반대세력을 양산했다. 양주의 명사였던 [[주흔]], [[주앙]], [[주우]] 삼형제가 대표적이었는데 원소는 주씨 삼형제를 부추겨 원술을 견제했다. 주앙을 예주자사로 임명하며 예주 장악을 지시하고 주앙과 주우가 원술의 근거지였던 예주와 사예 지역의 중간기지인 양성을 습격해 탈취하면서 원술군의 진격로를 차단하자 원술은 결국 낙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주씨 형제와의 싸움으로 수년간 발목을 잡히게 된다. 하지만 정작 유우의 추대는 유우 본인이 수 차례에 걸쳐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에[* 무제기에 따르면 필유(畢瑜)를, 후한서에 따르면 장기(張岐)를 유우에게 보내 추대를 권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물거품이 된다. 이에 한복은 유우에게 따로 사절을 보내 영상서사가 되어 연락이 끊어진 천자 대신 국정을 총괄하며 관직의 임명을 맡아주도록 권했으나 유우는 이 또한 거부하였고 오히려 한복의 사자를 붙잡아 참수했다. 유우가 진정한 대인배인 것이 드러나는 것은 한복의 사자를 참수한 시점부터다. 이 이후로는 직책을 받들어 처리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더욱 공경스럽고 엄숙해졌으며 혹 외국의 사절로부터 바쳐진 조공이 있으면 도로가 막혔더라도 모두 운송하여 장안까지 보내는 등 철저히 헌제의 정통성을 옹위하고 신하로서의 위치에 충실했다. 겉으로만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며 속으론 딴 생각만 품고 있던 원술, 공손찬 따위의 군벌들과 달리 오직 조칙에 따를 뿐 끝까지 군벌화하기를 거부했으며 오히려 원소 등을 달래며 장안의 조정을 받들어 따르도록 설득하였다. 하지만 후한 13주 자사, 태수들의 대다수는 유우와 같은 성인이 아니었다. 원소가 호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황제의 칙사를 살해하고 조리돌림한 사건 이후 후한 조정의 권위는 사실상 붕괴되어 장안에 고립되었고, 원소가 유우를 중심으로 붕괴된 체제를 대신할 신질서 수립에 실패하자 중심을 잃은 전국의 관리들은 제각기 군벌화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군웅할거의 시작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진수는 포훈전에서 이 무렵의 원소에 대해 '원소의 무리가 최고로 성했던 시기'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단순히 세력적으로만 봤을 때 당시 원소의 힘은 미약하여 공손찬은커녕 한복에게도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훗날 원소가 경쟁하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여 하북 4주를 통일하고 호구는 수백만에 수십만명의 군사를 거느리며 명실상부한 당대 최강의 세력을 형성했을 때도 저만한 표현을 쓰진 않았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 == 군웅할거 이후 == === 기주 점거 === 원소의 유우 추대 시도가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한 것인지 한복의 견제에 대한 타협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연합군 창설 초기에 원소는 낙양의 바로 북쪽인 하내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내는 황하 건너편의 나루터인 맹진을 거쳐 바로 낙양을 노릴 수 있는 곳이고 산조의 연합군과 연계할 수도 있어 낙양 공격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기주의 북쪽인 발해군에서 멀리 사예주에 있는 낙양 공격의 주요 루트인 하내군에 군을 이끌고 가서 주둔했고 연진까지도 진군했으며 칙사까지 죽여버리는 등 기세등등하던 것으로 봤을 때 이때까지만 해도 원소는 분명 동탁과 직접 맞붙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으며 원소를 견제하였는데 이에 원소군이 거의 와해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복이 원소를 견제한 이유는 원소의 행동들이 예상외로 전국적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았기에 결국 원소가 그 명망을 바탕으로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두려워한것. 그렇지 않아도 당시 동탁의 탐욕과 광포함에 대한 불만여론이 들끓던 상태였는데, 그에 반발해 대립각을 세웠던 상대가 평소 청렴하고 올곧다는 명성이 높던 원소였고 여기에 더해 동탁의 원씨 일가 멸족크리로 원소에 대한 동정여론이 들끓었던 상황이었다. 설령 원소가 패배하더라도 원소가 일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소 군사를 이끌며 동탁과 대결하는 구도가 나오는 자체만으로 원소의 주가는 올라가게 되며 이길 경우에는 완전히 한복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손견을 앞세워 낙양을 점령한 원술이 잠시 손견을 견제할 생각을 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원술은 결국 끝까지 손견을 밀어줬었다.] 하지만 결국 유우 추대가 실패한 이후에도 원소는 한복의 집요한 견제를 받아 근거지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연진에 머무르며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근거지인 발해군에서 한참 벗어난 원소의 군세는 한복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이제 한복에게 이용가치가 떨어진 얼굴마담인 원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발해군으로 돌려 보내기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던 중 한복의 장수인 [[국의]]가 한복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이때 원소는 한복을 증오하고 있었기에 국의와 결탁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한복의 원조와 발해군 귀환 모두가 불발되면서 원소가 국의를 후원해 한복에게 선수를 친 것으로 보인다. 사세상 한복의 입장에서 원소는 더 이상의 이용가치가 없는 위험인물이나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기는 어려웠으나, 단순히 원조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원소의 생명줄인 군사력은 그대로 끝장나고, 임시방편으로 군량을 조달하는 것에도 한계가 뚜렷하니 결국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약탈 등에 의존하게 되는게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이는 곧 한나라 최고의 애국열사며 연합군의 맹주라는 위치에서 일개 도적떼 수준으로 전락해 원소의 가장 큰 정치적 무기였던 여론의 지지가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에, 강대한 기주군으로 이미 여론의 지지를 잃은 원소의 한줌밖에 안되는 군대를 손쉽게 처치하면 되는 상황이기 때문. 원소는 한복 수하의 불만세력이던 국의를 포섭, 한복 세력 내부에서 기습적인 무력 봉기를 시도하여 이를 타개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국의는 한복에게 패하여 달아났고, 이로서 표면적으로나마 유지되던 한복과의 관계가 완전히 결단나게 되었다. 이때 [[봉기]]가 공손찬과 암약하고 그를 끌어들여 한복을 격파하자는 계책을 내면서 원소는 공손찬에게 밀사를 보내 기주를 칠 것을 설득했고 [* 이 밀약의 조건으로 무엇을 제시하였는지는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수 없다.] 이에 공손찬은 '동탁을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뻔한(...)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기주로 향했고 한복은 황급히 군대를 돌려 공손찬에게 맞서나 크게 패하며 시원하게 병력을 말아먹고 만다.[* 결국 공손찬에게 온 정신이 팔린 한복은 원소의 주위세력 병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이 계책이 성사되자 원소는 봉기를 더더욱 극진히 아끼고 친근히 대하며 신임했다고 한다.] 이에 원소도 군사를 이끌고 한복의 근거지인 업으로 북상, 한복이 패한 틈을 타 기주에서 찝적대고 있던 흑산적과 [[장양]], [[어부라]] 등의 무리를 전부 격파하고, 상당수를 병합하며 세를 늘려 간다.[* 공손찬의 표문에 따르면 이때 호아도위 유훈이 장양,어부라와 교섭해 투항을 받아내는 활약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에게 숙청당했다.] 한복은 공손찬이 대군으로 남하하고 있는 데다가 원소가 이에 호응하듯 급격하게 병력을 불리며 기주로 들어오니 원소와 공손찬이 협공할 것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질렸고, 이에 원소는 한복과 같은 영천사람인 [[곽도]]와 [[순심]], 외조카인 진류사람 [[고간(삼국지)|고간]] 등을 세객으로 보내 기주의 여론을 부추기고 한복을 협박했다. 순심이 한복에게 유세하며 한 말에 따르면 공손찬은 도저히 이기기 어려운 적수이며 원소 또한 영걸이라 결코 한복 밑에 있는 만족할 사람이 아니므로 두 사람이 연합한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나 원소는 한복과의 옛 친교가 있으니 자리를 양도한다면 목숨은 물론 지위도 보장해주겠다고 설득하였다. 담력이 작았던 한복이 이에 동의하려 하자 한복의 측근인 종사 이력, 경무, 민순, [[저수]] 등은 원소의 군세가 급조된 오합지졸인데다 제각기 산재해 있고 군량조차 없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둬도 곧 와해될 것이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한복은 공손찬에게 패한 이후로 이미 싸움에 질려 있었는지 자신은 원씨의 고리였던 데다 원소 또한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므로 뛰어난 자에게 뒤를 맡겨야 한다고 핑계대었다. 패하기 이전에 한복은 도독종사 조부, 정환 등에게 1만의 강노병[* 기주의 강노병은 유주의 돌기와 함께 후한의 최정예 병력으로 명성이 높았다.]을 맡겨 하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부와 정환은 한복이 원소에게 기주목을 양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귀환해 원소와 일전을 벌이자고 한복을 설득했으나 한복은 끝끝내 듣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 한재를 원소에게 파견해 기주목의 관인을 양도했다. 이에 원소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한복의 종사 10명이 달아났고 모든 종사들은 그저 원소가 도착하면 자신이 뒤에 남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경무와 민순 등은 직접 무기를 잡고 나서 원소가 오는 것을 저지했다. 여론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원소는 이들에게 당장 손을 대진 못했으나 이후 [[전풍]]을 시켜 이 둘을 죽였다.[* 용재수필에 따르면 조부, 정환, 이력 등도 원소에게 전원 숙청되었다.] 191년 7월, 기주목이 된 원소는 천자의 명의를 빌어 한복을 분위장군으로 삼았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다. 한편 한복의 측근이었던 저수와 만나며 저수가 원소가 천하를 평정할 전략에 대해 유세하자 분무장군으로 삼고 감군을 겸하게 하여 중용했다. [* 배송지는 이때 저수가 원소를 위하여 유세하고 원소가 저수를 중용한 것을 근거로 들어 애초에 저수는 한복에게 원소를 칠 계책을 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저수는 지방 아전으로는 최고위직인 별가를 두 차례나 지냈으며 중앙에 천거되어 2개 현의 현령을 역임했고 한복 시대에는 실권자인 별가에 더하여 이미 2천석의 반열인 기도위를 겸하던 거물이었다. 때문에 워낙 거물이라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포섭했다는 시각도 성립이 가능하다.] 또한 원소는 거록사람 [[전풍]], 위군사람 [[심배]] 등을 발탁하였는데 대체로 한복에게서 소외되었던 인사들을 발탁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복은 이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원소가 발탁한 도관종사 주한이 원소에게 영합하기 위해 마음대로 군사를 내어 한복의 자택에 테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복은 달아나 화를 피했으나 한복의 장남은 구타당하여 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에 원소는 즉시 주한을 잡아들여 참수했으나 한편으론 전풍이 자객을 보내 경무,민순을 죽이는 등, 사실상 구 한복파 숙청을 위해 원소가 사주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치 테러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공포심이 극에 달한 한복은 기주에서 달아나 [[장막]]에게로 의탁해 원한을 갚고자 했다. === 계교전투와 하북 평정 === 기주목이 된 원소가 이렇게 내부를 장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할 때 공손찬은 밀약의 결과인지 남쪽으로의 진군을 멈췄지만, 곧 원술과 연합하여 원소를 견제했고 사촌동생인 [[공손월]]에게 군대를 주며 원술에게로 파견했다. 원소 또한 유표와 연합해 형주로 진출하고 있던 원술을 견제하였다. 공손월은 원술을 지원해 손견과 함께 원소의 후원을 받았던 주씨 형제와 싸웠는데 예주의 양성에서 [[주앙]] 을 공격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이 사건에 크게 대노한 공손찬은 군대를 다시 남쪽에 배치시켰다. 이에 원소는 크게 두려워하며 공손찬의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를 양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공손찬에게 보냈다는 원소의 편지가 주석으로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신이 족제(=공손찬의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를 양도했지만 공손찬은 오히려 우호를 져버리고 예주를 공격했고 그러다 아우(=다른 사촌동생 공손월)가 죽자 자기 탓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사건의 순서가 '''원소 기주목 취임→발해태수 양도→공손찬의 예주공격→공손월 사망→계교전투'''로 이어지므로 기존의 기록과 다르다. 비록 원소가 기주목이 되었지만 당시 공손찬은 세력적으로도 원소보다 훨씬 강했고, 한복을 친 것도 일단은 원소와의 밀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원소로서는 이 밀약의 대가를 건낼 필요가 있었고, 자료의 부족으로 그 대가가 정확히 무엇이었지는 불분명하지만, 설령 공손찬이 아닌 원소가 한복을 병합하게 되더라도 공손찬에게 영토 일부를 양도하겠다고 약조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원소의 주장과 다르게 다른 기록들은 모두 공손월 사망 이후에 원소가 발해군을 넘겼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원소가 약속을 하고서도 실제적인 양도를 계속 미루며 시간을 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노한 공손찬이 공손월을 예주로 보내 원술과 연합하는 등 견제하다가 공손월이 죽으면서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자 허겁지겁 발해군을 넘기고 저자세로 나왔다고 보면 앞뒤가 맞는다.] 원소는 공손범이 자신과 공손찬 사이를 중재해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발해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가세하였다.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이 하북으로 올라와 발해군의 경계를 침입했는데 공손찬은 보기 2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여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30만을 거의 몰살시킨 것에 가까운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위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실제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것 같다. 요격하여 3만의 수급을 취하고 수 만 수레의 물자를 노획, 재차 추격하여 강을 건너 달아나는 것을 반쯤 건넜을 때 습격해 완파했다. 이때 수 만 명을 베었는데 이들의 피로 강이 붉어졌으며 포로가 7만명에 노획한 무기와 식량은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위광을 온 나라에 떨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공손찬의 무리는 더욱 강성해졌고 위세는 절정에 달해 공손찬은 원소군을 무찌르며 계교로 군을 전진시켰고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추단]]을 병주자사로 삼아 각기 파견했으며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3개 주의 주, 군, 현에 배치된 기존 관리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몰아내고 점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노골적인 야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장안의 헌제에게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상주문을 작성하고 포고한다. 이에 하북이 진동하였으며 기주에서도 수많은 군현이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또한 이때 원소에게 붙고 있던 [[장양]], [[어부라]]는 동탁이 이끌고 있는 장안 조정에게로 투항하여 원소와 다시 적대하였다.[* 당시 동탁 정권은 여포, 왕윤 등 병주계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에 따른 병주계의 회유책으로 보임.] 이에 더해 흑산적의 맹주 [[장연]]은 공손찬과 연합해 부하 두령인 두장을 파견해 공손찬을 지원했고 별도로 [[우독]], [[수고#s-2|수고]], [[백요]] 등 10만의 군세를 보내 원소의 근거지인 위군과 연주의 동군을 공격한다.[* 기주목의 치소인 업이 위군에 있었고, 동군은 연주자사 유대가 기존 동군태수 교모를 죽이고 부하인 왕굉을 태수로 임명했으니 유대의 영역권이다. 유대는 본디 원소가 가족을 맡기고, 공손찬은 기병을 원조해줄 정도로 원소,공손찬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원소의 처자식을 붙잡아 넘기라는 공손찬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공손찬과 갈라서게 되었다. 장연이 이를 격파한다면 하남으로 진출하여 남북으로 원소를 견제할 수 있었다.] 위기에 몰린 원소는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하로 진군했다.(192년 1~2월경) 당시 막 생겨난 신세력이었던 원소는 아직 군의 편제가 통일되지 않았고 군사의 수와 훈련도는 물론 장비와 물자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국의의 활약에 힘입어 회전을 통해 공손찬의 주력이었던 기병을 강노로 무력화시키고 엄강을 전사시키며 승기를 잡았고, 계교에서 이어진 2차전에서 공손찬군을 완전히 박살내는데 성공한다. 참패한 공손찬은 발해로 달아났으며 발해군을 약탈해 초토화시킨 뒤 근거지인 유주로 돌아갔다. 그 외에 동군으로 진출한 흑산적은 왕굉을 격파했으나 이 무렵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삼국지)|조조]]의 활약으로 다시 하북으로 쫓겨났고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았다. 어부라 또한 이때 조조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위군을 공격한 흑산적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별도로 부하장수를 시켜 막아내는 데 성공한 듯 하다. 원소는 부장 최거업을 보내 공손찬을 공격했지만 최거업은 참패했고 최거업을 격파한 공손찬은 재차 기주로 진군해 평원군에 주둔했다. 이후 기주 전역과 연주의 일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192년 12월 무렵, 원소가 용주(龍湊 : 발해군과 평원군의 경계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에서 공손찬을 대파하면서 완전히 기주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이전 장안에서는 동탁이 [[왕윤]], [[여포]]에게 살해되고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조정은 관동 지역에 사절을 보내 각 주군의 관리들이 제각기 전쟁을 벌이는 것을 중단하고 화해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193년 1월, 조정에서 파견한 태복 조기가 하북에 도착하자 공손찬은 원소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썼고 원소 또한 이를 받아들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3년 3월, 원소가 부재중이었던 틈을 위군의 불만세력들은 [[장연]]과 연계해 반란을 일으켰다. 휘하 두령인 우독을 중심으로 흑산의 10개 조직이 참가했고 이에 반란군이 내응하면서 위군태수 율성을 죽여 기주목의 관부가 있는 업을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장안 조정에서 임명한 기주목인 호수를 앞세워 기주를 통치하려 했다. 이때 기주의 여러 관리들은 물론 원소의 일가족도 모두 포로로 붙잡혔으며 공손찬 또한 휴전 약속을 깨고 재차 병력을 보내 침공해 왔으며[* 한진춘추에 인용된 원소의 편지에 따르면 '휴전을 요청해 놓고서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 침입을 알리는 급보가 끊이질 않아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원소와 공손찬의 휴전은 193년 1월에 있었고 장연이 업을 함락시킨 때는 193년 3월이므로 원소의 위기를 틈타 휴전을 파기했다고 보면 들어맞는다. 후한서 유우열전에서도 유우와 공손찬의 대립이 격화되는 계기로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기만 거듭하면서도 계속 원소를 친답시고 백성들을 거덜내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것을 들고 있는데 이 시기가 193년 무렵이기 때문에 공손찬이 원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재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더해 [[원술]] 또한 흑산과 연계하여 군사를 이끌고 원소를 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어부라]]도 이를 지원했다. 이에 지휘부 전원이 패닉에 빠지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원소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며 반격을 준비한다. 우선 [[조조(삼국지)|조조]]를 지원하며 원술의 북상을 저지했는데, 이에 조조는 진류에 침입한 원술을 수 차례에 걸쳐 대파했으며 오히려 원술의 영역권인 예주까지 공격한다. 당시 예주에는 원소의 우군이었던 주씨 형제들도 아직 건재해 있었고 그 남쪽에는 유표가 있었다. 조조와 주씨 형제, 유표 등 친 원소계 군벌에 둘러싸여 역관광을 타게 된 원술은 근거지인 예주를 버리고 회남으로 달아나게 된다. 한편 점령하고 있던 10명의 두령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도승]]이라는 자는 자신의 조직을 이끌고 원소에게 붙어 원소의 가족과 기주의 관리들을 구출하고 직접 호위하며 척구(斥口)까지 호송하는데 이에 원소도 척구로 향해 도승과 합류한다. 같은 해 6월부터 원소는 흑산적에 대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위군의 북부에 있는 녹장산에서 우독을 5일동안 포위 공격하여 1만명을 죽였고 우독과 호수 등도 참수하여 업을 탈환한 뒤 좌자장팔의 무리를 전멸시켰으며 나머지 일곱 두령들도 모두 격파하여 위군 내의 흑산적을 완전히 박멸시킨다. 이후로도 흑산적과의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이 무렵 장안에서 [[이각]], [[곽사]]에게 패하여 쫓겨난 [[여포]]가 원술과 장양을 거치며 원소에게 의탁해 왔다. 원소는 여포에게 부장으로 종군해 흑산과의 싸움에 합류할 것을 명했으며 이듬해인 194년, 상산에서 장연의 본대와 직접 접전을 벌여 승리했다. 장연은 많은 군사를 잃고 도주했으나 원소 또한 오랜 전쟁으로 군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기에 장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 채로 군사를 물렸다고 한다.[* 고대전 사상자의 대다수는 패주하는 군대가 쫓기는 과정에서 생긴다.] 한편 [[여포]]는 공적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며 마음대로 사병을 늘리고 원소의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장안 조정에서 삼공에 준하는 관직을 받았다는 것으로 원소가 임의대로 내리는 관직을 받은 원소의 제장들을 무시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원소는 장안 조정을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했으며 이전 소제 정권의 실세였던 자신에게 그 정통성이 어느 정도 이어짐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장안 조정에서 받은 관직이 정품이고 원소가 상표해서 내린 관직은 짭퉁이라며 얕보는 태도는 원소의 자존심을 직격으로 건드는 행위였다.] 원소 휘하에서 숙청되고 기주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원소와 장연의 전쟁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일부 부족들이 장연과 연합하고 있던 [[오환]]과 [[흉노]]는 이 무렵부터 원소와 화친하기 시작했으며 원소의 조카인 [[고간(삼국지)|고간]]이 병주자사로 임명되어 부임했고 장연은 결국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한다. 상산 전투 이후로도 집요한 군사, 외교적 공격을 받으며 서서히 세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손찬은 원소와 장연이 싸우는 사이 다시 기주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으나 이 무렵 유우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기에 대 원소 전선은 산발적인 침입에만 그쳤을 뿐, 대대적인 확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손찬은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유우와 그 관속들을 모조리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유주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지만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심각한 내상에 시달렸다. 또한 오로지 군사적인 이점만 중요시하는 공손찬 본인의 과격한 성격에 더해 여론 형성의 중심이 되는 기존의 사대부와 식자층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역술인이나 말장사꾼 같은 낮은 계층의 인물들을 관료로 중용하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벌였는데 이 또한 민심의 불만을 더더욱 조장했다. 변경에서의 전투로 잔뼈가 굵었고 또한 학문에도 능하며 매사가 논리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 공손찬이었으니 어쩌면 예를 중시하는 당대의 유가적 가치관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고 그랬기에 실무에 능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공손찬 휘하 관리들의 대부분은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상인이나 역술인 같은 부류였고 이들의 실무적 능력이 뛰어났는지 무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효재와 청렴을 미덕으로 삼지 않던 이들의 부정부패와 치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로 공손찬이 극심한 소화불량을 겪고 있는 사이, 194년 말엽부터 원소는 공손찬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는데 국의를 파견해 공손찬을 공격하는 한편 공손찬과 오랜 적대관계였던 오환, 선비와 연합했으며 유우의 아들인 유화를 전면에 내세워 선전공세에 활용하는 등 공손찬의 반대 여론을 선동한다. 원소의 선동공작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대군, 광양군, 상곡군, 우북평군 등 4개의 군이 각기 공손찬이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고 호응[* 유주는 총 11개 군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중 요동, 낙랑, 현도의 3군 일대는 요동 공손씨 정권의 영역이었고 유주에서 공손찬은 8,9개 군을 점유했다. 단순하게 볼 경우 유주 내의 공손찬 세력권 중 절반이 원소에게 붙은 거다.]했고 [[염유]], [[선우보]], [[숙부환]] 등 수 만 명의 무리가 원소군에 합류하여 총 10만의 군세가 일제히 연합해 공손찬을 공격했으며 195년 12월, 포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공손찬군은 2만명의 전사자를 내며 참패한다. 또한 각 주에 자사로 파견했던 부하들도 모두 이 무렵을 전후로 모두 원소의 수하들에게 패하여 공손찬의 세력은 극도로 곤궁해진다.[* 기주자사 엄강은 이미 한참전에 사망, 청주자사 전해는 [[원담]]에게 패하여 세력을 잃고 공손찬에게 돌아갔고, 병주의 추단은 어느 사이에 세력을 잃었는지 194년엔 어양태수가 되어 있다가 선우보, 염유에게 패하여 살해당했으며 연주의 선경은 기록이 없지만 정황상 다른 원소의 수하, 혹은 [[조조(삼국지)|조조]]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포구 전투에서 패한 이후 공손찬은 이전부터 축조하고 있던 거대요새 역경성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했고 국의는 1년에 걸쳐서 이를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공손찬의 우회공격에 패하여 귀환했다. 195년 무렵 공손찬과 장연은 여전히 당대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벌들이었으나 이는 거듭된 패배로 안팎으로 기반이 불안해진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극도로 집착해 영지를 무제한적으로 수탈한 결과로[* 문자 그대로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았다고 함.] 표면상 전력은 엇비슷할지 몰라도 전형적인 막장테크에 가까운 수준이라 당시 영향력이 기주 전체와 청주의 대부분. 병주, 유주의 일부에 미치고 특히 기주는 내적으로도 통치가 안정화되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한 원소와는 급격히 격차가 벌어져 가고 있었다. 이후 공손찬, 장연을 멸망시키고 하북 4주를 평정했지만 상대적인 전력으로는 이때가 가장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서의 [[이각]], [[곽사]]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자멸테크를 타고 있었고, 중원의 조조는 [[여포]]와 겨우 연주 하나를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 수준이었으며, [[도겸]]에게서 서주목을 양도받은 [[유비(삼국지)|유비]]는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에게 허리를 굽혔다. 형주의 유표는 비록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여전히 원소를 맹주로 받들었다. [[원술]] 정도가 회남에 세력을 다시 형성하며 재기하는 듯 했으나 아직 원술의 기반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 협천자 논쟁 === 195년, 조정에서는 원소를 우장군에 임명했으며 원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이전까지 원소는 장안 조정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해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조정과의 연락을 끊고 수하들 중 장안 조정을 따르는 자는 죽여서 본보기를 보이는 등[* 위서 장홍전에 따르면 장홍은 원소 휘하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던 [[장도]]가 장안으로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원소에게서 본인은 물론, 일족까지 모조리 주살당해 대가 끊긴 사건을 비난하고 있다.]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안에서 파견된 태복 조기의 중재를 명분삼아 공손찬과 휴전을 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황제가 내리는 장군직을 수여받는 것으로 일정수준 타협을 짓고 마무리를 보았던 것 같다. 장안의 황실은 190년 이후로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으나, 관동 지역의 관리들에게 뚜렷한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지방에 부임한 관리들이 각 주군에서 왕과 같았으나, 황제만이 유일한 정치주체로 군림하던 당대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충성의 대상은 여전히 황제였고 제각기 군현에 부임해 있던 지방관들의 지배는 황제의 이름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이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의 기록을 봤을 때 '표를 올려' 자기 사람을 천거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원소, 원술, 공손찬 등의 유력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제각기 자기 사람들을 장군, 태수, 현령 등으로 임명했는데 동탁 등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들은 반란군이었고, 반란군 수괴의 하나가 자기 사람을 천거하는 표를 올렸다고 해서 어떤 직을 하사할 리가 없었으니 처음부터 승인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표를 올려 추천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아무리 유력자라고 그들이 황제가 아닌 이상 일개 하급 속관도 아닌 2천석 이상의 고관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하등의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정한 세력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합법화된 체계가 필요했고, 최소한 합법을 가장한 방식에 의해 관직을 수여하고 관원을 임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실력(=군사력)에 따른 지배만으로서는 이러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 상주하고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 했던 것인데, 조정과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만큼 이러한 임용행위가 승인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엄연히 황제가 존재하는데 자기 임의로 관직을 하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반역자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행보는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그래서 상표하는 형식을 빌려 벼슬을 주는 것이었고, 황제의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임시로 취임해 업무를 담당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물론 이 표는 형식적인 것으로 조정에는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미봉책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워진 것이 중망있는 황족인 [[유우]]의 추대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했고,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였던 유우는 193년 겨울, 공손찬에게 살해되었기에 원소는 별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한 끝에 황실과 타협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해 겨울, 장안에서는 [[이각]], [[곽사]]가 내전을 벌이고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는 사건, 즉 [[삼보의 난]]이 벌어진다. 황제는 이각, 곽사에게 추격당하며 수차례 교전한 끝에 크게 패했으나 결국 이들의 손을 벗어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저수]] 등은 원소에게 황제를 옹립할 것을 권했으나 원소는 헌제의 즉위 과정을 문제삼으며 이를 거절했다. 바로 같은 해에 황제가 내리는 벼슬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다시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장안을 탈출한 헌제의 여정 과정을 살펴보면 이각, 곽사의 거듭된 추격으로 궁핍해진 끝에 수많은 대신이 굶어죽고, 황제가 도보로 걸어다니며 길에서 노숙하고, 심지어는 일개 백성에게 사례교위가 구타당하는 등 극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헌제가 안읍에 체류하고 있을 때, 도적떼 두목들인 한섬, 이락, 호재 등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이들의 사병을 제외하면 헌제가 거느린 병력은 우림, 호분을 합쳐 일 백 명을 넘지 못했다. 조정 백관들의 수도 불과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조정의 힘은 주, 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개 현은 물론, 군벌화한 향리의 일개 종수나 호족[* 각각 향당(享黨)과 종적(種賊)으로 불림. 정도가 심한 곳은 각 마을마다 제각기 민병대로 무장하여 세력을 갖추고 관리의 통제를 거부했다는 말이다.] 세력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전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황제가 어려서 권신이 권력을 농단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래도 조정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권력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었어도 황제의 권위는 지켜졌고 조정의 권력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었다. 동탁의 집권 초기 시점까지만 해도 조정은 권위와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동탁이 황제를 갈아치운 것에 대한 반발로 대부분의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적어도 관중 일대에서만큼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각, 곽사에게서 벗어나면서 황제와 조정은 아무런 실력과 권위도 없는 무력한 존재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천자와 조정의 권위는 도둑떼나 백성들에게는 물론 심지어는 천자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몇 안되는 병사들에게까지 조소당할 정도로 말 그대로 희화화되었다. 반면에 각 주, 군에서는 제각기 군대를 소집해 스스로를 지키며 사실상 자립했고, 각 주목이나 군태수들은 수 천, 수 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관할구역 내의 치안을 유지하며 사실상 군주의 역할을 대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백성과 영토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은 군벌들에게 있었지 황실에 있지 않았다. 원소의 정확한 심중을 알 수는 없지만 헌제의 영접을 거부할만한 몇 가지 이유는 추측할 수 있는데. 우선 동탁이 소제를 폐립하고 헌제를 세울 때 가장 크게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연합군의 맹주로서 지위를 갖출 수 있던 것도 동탁의 진류왕 옹립에 반대하는 명분이 있었던 덕분이고[* 이 과정에서 원씨 친족들이 동탁에게 살해당해 동정여론을 받았던 것은 덤], 그덕에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인데, 도리어 동탁이 세운 천자인 헌제를 옹립하게 되면, 그동안 쌓아왔던 지지기반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게다가 이미 아무런 힘도 없어진 황실을 포섭하게 되면, 세력이 반분하여 행정, 절차적인 소모를 가중시키고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자처하는 파벌이 생겨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원소는 본인의 청류파로서의 명성과 상표하는 형식을 통한 영직을 남발하여 호족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은 원소의 고리에 해당하니 원소에게 충성을 바치겠지만 세력 내에 헌제를 맞아들였는데 헌제가 직접 자기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며 포섭한다면 이들은 더이상 원소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자처할 가능성이 높고 원소는 명분상 이런 자들을 제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원소는 예주출신으로 세력의 수장이면서도 정작 본거지인 기주에서 지역적 기반이 없는 외부인이었기에 이 대립관계에서 기주 출신 인사들이 황제를 등에 업고 기어오른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며, 실제로 [[유표]]의 경우에도 중앙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한숭]]을 보내니 오히려 황제에게 작위를 잔뜩 받고 돌아와선 유표의 부하가 아닌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며 유표의 형주 집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전면 부정해버리며 기어오른 사례가 있었다.[* 더 안습한 것은 유표 입장에서는 당장 한숭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건만 죽이지 않고 연금시키는 것만으로 간신히 분을 삭혀야 했다. 이미 레임덕 수준의 권력만 남아 한숭을 죽였을때 내부적 후폭풍이 감당이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 게다가 훗날 원소와 같은 하남출신이자 원소의 최측근인 [[곽도]], [[봉기]]와 기주의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의 대립이 심각하게 불거져 나오는 걸 보면, 헌제 옹립을 빌미로 조직의 결집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컸다. 상대적으로 [[조조(삼국지)|조조]]는 이런 측면에서는 원소보다 유리했다. 친족 인재를 거의 다 원술에게 빼앗긴 걸로 추측되어 직계 자식(과 조카 고간)을 제외하면 친족 인재가 거의 없는 원소와는 달리, 조조에게는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조씨 집안과 하후씨 집안의 친족 형제들로 장군직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친족 인재가 풍부했으며 근거지인 연주도 고향에 가까워서 '친위 세력'의 구심력을 높이기 쉬웠다. 조조 역시 초창기 세력 형성에 기여하며 세력 내의 지분을 주장할 법한 호족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진궁]], [[장막]]의 반란 당시 싸그리 갈려나가면서 조씨,하후씨를 비롯 고향인 패국 출신의 인사들과 예주 출신의 순욱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친위세력들이 이들의 위치를 손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는 전화위복적인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조조 역시 강력한 친위 세력을 바탕으로 근황을 명분으로 내세운 반발을 억누르는데 성공했을 뿐, 근황이 요인이 된 반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려웠다. 그에 반해 원소는 광범위한 선비들의 지지는 받았지만, 친족과 동향인을 중심으로 한 '핵심 인재'는 애초에 인재풀이 너무 협소하여 능력도 부족했고, 광범위하게 펼쳐놓기에는 숫자도 적었다. 원소가 헌제를 받아들였을 때, '원소의 막부'와 '헌제의 조정'이 양립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서 오는 마찰을 이겨내기에는 원소 집단의 응집력은 상당히 약했을 것이다. 유우처럼 원소 자신이 명망 있는 황족을 옹립한다면 이 약점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지만, 유우처럼 '명망만 높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능력한 황족'은 그리 쉽게 찾기 어려워 유우가 제위를 거부하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원소가 협천자를 거부한 것에는 이런 이유에 더해 슬슬 장차 황제에 오를 생각을 품던 본인의 야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황실이 처참할 정도로 몰락해 있었기에, 이를 방치하여 헌제가 혼란 속에서 살해당하거나 [[객사]]하면서 한황실의 맥이 끊기는 것. 즉, 비유하자면 중화문명의 구심점이었던 주나라가 완전히 멸망해 춘추전국시대가 재림하는 상황이 소위 문명 붕괴 이전의 '애국열사'이자 내전기의 '영웅'으로서 당대의 정치,군사적 명망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원소에게는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 조조와의 대립 === 195년, 천자가 장안을 탈출하자 저수 등이 원소에게 천자를 옹립할 것을 권하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조조는 재빨리 헌제를 옹립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인 허현으로 천도하여 조정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헌제는 원소가 강병을 거느리면서도 왕실을 구할 마음은 없고 자신의 도당을 키우기에만 힘쓴다며 원소를 꾸짖는 내용의 조서를 보낸다. ~~ 없다 못해 새로 세울 계획까지 한 사람인데.. ~~[* 당연히 천자의 명의를 통해 대놓고 원소의 근원적인 치부인 유우 추대 건을 건드리는 것은 원소에게 치명적이지만 조조로서도 이미 원술,유표와의 대립이 표면화된 상황에서 최대 군벌인 원소를 대놓고 자극하면 답 안 나온다.] 이 조서의 배후에는 조조가 있었고, 조정의 위상을 통해 그동안 갑을관계에 가까웠던 원소와의 제휴관계를 뒤집고 재설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원소는 장문의 상소문을 쓰며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헌제와 그 측근(조조 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들의 무능함을 강하게 비난하는 등 격렬히 반발했지만 끝내 천자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진 못했고, 조조는 이에 만족했는지 조정에 상표하여 원소를 태위로 삼고 자신은 대장군의 지위를 차지한다. 천자를 옹립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의 부하에 가까웠다. 조조를 동군에 자리 잡게 한 것도 원소였으며, 연주목으로 승인해준 것도 원소였고, 원소가 공손찬과 싸울 때 조조는 원소에 의해 동원되었다. 원술을 막을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으며, 도겸을 칠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다. 여포에게 연주를 뺏긴 것도 장막이 조조가 원소의 지시를 받아 그를 해칠까봐 두려워 선수를 친 것이었고, 여포,장막과의 싸움에서는 원소의 원군이 아니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위는 군사상의 최고위직이었지만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권은 대장군에게 있었다. 조조가 대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이에 "조조가 번번히 패할때마다 나는 그를 구해줬는데, 이제는 천자를 끼고 나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크게 분노했다고 하며 병을 핑계로 태위의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원소의 반응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이는 마침 협천자에 실패한 [[원술]]이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천자를 자칭하여 조조와의 대립 의사를 확고히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예주의 허현 일대를 도읍으로 삼으면서 인접한 [[유표]]와의 대립도 표면화되고 있었기에 원소를 지나치게 자극하여 적으로 돌릴 경우 적대세력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형국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실리적인 조조가 허울뿐인 관직에 집착하는 원소를 가지고 놀았다는 해석이 많지만, 그랬다면 조조가 관직을 독식하는 것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군벌 시대였다지만 군사력만으론 권력을 유지할 수 없고 후한의 사회체계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관직=권한=정치적 명분이기에 합법적인 지배체계를 통해 효율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관직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원소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양보한 것에 더해 하북 4주의 도독을 겸하도록 하고 [[구석]]의 일부[* 석(錫)의 궁시(弓矢)와 부월(節鉞), 호분(虎賁 = 호위병) 100인. 이는 구석의 6,7,8번째에 해당하는데, 부월은 사법적 재량권, 호분은 신변불가침을 비롯한 면책특권, 궁시는 언제든지 역적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상징이었는데, 법령에 따라 관할 구역 내 2천석 고관의 사형까지 집행 가능한 지절까지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관할구역인 하북 4주 내에서는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다.]를 내리는 등 파격적인 특권을 내렸는데, 이는 황제의 이름으로 원소가 황제 다음가는 최대의 실력자임을 공인함은 물론이며 [[살인 면허|관할 구역 내에서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를 보장한 것이다. (197년 3월.) 뿐만 아니라 원소 최대의 [[주홍글씨]](...) 인 유우 추대의 이력은 자연스럽게 흑역사로 묻혀졌으며, 오히려 원소의 유우 추대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원소의 최대 경쟁자 [[공손찬]]을 역적으로 선포해 공식적으로 목에 현상금까지 거는 등, 의외로 조조의 협천자는 원소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조조 입장에서도 이는 원소가 좋아서 줬던 게 아니라 사세상 원소와의 전면적인 대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득이하게 굴복하면서 원소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미 조조가 협천자와 동시에 원소에게 이빨을 드러냈던 것은 명확했고 양자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원소는 더 나아가 허도의 지반이 낮고 습해 침수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수도를 자신의 세력권과 인접한 견성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조도 이런 요구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협천자를 통해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정의 영수격이 되었으며, 이에 맞서 후한 조정을 전면 부정하고 독자적인 칭제건원으로 대응하던 원술을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는데,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원술은 비록 회남에서 재기하며 자리잡은 기반이 아직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후한 조정이 조조를 중심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진 여전히 내전기의 핵심 군벌 중 하나였다. 원술이 조조와 손잡은 여포에게, 그리고 조조에게 연달아 가루가 되도록 참패하면서 애당초 유동적이었던 지지세력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에 따라 통치력이 확고히 미치진 못했으나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펼치던 세력권이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는데, 비록 조조는 같은 시기에 형주에서 할거하며 대립하고 있던 유표를 제압하는데는 실패했으나, 이는 사건은 조정의 영수로서 각지의 반역자를 토벌하고 나라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구호를 내걸던 조조의 위상에 엄청난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당대의 유력자들이 게임에서처럼 제각기 자기 주군이 천하를 통일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내전기라는 인세에 강림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라는 대안이 훨씬 설득력있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실제 조조의 협천자와 원술의 몰락 과정을 전후해 예주와 형주 북부에서 독자적인 군벌세력을 갖추고 있던 [[이통]], [[허저]], [[누규]], [[장수(삼국지)|장수]] 등이 조조에게 귀부했는데, 특히 이들 중 누규와 장수는 유표의 후원을 통해 세력을 형성한 인물들이었다. 장수의 참모였던 [[가후]]는 조조가 유표를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원소보다 세력이 미약했음에도 조조에게 투항하길 유세하며, 조조는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니 마땅히 따라야한다는 것으로, 세력의 강약을 떠나 조조의 승리를 전제했으며, [* 장수가 말하길 "원소가 강성한데 조조는 약하고, 또한 우리는 조조와 원수가 되었는데, 어째서 따라야 하오?"라 물으니, 가후가 "이것이 바로 조공을 마땅히 따라야 하는 까닭입니다. 무릇 조공은 천자를 받들어 천하에 호령하니, 그 마땅히 따라야 되는 첫째입니다. 원소는 강성한데 우리는 군사가 적어 그를 따른다 해도 필히 우리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조공은 군사가 약한데 우리를 얻게 되면 필히 기뻐할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두 번째입니다. 무릇 패왕의 뜻을 가진 자는 진실로 사사로운 원한을 풀어버리고 사해에 덕을 밝히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의심치 마십시오." 보면 알겠지만, 가후의 발언에서 장수가 원소가 아닌 조조에게 붙어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조조가 천자를 받들고 있다.' 는 것이 핵심이다. 조조가 세력이 약하니 지금 조조에게 붙으면 후대할 것이라는 두번째 이유와, 패왕의 뜻을 가진 자는 사사로운 원한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세번째 이유는 '천자를 받드는' 조조의 승리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면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유표는 조조의 침공을 선방한 뒤 원술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칭제하면서[* 대놓고 일을 크게 벌리다 실패한 원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는지, 대외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를 자처하는 외왕내제에 가까웠다.]내부의 불만세력을 억누르려 했지만, 몇몇 군사적 실패와 함께 결과적으로 이를 억누르는데 실패하면서 식물군주로 전락해 맥없이 무너지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부분으로, 조조의 협천자와 이에 대응하던 원술의 몰락을 기점으로 시대적 패러다임 자체가 점차 '내전기의 영웅' 원소가 아닌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를 주도하는 '한나라 조정의 수장' 조조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 원술의 칭제가 딱히 병신짓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부분으로 오히려 '황제' 원술이 조조에게 군사적으로 승리하거나 최소한 선방하면서 세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한황실이 여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각인시켰다면 각지에서 황제를 자칭하면서 [[오대십국시대]]의 양상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이 당시 원소는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서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하는데, 비록 황제와 조정을 통해 세력기반 내에서의 확고한 권력을 공인받게 되었다곤 하나 중앙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속하며 파격적인 권위를 부여받는 모양새는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에게 섣부른 공세전략을 펼치지 못하도록 강제했고, 세력 외부에서의 입지 또한 조정을 장악한 조조에 비해 불리해지면서 조조의 급성장을 견제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이 시점의 원소는 어마어마한 관직을 통해 세력기반 내의 정치적 합법성을 보장받아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해졌다는 이득은 있었지만 원소의 일개 부장 수준에 가까웠던 조조가 원소와 견줄 정도로 급격히 팽창하던것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원소의 세력 확장은 거의 정체에 가까웠다. 한편 원소는 북방 전선의 핵심인물이었던 [[국의]]를 숙청하고 잔당들을 병합했으며[* 197년 무렵으로 추정], 원담을 청주자사, 원희를 유주자사, 고간을 병주자사로 삼아 일족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고히 한다. [[전풍]]은 원소에게 조조가 남양에서 유표와 대치하는 틈을 타 배후를 치고 허도를 장악할 것을 권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8년 5월의 일로 당시 유표와 반년째 대치하고 있던 조조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싸움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당장은 원소가 거절했다고 하나 대치가 더 길어질 경우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역경성에 틀어박혀 배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던 공손찬을 정리하기 위해 출병한다. === '''[[관도대전]]''' === 199년 3월, 해를 넘긴 공성 끝에 역경성을 함락시키고 공손찬의 무리를 병합해 하북 4주를 평정한 원소는 수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교만해져 조정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조조는 공손찬과 은밀히 연합을 체결하고 원소의 근거지인 업을 쳐서 역경성의 포위를 풀고 원소를 견제하고자 하내군에 북상했으나 공손찬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면서 원소가 조조의 의도를 파악하자 다시 황하를 건너 철수했다.[* 헌제춘추] 이 무렵 원소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자 [[원술]]은 원소에게 제호를 바치며 투항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원소는 여기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원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하며 배송지 주로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이때 원소가 참칭할 뜻을 품고 주부 경포를 시켜 제위를 칭할 것을 간하도록 말을 맞춰 자작극을 벌였으나 다른 부하들이 요사스러운 말을 한 경포를 죽여야 한다고 하자 즉시 경포를 죽이며 의혹을 풀었다고 한다.[* 원술의 칭제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원소와 유표가 모두 칭제를 계획했던것은 결국 칭제를 통해 독자적으로 권위를 세우지 않는 이상 이상 조정의 작위를 받고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고, 조조가 황제를 장악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급격한 이변이 없는 이상 시간이 갈수록 자신은 서서히 약해질 뿐 득될 것이 없기 때문. 그렇다고 대놓고 조정을 무시하는것은 이제는 조정에서 받은 작위를 통해 얻은 자신의 정당성을 그 스스로 부정하는 격이라 내부의 반대파를 양산한다.] 원소가 기주로 돌아와 대대적으로 조조를 칠 계획을 세우자 감군 [[저수]]는 연이은 원정으로 창고가 비어 황폐하고, 전쟁의 성패는 당장의 강약에 있지 않으며,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조와 싸우는 것은 천자를 적대하는 것이니 의롭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조조와의 단기 결전을 반대하고 지구전을 주장했으나, [[곽도]]와 [[심배]]등은 하삭의 강역을 차지한 자군의 역량이 조조의 몇 배에 달하고, 지금 조조를 치지 않으면 훗날 도모하기 어렵고, 병력은 천자와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역적 조조와 그 일파에게 향할 뿐이라며 반박하고는 저수의 말은 패배주의적 발언이며 저수가 번번히 군주와 뜻이 충돌하는데 그가 맡고 있는 감군의 권력은 지나치게 강하니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원소와 저수의 정치적 대립관계를 배제하더라도 곽도의 말은 사실이다. 후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인구 기록을 봐도 원소가 장악한 하북 4주보다 조조가 장악한 4개 주의 인구수가 훨씬 많기 때문. 원소군의 물량 이미지 자체가 과장되었거나, 비교적 일찍 행정체계가 안정화되면서 전란으로 인한 집계 유실이 최소화되어 조조보다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일텐데, 저수의 말대로 당장의 강약을 배제한다면 오히려 조조 세력의 잠재력이 앞서게 되는 것이 사실. 저수가 비운의 모사로 곽도는 아첨꾼으로 폄하되면서 저 발언이 저수의 혜안과 원소에게 영합하는 곽도의 아부성 발언으로 여겨지나, 엄밀히 따지면 내용 자체는 곽도의 [[팩트폭행]](...)에 가깝다.] [* 저수의 구체적인 발언 내용을 살펴보면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천자에게 승첩의 사실을 보고하고,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십시오. '''만약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조씨에게 우리의 왕로(王路)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연후에 진격해 여양에 주둔하여 차츰 하남에 군영을 짓고, 선박을 더 제작하며 군수물자를 수리하고 나서,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주변 지역을 초략하여(중략) 3년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인데 경영에 힘쓰며 하북 4주를 다스리는 관리로 조정에 순종하면서 지내다가, '그것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 조건부로 조조를 치자는 말이고, 그조차도 전면전이 아닌 초략이나 하자는 소리다. 물론 원소에게 조정의 관리 노릇으로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저수,전풍의 진언은 말이 좋아 지구전이지 사실상의 반대의사나 마찬가지인 것.] 이에 원소는 감군을 폐하고 삼도독을 세워 기존 저수의 권력을 곽도,순우경과 삼분하도록 했다. 한편 [[유비(삼국지)|유비]]가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점거하자 원소는 유비와 연합하여 기병을 보내 지원했다. 조조가 유비를 치자 전풍은 조조의 배후를 칠 것을 진언했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우금전에 따르면 조조가 유비를 치는 사이 우금이 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연진을 지키며 조조의 부재를 틈타 내려온 원소를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기존 통설과 상충되나, 원소전에서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곽가전과 무제기에서는 원소가 의심이 많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원소 본대의 전면적인 남하가 아닌 소수 병력을 통한 견제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망명해 오자 원소는 업성에서 2백리 밖까지 마중나와 성대히 환영하며 남정을 시작했는데, 이는 헌제의 친위 쿠데타였던 [[동승]]사건에 가담한 유일한 생존자가 유비였기 때문이다. 동승 사건은 1)반란의 주체가 헌제였고, 2) 임신 중이던 동귀비를 포함해 7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간 대숙청으로 조조보다 세력비상 당장의 강약은 앞서지만 그 잠재성은 뒤떨어지고, 그렇다고 섣불리 칼을 빼들자니 여론의 반발을 살 것이 극명했기에 마땅한 명분이 없어 고심하던 원소의 우려를 단숨에 뒤집고 정상 질서의 복귀를 내걸던 조조와 허도 정권의 패러다임 전체를 뒤엎을 파급력을 가진 대사건이었는데, 이에 더해 동승 사건의 주요 가담자인 유비가 원소에게 망명하며 명분을 원소에게 가져다 바치는 상황은 원소로서는 더 없을 최고의 호기였기 때문.[*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전략,전술적 판단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겠으나 조조의 협천자 앞에 세력이 공중분해된 원술이나 정권 내 친황제,친조조 세력에 끌려다닌 끝에 식물군주로 전락해 맥없이 흡수된 유표 세력과 달리 원소 세력은 조조는 악랄한 간신으로, 원소의 포지션은 충신열사로 포장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정당성을 확보했고, 이것이 관도대전 패배와 원소의 급사, 개판 후계구도라는 최악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잔존세력의 사상적 구심점으로 남아 오랫동안 격렬한 저항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치공학적 정교함이나 개전 타이밍 자체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잡은 신의 한수에 가깝다.] 견해에 따라서는 원소가 조조의 배후를 대대적으로 치지 않은 것도 유비가 조조에게 패망하고 귀순할 것을 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체한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헌제를 옹립하고 있던 조조를 역적으로 규정할 개전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며, 원소는 유비를 영입하자마자 곧바로 남하를 시작했고, 신참자인 유비를 극도로 후대함은 물론 관도전투에서도 전면에 내세웠는데, 이때 전풍이 재차 지구전을 주장하자 원소는 전풍이 군의 사기를 꺾으려 한다며 크게 분노해 형구에 채워 가뒀다. 원소는 여양에 주둔하며 [[안량]], [[곽도]], [[순우경]]을 선발대로 보내 동군을 공격케 했다.[* 원소전에는 저수가 안량의 무모한 성격을 근거로 안량의 단독 투입을 반대했고, 원소가 이를 거부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다른 기록과 상충된다.] 조조는 순유의 조언을 따라 연진에 군세를 보내 연진에서 원소의 측면을 공격, 이에 반응한 원소가 연진 방면으로 도하하는 사이 백마를 공격해 안량을 격파하고 그를 참수한다. 안량을 참수한 조조는 연진으로 향했으나 원소가 이미 연진 도하에 성공한 상태였기에 동군을 거점으로 한 방어를 포기하고 관도 일대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 원소는 [[문추]]와 유비를 보내 보내 조조를 추격하게 했으나 문추는 조조의 계략에 걸려 전사한다. 원소군은 비록 황하 일대의 도하거점을 확보하고, 조조의 방어선을 후퇴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명장으로 이름난 안량, 문추가 전사하면서 사기가 크게 흔들렸다. 이때 저수는 연진에 머물면서 관도에 따로 진영을 구축하여 관도에서 패배할 때를 대비해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원소는 이를 무시하고 관도에 전력을 집중했으며, 진언이 무시당한 저수가 군중에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자 진노하여 저수의 군권을 더욱 축소시킨다. 군세를 전진시킨 원소는 양무에 본진을 두고 조조와 대치했으며 양군은 제각기 수십리에 걸쳐 진지를 구축한다. 원소는 회전을 벌여 조조를 격파했으나 후퇴한 조조가 진지를 지켜내는 것에 성공하면서 전황이 장기화된다. 원소는 조조의 관도 본진에 맹공을 가하는 한편 조조의 후방인 예주에서의 반란을 선동했으며 이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한다. 유비는 [[유벽]]등과 연합해 허도를 공격하려다 은강에서 조인에게 격파되어 원소에게 돌아갔으나, 예주는 이통이 다스리는 양안군을 전 지역에서 원소에게 호응한 세력들이 강세를 이뤘고, 이에 원소는 재차 유비를 여남으로 파견한다. 조조가 원소군의 공격을 버티면서 군량을 습격해 수 천 대를 불사르는 일이 있었다. 이때 추가 군량이 호송되자 원소는 [[순우경]]에게 1만을 주어 호송케 하였다. 이때 저수가 원소에게 장기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추가로 엄호하여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소는 조조를 관도에 몰아붙여 전세를 매우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원소 세력 내부의 정쟁과 장기화된 전선에 대한 의견대립의 결과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해 순우경군의 배치 등 주요 기밀들을 누설하면서 오소에서 숙영하던 순우경군은 조조의 기습을 받게 된다. 오소의 습격 사실을 파악한 원소는 오히려 주전력이 빠져나간 조조의 본진에 주력군을 배치해 공세를 강화하고, 오소의 순우경군은 기병대만을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했다. 순우경군이 전열을 유지하며 버텨내는 사이 기병으로 조조군의 후열을 공격해 무너뜨린다는 계산에서 나온 결정으로 보인다. 원소의 예상대로 조조의 습격에 맞서 싸우던 순우경군은 정말로 전열을 유지하며 잘 싸웠다. 어느정도냐면, 조조 찬양일색인 진수의 삼국지 무제(조조)기에서도 오소에서 조조와 순우경과의 접전은 가장 치열한 전투로 묘사되고, 조조는 전투 후 포로로 잡힌 순우경을 포섭해 등용하려고 할 정도였다. 조조군은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순우경군을 궤멸시켜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고 종국에는 순우경군이 붕괴되었다.~~모루 박살~~, 조조는 전열을 재정비해 막 도착한 기병대까지 격파한다. 순우경군의 전멸과 운반중이던 군량의 전소로 원소군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책임 소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자 주력군을 이끌고 조조의 본진을 공격했던 장합, 고람은 도리어 아군을 공격하고 진영을 불지르며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 고람의 배신으로 군이 대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전선을 버리고 단기로 달아났으며, 총사령관의 생사까지 불분명해진 원소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장합,고람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황을 파악한 조조가 반격에 나서자 원소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대다수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저수같은 핵심 간부도 달아나다가 포로로 잡히게 된다. 원소는 조조의 추격을 피해 황하를 건너 여양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고, 여양을 지키고 있던 [[장의거]]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아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고 패잔병을 수습해 상당수의 병사를 모았으나, 돌아가지 못하고 조조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모조리 학살당했다.[* 그 숫자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진수의 기록에서는 병사들이 거짓항복해서 '모두' 파묻어 죽였다고만 하고, 장번의 한기에서는 포로로 잡아 파묻어 죽인 것만 8만명이라 하나 헌제기거주에서는 앞뒤로 참한 것이(=전사자를 포함한 관도대전 전체의 원소군 총 사망자가) 7만이라고 하며 후한서에서도 앞뒤로 8만이 죽었다고 한다. (사망자 중 포로로 잡혔다가 살해당한 비율이 높긴 하지만) 살아 돌아가지 못한 병사가 7,8만에 가까웠다는 게 사실에 가까울 듯.] === 말년 ===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참패하자 기주의 수많은 군현들이 조조에게 투항하는 등 원소의 위상은 심각하게 흔들렸으며, 조조 역시 --찬탈을 하려는 군벌들끼리 사이좋게-- 원소가 과거 황제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던 전력이 있는 역적이라며 비판했다. 원소가 관도에서 참패하자 원소의 남정을 반대하던 전풍과 저수가 돋보였는데 저수의 경우 조조에게 붙잡혀 죽었으므로 전풍의 거취만이 문제가 되었다. 어떤 이는 원소가 패하고 돌아오자 전풍에게 당신의 말의 맞았으니 중용될 것이라고 했으나 전풍은 "우리 군이 승리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지만, 패하였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고, 원소는 측근들에게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과연 웃음거리가 되었다." 며 그대로 전풍을 죽였다고 한다. 선현행장에 따르면 원소의 병사들은 가슴을 치면서 전풍의 말대로 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울부짖었고, 원소도 전풍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으나 전풍과 사이가 나쁜 봉기가 "전풍은 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자신의 말이 맞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라고 참언하자 원소가 전풍을 죽였다고도 전해진다. 손성은 이를 평하여 저수와 전풍을 보니 그들의 계책을 씀은 진평과 장량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어두운 임금을 만나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연의에서는 원소가 전풍을 죽인 동기로 이 기록을 채용하며 전풍이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취합해 원소의 암군포스와 전풍의 폭풍간지를 강조한다. 엄청난 공을 들인 원정의 참패로 대규모 반란이 이어지는 등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표적인 반전파였던 전풍의 입지 강화가 위험하다고 판단, 적당한 핑계를 붙여 숙청했다는 시각도 있다.[* 명백한 증거가 없으니 완벽한 가설은 아니라고도 하지만 전풍은 이미 원소 밑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경력과 명망이 상당했고 관도대전 시점까지도 기주별가로 세력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거물이었으며 관도 패전 직후 시점에선 병사들이 모두 "전별가 말만 들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탄식했을 정도로 주가가 올라가 있던 상태였다. 이런 인물을 죽인 사건에 대해 정치적 숙청설을 굳이 배제하고 감정적인 이유만으로 처형했다고만 보는 시각이 오히려 이상하다.][* 후배격으로는 북벌에 참패하고 돌아와서는 오히려 대숙청을 벌인 [[제갈각]]의 케이스가 있는데, 패전 후에 벌인 두 사람의 행동양식은 본질적으로 같다. 제갈각은 암살당하면서 스스로 벌인 숙청의 뒷감당을 못하고 역관광을 탄 반면 원소는 오히려 자신의 독재권력만큼은 더욱 공고히 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엔 원소도 급사로 후계구도를 날려먹어서(...) 아무래도 큰 의미를 주긴 어렵다.] 군사를 수습하고 하북으로 돌아간 원소는 201년, 반기를 든 군현들을 모조리 쳐서 제압하며 다시 세력 기반을 굳건히 했으며 재차 원정에 나서 조조를 칠 것을 계획[* 순욱전에서 확인]하지만, 이듬해 5월 병이 들어 피를 토하고 사망.[* 위지] 관도 2년 후인 202년이었다. 다량의 피를 토하고 죽었고, 유언조차 남기지 못해 심배가 원소의 유명을 조작했다는 기록을 봤을 때 원소의 죽음은 급사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며, 소화기 계열의 급성 출혈로 인한 쇼크사로 보인다. '군이 패한 이후 병을 얻어 건안 7년(202년)에 근심으로 죽었다(憂死)' 는 삼국지의 기록을 따르면 발병 원인은 스트레스로 추정. === 사후 === 본디 원소는 장남 [[원담]]을 미워해 폐출시키고 자신의 뒤를 잇지 못하도록 못박았으며, 총애하던 막내아들 [[원상#s-1|원상]]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원상은 나이가 어렸던 데다 원소의 급사로 전혀 후계 기반이 갖춰져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결국 나이가 많고 경력도 있는 원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 원소의 세력은 분열되게 된다.[* 원담의 막장성을 볼 때 단순히 경력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다. 일단 원담에게 붙은 사람이 곽도인데, 심배와 곽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원소 세력의 핵심을 이어받은, 기주의 원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청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원담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원주의 조카로서 병주를 다스리던 [[고간(삼국지)|고간]]마저 사실상 독자행보를 걷고 할거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원소 세력은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내분은 원소가 급사한 것이 첫 번째 이유지만, 장자 세습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당대에서 막내를 그것도 미성년자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차라리 둘째 [[원희]]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면 문제가 덜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원상도 나름대로 잘 해줬고 원희가 지목되었어도 원담과는 싸웠을 확률이 높기에 모르는 일이다.] 결정적으로 원소가 원담을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게 허락한 것이 실책이다.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사람 목숨을 가볍게 만든다. 원담은 동생도 아니고 형인데, 원담이 아예 서자라서 내친 거라면 모를까, 한 배 자식인데 막내에게 밀린 상황이면 원담 입장에서도 최소가 허수아비, 심하면 목숨이 날아가니 내전은 거의 예정된 거나 다름 없다. 당장 저수가 원담을 청주 자사로 보낼 때 강력하게 반대했고, '''재앙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정사 원소전.] 결과적으로 저수의 통찰이 맞았다. 원담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결국 원가의 분열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원소 본인이 통찰 못한 것은 아니었겠으나 일단 기존의 질서나 가치관을 쥐뿔만큼도 개의치 않으며 자기 편할 대로 써먹던 사람이므로 관습이나 위험성 따위는 거리끼지 않고 자신의 계산을 믿었을 것이다. 원소 입장에서 보자면 원담만 임명한 것이 아니라 원담, 원희, 고간이라는 친족 3명을 자신이 맡고 있는 주 외의 나머지 3주에 파견함으로 삼국시대 심심찮게 일어나던 반란을 원천봉쇄하여 내부영토의 지배권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피튀기는 정벌과 재정벌, 학살로 내부 지배권을 다진 조조와는 달리 어느 정도 토호들과 정치적으로 얽혀 있던 원소였던 만큼 불필요했던 조치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상대적인 것이다. 이 시대 지방세력 동의 없이 통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풍과 저수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지만 원소는 내부가 자기 입맛대로 돌아가도록 대단히 신경을 썼다. 이 이후 원소는 당연히 조조를 이길 줄 알았을 것이고, 자신이 급사할 줄도 몰랐으니 조조를 이겨서 예주, 서주, 예주와 사예주 일부를 차지하면 원담, 원희, 고간이 1주씩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원소가 급사하자 저수가 통찰한 재앙의 씨앗들이 터지며 상황이 최악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원소가 사망할 당시만 해도 원소의 세력 자체는 조조보다 강대하였으나, 원상과 원담 간의 집안 싸움과 조조의 개입 속에서 점차 소모되어 원담과 원상은 각각 조조에게 각개격파당하여 원담은 살해당하고, 원상은 유주의 원희에게 망명하지만 원희도 곧 토벌당해서 도주한다. 원상과 원희는 원소의 [[사위#s-1|사위]][* 양녀를 시집보낸 것이기는 하다.]인 [[오환]]의 왕 [[답돈]]에게 망명하여 재기를 노리지만, 조조의 정벌로 오환이 패망하고 답돈도 죽음을 맞는다. 이 와중에 병주의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한 뒤 배신을 하려다가 토벌당해서 역시 패망했다. 최종적으로 원상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강]]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동시에 공손강을 살해하고 요동을 기반으로 삼을 음모를 꾸몄으나, 공손강에게 살해당하면서 원소의 잔당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원소의 죽음(202년)에서 원상의 죽음(207년)까지 고작 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외형적으로는 원씨 일족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관도의 패전 이후 흔들리던 상황에서, 원소의 죽음으로 [[초촉]], [[장남(삼국지)#s-1|장남]], [[여광#s-2|여광]], [[여상#s-3|여상]] 같은 무장들의 배신이 잇달았다. 그나마 [[장합]]은 명령에 따라 싸우다가 입지가 꼬이게 되자 우발적으로 선수를 쳐서 배신했지만, 아예 포진 다 마치고 조조와 회전을 벌이기 직전 상황에서 배신을 때려 군을 와해시키거나([[마연]], [[장의(삼국지)|장의]]) 원상을 습격해서 내쫓은 뒤 군사, 행정을 장악하고 조조에게 항복하는(초촉, 장남) 등은 계획적으로 배신을 했다. 이는 원소의 카리스마와 권위가 압도적이었음을, 그 세력의 체제가 원소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다란 1인 독재 체제였음을 반증한다. 그렇게 커다란 카리스마를 지닌 원소가 폭발하고야 말 불씨를 남긴 채 떠나자, 원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결국 원소 세력은 1인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건재할 때는 한없이 잘나가지만, 반대로 1인자가 잘못된 결정을 하거나 갑자기 없어지게 되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몰락해 버리는 독재체제의 강점과 한계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 평가 == 자신의 정치적 카리스마로 삼국지의 시대를 개막하고, 죽을 때까지도 최강이었던 세력을 만들고 죽은 걸물. 하지만, 삼국지에서는 연의와 정사를 가리지 않고 일반적으로 악평을 받는다. 이는 원소가 병사하기 몇년 전에 실수를 많이 했으며, 인격적으로도 그리 바른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원소는 [[동탁]], [[원술]], [[유표#s-1|유표]]와 나란히 역적 열전에 올랐고,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원소를 유표와 비슷한 부류의 인물로 평가했는데, 그 평은 다음과 같다. ||<bgcolor=#E9ECEF>동탁은 사람이 비뚤어져 계통이 없고 잔인하고 포학하며 비정했으니,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이와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당시 명성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는 범증(范增)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 본전도 그렇지만 긍정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동탁과 원술의 열전을 분리하고 원소와 유표를 같은 열전에 배치했는데 그 평은 다음과 같다. ||<bgcolor=#E9ECEF> 원소는 본디 호협을 숭상하여 무리를 얻었으며, 마침내는 웅패할 계책을 세웠는데 당시 천하에 날랜 병사를 일으킨 사람들 중 원소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동탁 집권 당시 전국의 궐기를 의미) 전장에 임해서는 과감히 결단하며 맞섰기에, 용맹한 무인들이 앞다투며 목숨을 바치게 했고, 깊은 꾀와 빼어난 의론으로 지혜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기울게 했다. 참으로 성대하구나! 하지만 한비자에 이르길, 군주가 모질고 비뚤어져 아랫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강포함이 지나쳐 억지로 굴복시키기만 좋아하며, 적자를 가벼이 여기고 서자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멸망의 징조라고 한다.(= 한비자 망징편의 말로 원소는 여기에 딱 들어맞기에 실패했다는 뜻.) 유표의 도리는 이를 넘어서지는 않았으나(= 원소처럼 모질고 강포하진 않았다는 의미) 단지 편하게 누워 천운을 거두길 바라고, 천하가 삼분된다 헤아렸으니 나무인형과 같은 인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원소는 용모가 준수하고 유표 또한 학자다운 풍모가 있었다. 원소가 황하 이북에서 영웅이라 칭하고, 유표는 장강 이남을 마음대로 하니 한수의 물고기떼와 같은 것은 (형주의) 군선들이고, 구름처럼 모인 것이 기주의 군마들이라. 원소는 참위로서 왕위를 넘보았고(=199년의 참칭미수사건), 유표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동시기의 교천제), 성패는 이미 하늘께서 정하신 일이라고도 일컫지만 또한 사람이 벌이는 일이기도 하다. 원소처럼 스스로의 강인함만을 믿는 자가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며, 유표같이 좌담만 즐기는 자에게선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적자와 총아를 두고 방황하니, 몸은 무너지고 사업은 망하였구나. || 범엽은 원소의 재주가 매우 대단하다며 감탄하면서도 한비자의 말을 인용해 원소를 비판했고, 스스로의 강인함에만 의존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덧붙이는데, 범엽이 평가하는 원소는 유능하고 강인하지만 타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이끄는 독선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원소유표열전은 긍정적인 기록이 없다시피 한 진수의 전기와 달리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적당한 비율로 나오는 편이고, 사평 또한 나름대로 거물다운 무게감을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원소와는 달리 가루가 되도록 [[유표]]의 사평은 그저 지못미다.~~ 원소와 유표는 둘 다 미남(...)이었고 한 지역의 강자로 오랬동안 군림해 해당 지역에서는 사실상 황제에 가까운 위세를 떨쳤다는 점, 장자를 배척한 결과 훗날 창업자의 사후 후계 분쟁으로 세력이 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두고 비슷한 인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수가 두 사람의 장단점을 하나로 묶어버린데 비해서, 원소는 과단성이 있지만 비정하고, 유표는 원소처럼 모질지는 않았으나 그에 비례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차이점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원소는 카리스마 있고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독재자 스타일의 인물이자,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주자라는 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 현대의 평가 == 현대 삼국지 사가에서는 젊은 시절의 정치적 행보나 하북 평정 과정은 한 두줄로 요약해버리고, 관도대전 무렵의 삽질을 부정적으로 조명하는 인물이다. 특히,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작정하고 꼴통화시키면서 안습으로 전락했으며 현대에 들어와 조조가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한 지도자로 부각되면서 라이벌인 원소는 [[수구꼴통]]이나 우유부단한 찌질이 기믹을 맡게 되었다. 조조를 추켜세우려면 라이벌을 높게 평가해야 조조의 가치도 높아지는 거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후세인들이 역사를 읽으면서 현실에 대한 은유로 대입하고 싶은 욕구에 기인한다. 즉 역사인물에 대한 절대평가가 아니라, 역사를 읽는 인물이 현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프레임을 반영시키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소는 '''승리자'''인 조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폄하되어왔고, 현대인들도 원소를 조조보다 뒤처지는 수구꼴통으로 다루려고 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원소는 어리석고 용렬한 소인배 느낌인데다, 대다수의 미디어에서 신나서 덤벼들어 되도 않는 분석이랍시고 까기에 적합한(...) 명문가 타이틀도 지니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찌질이로 왜곡하기 편했다. 전통적인 삼국지 문화에서 원소는 흔히 '귀족주의에 쩌들고 사람을 명성과 신분으로만 판단하며 귀가 얇고 판단력이 흐린 [[암군]]' 정도로 평가되었고, 관련 창작물에서도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혹은 어느정도 유능하지만 보수적이고 한계가 뚜렸한 인물로 여겨져 조조, 유비 등 삼국시대 주요 [[네임드]]들과의 확연한 클래스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비교대상으로 취급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팬덤 내에서는 2010년대 전후부터 작지만 꾸준하게 [[재평가]] 논의가 나오는 추세이며, 본 위키의 해당 항목도 이런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 정치적 능력 === '''독보적인 삼국지 정치력 끝판왕, 폭넓은 인간들과 대의명분을 이용할 수 있었던 희대의 정치가.'''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행렬로 거리가 마비되었다는 영웅기의 기록이나, 지혜있는 선비들은 원소의 계책과 의론에 매료되었으며, 용맹한 무사들은 원소의 과감성에 목숨 바치기를 서로 다퉜다는 범엽의 평,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계층에서 원소를 흠모했다는 헌제춘추의 기록 등을 보면 원소는 쇼맨십에 대단히 능했고, 개인적으로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년상 등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으로 야권세력인 청류파의 [[아이돌]](...)로 군림했던 초반의 행적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이는 보수적인 인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소의 정치력과 대의명분을 통제하는 능력은 삼국지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며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독살맞은 정치인'''이었다.[* 당시 시대상을 보아야 한다. 원소는 서자도 아닌 노비 어머니에서 태어난 얼자다. 그런 그가 돋보일 수 있는 것은 고행으로 유명한 6년 동안에 시묘살이다. 오늘날에도 돋보이는 선행을 한 사람이 그 가치를 인정 받듯, 원소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원소는 그 시기 합당한 일을 한 것이다.] 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으니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으나, 양부와 적모의 6년상으로 효자를 자처했고,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고 반란을 부추겨 정작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을 제물로 바쳤다. 이후 20년 간의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며 '''사실상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후한과 친족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원소의 이런 행보는 관이 극도로 부패하던 영제 치하의 분위기 속에서 청렴한 효자로 칭송되며 정치적 거물로 인정받았고, 동탁이 아무런 명분 없이 황제와 태후의 폐위라는 전례 없는 폭거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전국적인 호응을 받고 동정표[* 원술에게 쓴 서신에서 보이듯 스스로를 은근히 [[오운|오자서]]에 비유하면서 그 행보를 포장했다.]까지 더해졌으며 원소는 스스로의 입지를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소위 '''애국열사''' 로서 확고히 포장했다. 원소 자신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메었다기보다는, 영제의 금권정치와 [[당고의 금]]으로 대표되는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로 호족사회 내에서 원리주의적이고 교조적인 [[도그마#s-1|도그마]]에 가깝게 변질되어 있던 충효의 개념을 '''자신의 정치적 영달이라는 목적에 맞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철저하게 이용한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청류파 인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영제 사후 십상시를 위시한 [[환관]] 세력들에 대한 원소의 공세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하태후]]가 [[십상시]]를 비호하는 상황에서 1)보정대신 하진은 직접적으로 하태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2)하태후는 '''십상시의 파직을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목적 아래 [[정원(삼국지)|정원]]을 시켜 수도의 요지인 맹진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며 정보를 통제해 이를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 [[영제#s-2|영제]]와 십상시가 주도한 대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했다. 동탁 등 지방의 장군들을 소집한 것은 '흑산적의 위협'이라는 음모론을 조작하고, [[계엄령]]에 가까운 공포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한편 십상시의 축출이 성공한 뒤 [[동#s-1|동탁]] 등과 합세해 흑산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불만여론을 환기시키려는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하진]]이 암살당하고 정국이 요동치면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마땅한 부분이나, 씁슬하게도 훗날 [[공손찬]]이 찬표소죄상을 쓸때 이 일을 간단히 언급하며 원소를 비난한 것 외에는 의외로 비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원소의 지지층은 더욱 결집했으며, 원소 스스로도 십상시를 척결한 것을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선전했다(…). 현대에서도 삼국지 초반부를 가볍게 읽은 사람들은 진작에 십상시를 쳐죽이면 되지 왜 뜬금없이 지방 군웅들을 소집하냐고 멍청하다고 비난하지만, 원소가 어떤 이유로 외부의 장군들을 소집했고, 구체적으론 무슨 일을 꾸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원소가 보였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극단적인 추진력(…)과 맹진항 사건같은 잔혹한 [[패륜]]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의미로는 후한말 호족사회의 위선성과 영제가 벌인 폐정의 결과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나쁘게 보면 시대가 낳은 [[괴물#s-1|괴물]]이며, 좋게 보면 시대의 풍운아. 이러한 원소의 입체적인 모습은 라이벌인 조조와 비슷하여 오히려 [[조조(삼국지)#s-1|조조]]의 비윤리적 행보를 강조하기 위해 잘 표현되지 않는다. 동탁과 정원으로 대표되는 지방 군벌을 불러온 것조차도, 사실 궁극적으로 원소에게는 그리 큰 손해는 아니었다.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 정국이 몇 차례나 [[시소]]를 탄 끝에 어쩌다보니 운 좋게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동탁이 중앙군을 흡수해 권력을 잡게 되는 상황까지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지지기반 없이 권력만 잡은 동탁이 권력 독점을 위해 연이은 무리수를 던져 중앙이 개판이 되는 난세는 자신의 명망을 이용하여 엄청난 세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동탁에게 너만 칼이 있느냐고 호통치던 [[패기#s-1|패기]]는 결코 [[허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소는 자신이 나서면 동탁의 허수아비 정부 쯤은 압도할 만한 전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을 것이며 이는 실제로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후한#s-1|후한]]은 사실상 멸망해버렸지만'''. 십상시 → 동탁 → [[한복(삼국지)#s-1|한복]] → 공손찬 → 조조로 이어지는 라이벌 구도에서 대의명분을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방의 정치적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던 모습은 특기할 만하다. 여기서 조조를 제외하면 모두가 철저히 능욕당했고, 비록 원소 본인은 조조에게 패하고 세력이 사라졌으나,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정립한 '조조 = 천자를 겁박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의 프레임은 끈질기게 남아 [[유비(삼국지)|유비]]가 충실히 계승한다. 과거 한헌제의 정통성을 대놓고 부정했고, 한때 스스로 칭제를 계획했던 원소 본인의 이력이야 어쨌든간에 이 논리에 따르면 원소는 한의 대장군으로 '간적 조조'와 싸우다 죽었으니 마지막까지 '충신'으로 남은 셈. 이런 식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야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에 가깝지만 훗날 다 털린 [[원상#s-1|원상]]이 오환으로 달아날 당시에 10만 호가 따르고, 유비 또한 원소의 논리를 계승, 발전시키며 유용하게 써먹은 것에서 볼 수 있듯 최소한 지지세력의 결집에는 유효했고,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와 맞서려면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원술]]은 여기에 칭제로 맞대응하다가 거하게 말아먹었고, [[유표#s-1|유표]]는 [[외왕내제]]식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결과적으론 내부 호족들과의 주도권 경쟁 끝에 식물군주로 전락했다.] [[위선자]]라는 평가는 이미 당대에도 범람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후관대한 겉모습 때문에 당대에 원소를 추종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원소는 당대에 보편적인 모범으로 여겨지던 유교적 가치관에 더해 현인에게는 지식을 무인에게는 과감성을 무기로 추종되었듯 여러 계층에 따라 제각기 다른 미덕을 보이고 인정받으며 광범위한 추종자를 얻었으나, '희노의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고 평해지듯 진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실제 행적으로도 단물이 빠지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코에이 삼국지 플레이어~~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미덕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야 쉽지만 원소가 어떤 식으로 6년상을 지내며 효자임을 인정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섬찟한 인간성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괴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정치력 만렙. 시세를 읽고 명분을 만들어 세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정치력은 삼국지 내에서 비길 사람이 없다. === 행정적 능력 === '''호족, 군벌 억제를 통해 제왕적 통합을 추구했으나 급한 병사로 인하여 결과를 보지 못한 독재자.''' 원소는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적인 [[군주론]]에 입각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호족과 세력가들은 숙청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유화적인 선전 책략을 매우 잘 썼다. 이런면에서 원소는 제왕적 통합주의, 조조의 엘리트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원소는 보편적인 통합을 중시하는 황제적인 전략을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외교면에서 조조와 원소를 굳이 나누자면, 조조는 평판이 나쁜 독재자들도 괘념치 않는 [[러시아]]적인 외교술, 원소는 막강한 소프트파워와 도덕주의로 여론을 휘어잡으면서 뒤로는 나쁜 독재자들을 잘 써먹고 제거하는 [[미국]] 정도의 외교적 차이를 보인다. --유비처럼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앞에 세우고 나쁜 놈들은 잘 써먹다 죽였다.-- 여러가지로 원소와 비슷한 인물은 조조였지만, 조조가 '친인척과 능력자 위주의 친목'에 특화되어 군벌활동에 유리한 성격이었다면, 원소는 '통합주의적 제왕의 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심지어, 원소는 이런 통합적 시야를 통하여 당시에 이미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국가를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은 [[만렙]]에 가깝지만, 강역 내에서의 실제적인 통치 능력은 특정한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상을 그리기 어렵다.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혼재하는데, 부정적인 기사로는 조조가 원상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 뒤 기주민들에게 내린 포고령에 따르면 원소의 정치는 방만해서 호족들의 발호가 심했다고 하며, 곽가전에 언급된 십승십패론에서 곽가는 한나라의 정치가 지나치게 관대해서 망했는데, 원소는 관용으로 그르쳐진 정치를 관용으로 바로잡으려 하니 답이 없고, 사나움으로 바로잡아 위아래가 제각기 분수를 아는 조조의 통치가 훌륭하다고 평했으며, 왕수전에서도 원소의 비호 아래 권세가들이 재물을 많이 축적해 심배의 재산이 억대에 달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긍정적인 기사로는 [[순유]]가 원소는 평소 한족과 [[오랑캐]]를 아우르며 널리 은혜를 베풀었으니 비록 (조조가) 하북을 점령했지만 진심으로 이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진언한 순유전의 기사가 있으며, 헌제춘추에서는 원소의 정치가 관후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고, 원소의 통치가 미치는 하북 4주의 지체 높은 [[사대부]]로부터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막론하고 원소를 흠모해 불평하는 목소리가 없었으며, 원소가 죽었을 때는 온 도시의 저자가 통곡과 비탄으로 마비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 부모상을 치르는 백성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괴담집인 [[수신기]]에는 도삭군 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원소가 사후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던 흔적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든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든 관용과 은혜로 다스린다는 평가는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러 정황을 봤을때 협천자라는 강력한 권위를 통해 [[둔전]]제와 병호제 등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조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토호들과의 느슨한 연립체계에 가까웠고, 그만큼 권력이 분산되어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진 못했던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호평을 받은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이 그럭저럭 운용되었고, 명색이 은혜와 관용을 내세웠던 만큼 빡센 수탈은 없었던 듯. 일반 백성들 기준에서 당장 동탁, 조조, 원술, 공손찬 등과 비교할 경우 [[성군]]이 맞을 것이다(...). 곽가가 원소의 정치를 까면서 조조를 치켜세우긴 했지만 자영농의 몰락과 예속화, 토호의 귀족화와 지배층의 부패라는 후한말의 시대적 흐름은 조조가 세운 위왕조에서도 이어졌고 조조는 이를 막지 못했으며,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는 [[구품중정제]]로 오히려 박차를 가해 위왕조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은 서진왕조에서 정점을 찍고 당나라때까지 쭉 이어진다. 이후 조조는 원소의 잔재를 없애려 했는지 원소의 본거지 [[업군]]의 인구를 대규모로 타지로 이주시키고[* 이렇게 강제 이주당한 백성들은 사실상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자신을 따르는 측근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수도 조성 사업'을 감행했다. 조조의 세력은 여러모로 원소의 업적을 흡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원소의 통치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데, 은혜와 관용을 내걸었다곤 하나 이것도 연이은 군사적 성공으로 안정적인 강역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뒤에나 그랬던 것으로 보이고, 궁핍했던 초반에는 잘만 약탈하고 다녔다.[* 계교전투 무렵 공손찬이 발표한 찬표소죄상에서 이런 원소의 행태를 비판했는데. 원소는 아예 날을 정해 번갈아가며 군현을 노략질했으며 상납을 거부하는 호족들은 명망이 높든 전에 고관을 지냈든 상관없이 감금, 고문하며 돈을 뜯어냈다.] 또한 196년의 협천자 논의부터 시작해 관도대전에서 정점을 찍은 원소와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과의 격렬한 대립과 곽도를 필두로 하는 예주 출신 인사들의 대두는 어리석은 암군 원소와 현명한 충신 저수, 전풍. 간신 곽도, 봉기의 구도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었으나 최근에는 원소의 권력 강화에 따른 토호세력 숙청과 일족, 친위 파벌 육성을 통한 정치체계 개편으로 보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후한서를 쓴 범엽의 관점도 굳이 치자면 이쪽에 가깝다. 물론 범엽의 관점은 정치체계 개선이라는 거창한 해석보다는 권력을 탐하며 [[숙청]]을 일삼는 [[독재자]]의 그것에 가깝게 보며 비판하는 것이 정확하다. === 군사적 능력 === '''전략적 개념에서는 단 한번도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았던, 정치와 전략을 연결한 만렙 책략형 군주.'''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모두 삼국지에서 독보적인 만렙을 찍은 군주였기 때문에, 두가지 능력의 시너지를 통해서 당당한 군벌로 성장했다. 심지어 선입견과는 달리, '''원소는 조조, 유비, 손견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오합지졸 군대로 자신보다 훨씬 큰 군벌들을 연파하며 최강의 세력으로서 키워냈다'''. 물론 초기에는 순수한 군사적 승리보다 책략을 동원한 승리에 가깝지만 [[손자병법]]을 본다면 어떤 의미로 가장 똑똑한 지휘관이었다. 원소는 관도대전의 패배로 머릿수만 믿고 밀어붙이는 이미지로 과소평가되지만, 군사적 재능은 동시대 군벌들 중 매우 뛰어난 편이다. 오히려 원소는 불리한 정세에서 극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보인 인물이며, 관도대전 이전까지의 활약상은 '''보기에 따라서 오히려 조조를 압도한다'''. 4개 주에 영향력을 떨치던 공손찬을 오히려 불리한 전황에서도 수차례 무찔렀고, 관도대전에서도 오소 이전까지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전략적으로 조조를 완전히 몰아넣었다. 다만 사람들이 오소 습격 이후의 모습만을 기억해서 문제다. 반동탁연합 해산 시점까지 원소의 입지는 군사력이 아닌 여론의 지지 뿐이었다. 즉, 명성만큼은 높았으나 실제 세력은 미약해 자력으로 군세를 유지할 역량조차 없이 한복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독자적인 군벌로 보기에도 애매한 군사력만 있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원소는 문관 출신으로 시어사를 사직한 뒤 호분중랑장과 중군교위를 역임하긴 했으나 실전 경험은 전무한 정치군인에 가까웠다. 흔히 책상물림으로 여겨지는 [[왕윤]]이나 [[공융]]조차 당시의 원소보다 군사적 커리어가 훨씬 나은 상태였다. 이렇게 군사력이 부족했던 원소를 지원했던 한복은 동탁에게서 원소에 대한 통제, 감시역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원소를 후원한 동기는 여론이 원소에게 있으니 그를 후원하는 것이 얻을 것이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원소가 반동탁연합의 맹주로 추대된 것도 연합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반동탁 연합군은 소득 없이 해산되었고, 이 시점에서 한복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원소는 더이상 이용가치가 떨어진 [[바지사장|얼굴마담]]이자 제대로 된 군사력도 없는 정치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끌어들여 한복을 대파하고 그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복이 크게 약해졌다고 해도, 원소는 아예 제대로 된 군벌이라고 부르기엔 경험 자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원소는 한복과 공손찬을 싸움 붙여서, 한복의 주력이 공손찬에게로 향한 사이, 장양과 어부라 등 다른 기주 군벌들을 신속히 격파, 병합하여 군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물론 애초에 군세의 자력 유지가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더욱 수를 늘렸으니 일단은 허장성세에 가까운 오합지졸이었다. 당황한 한복의 측근들은 원소를 열흘 안에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했지만, 한복으로서는 얕보던 원소가 당장 저리 커버렸으니 원소에게 전력을 집중했을 때, 공손찬이 남하할 경우 결국 동귀어진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원소는 '''한복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와서,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흔히 원소가 지닌 계략의 주도면밀함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하나, 기본적으로 장양, 어부라의 신속한 격파, 병합이라는 군사적 능력까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장양이나 어부라의 세가 원소보다 뒤떨어졌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원소는 한복에게 메여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당시 장양은 단독작전으로 상당을 공략해 수 개 현을 점거하고 군사 수천을 추가로 얻는 등 작지만 소소하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한복의 측근들에게서도 장양과 어부라의 귀부 군세가 그나마 원소의 유의미한 정예 전력이지만 막 병합되어 제대로 힘을 내기 힘든 군대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후 원소는 계교전투에서 공손찬을 격파한다. 물론, 위 문단에서도 나오듯이 이때 원소의 군대는 시원찮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런데 원소는 단순한 군사수의 차이, 편제, 숙련도까지의 압도적인 열세와 막장으로 치닫는 대내외적 정치상황이라는 악재 속에서, 회전 한차례로 공손찬을 완파하고 전세를 반전시켰다. 당연히 공손찬도 당대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기에, 금방 세력을 수습하여 재공세로 전황이 장기화됐다. 하지만 원소는 용주에서 또다시 공손찬을 대파해 기주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급조한 군대를 가지고도 국경의 정예군들에게 연승을 거둘 정도면 원소의 군재와 책략이 무시받을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진 장연과의 대결에서는 아예 근거지를 완전히 함락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심지어 장연이 장안 조정의 관리를 통해 지배 공고화에 들어간 상황에서, '''원소는 공손찬과의 전쟁을 막 마친 군세를 이끌고 귀환해, 성을 끼고 항거하는 우독의 1만 군세를 5일만에 전멸시켰으며''', 다시 산을 타고 넘어가면서 험요지에 주둔한 군세를 상대로 공격을 거듭해 이들을 연이어 패퇴시키고는, 상산으로 쭉 올라가 장연의 본대까지 털어버렸고, 패주하는 장연을 추격하는 시점에서야 군사들이 퍼져서 물러났다. 이런 원소의 군사적인 업적들은 제대로 조명되기는 커녕 언급되는 일조차 없어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원소가 당시에 급조한 군대를 이끌고 한복-공손찬-장연으로 연달아 벌어지는 불리한 대립구도에서 빵빵 터트린 극적인 군사적 성공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는 천재적인 수준이다. 이후 원소의 대규모 군사 운용은 198년의 역경 공략 이전까지 확연히 줄어드는데, 이미 한복 파벌은 저수를 제외하고 모조리 숙청되었으며, 공손찬은 용주에서의 패배 이후 유우를 격파하고 세력을 만회하려 했지만 유화를 앞세운 원소의 공작과 유우 잔당들의 봉기로 내상을 심하게 입어 그 자신은 역경루에 틀어박힌 채 각지에 파견된 자사들이 원소의 수하들에게 각개격파당했고, 장연은 패하여 그 많던 무리가 와해되었다는 기록 뿐이지만, 수십 개에 이르는 연립세력의 맹주라는 특성상 장연 본대의 참패로 극심한 내부 분열을 피하기 어려웠을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점의 원소는 직접 대규모 기병에 나서 현장을 통제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기주는 그나마 안정되어 있어 다른 주들과 다르다는 저수의 발언[* 후한서 원소전], 원소 세력의 압도적인 물량 이미지 역시 결국은 초반의 연이은 군사적 대성공을 통해 통령체계를 빠르게 설립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손찬이나 원술 같은 인물들이 다스리던 영역에서 백성들이 굶어죽다 못해 인육이 횡횡하는데도 더더욱 수탈에 열을 올렸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싸울 때마다 전쟁에 지고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단지 군사력의 증강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자 그들 자신의 생명줄이 되어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점점 과격해지는 북한의 [[선군정치]]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지나친 도덕적 옹호라고 여길 수 있지만, 원술은 서중응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말로가 좋지 못할 것임을 이미 한참 전에 정확히 예견했으면서도 끝까지 학정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원술이 주색과 향략에 빠져 있던 것은 차라리 [[현실도피]]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며, 공손찬 역시 정신병적인 편집증 증세를 보였는데, 원술과는 방향성이 다르게 나타났지만 근본적인 동기 자체는 비슷할 것이다.] 계교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상산에서 장연을 격파할 당시 부장으로 종군하던 [[국의]]와 여포의 활약상이 부각되다 못해 원소는 한 게 아무것도 없고 국의와 여포가 독자적으로 공손찬, 장연의 대군을 격파했다는 식으로 심심찮게 발전하지만, 계교전투 당시 국의의 병력은 800명[* 단 국의는 한복 소속의 장군이었고 강족 전술에 능하다는 기술, 그리고 공손찬의 선발 기병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돌진해서 기병대를 역으로 헤집는 것을 보면 이 800은 단순한 800명의 징집병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정예 부대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고대 군대에서 대개 이런 집단은 강력한 유대의식이 있는 경우가 많고 이 군대는 국의가 개인적으로 인솔하는 친위부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대에서 이런 군대는 정말 머릿수에 비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원소가 한 거 없이 국의가 혼자 다 싸운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안량-문추 이상(뭐 기록도 없고)으로 공손찬과의 대결에서 크게 활약한 것은 국의였다.], 상산전투 당시 여포의 병력은 기병 수십기로, 기록에 나타난 이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공손찬의 기병을 유인해 무력화시거나, 연속적인 기동으로 장연군의 전열을 교란하는 보조적인 활약에 그쳤다. 물론 국의와 여포가 회전에서 본대 싸움이 벌어지기 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은 맞지만, 이들을 기용하고 포진한 것 역시 지휘관의 능력이고, 애초에 회전에서 전세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여포와 국의가 아니라 결국 원소가 이끄는 본대의 역할이다. 사실 관도대전의 패배 역시도, 전투에서의 전략, 전술적 능력의 부재라기보다는--한방을 노리다가 [[역관광]]-- 평소 그의 제왕적, 유아독존적 태도로 인해 유발되던 불합리와 휘하 인물들의 충성심 저하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오소 사건을 기점으로 선을 넘으면서 한번에 터져나온 정치적인 문제가 크다. 고작 기습으로 무너진 것이니 능력을 확신할 수 없다는 축도 있지만 애초에 장합, 고람이 이끌던 군이 조조의 최후 거점인 관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을 볼 때 그 규모가 작았다고 판단할 수 없고, 경계가 이루어지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갑작스러운 반란이라는 점, 혼란을 지속시키기 위해 영채에 불을 지르고 조조 측에 투항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오히려 이걸 멀쩡히 수습하는 쪽이 세기의 명장이지--세기의 명장은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제껴두고-- 수습 못한 원소가 무능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전술가 중 하나로 꼽히는 조조[* 전략가로 표기되어 있는데 조조는 거국적인 관점에서 대전략을 유지하는 쪽보다는 국지적인 전투에서 우위를 보이는 야전 지휘관에 가깝다.] 역시도 원소에게 패배한 정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더더욱. 군사적 능력 자체는 대단히 우수한 편에 속하지만 최소한 관도대전 당시에는 '''성질 급한''' 모습을 곧잘 보여주고 주의력이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일례로 원소는 연진으로 향한 조조의 의군에 낚여 본대의 도하 장소를 연진으로 설정하며 안량 등을 고립시켰는데, 원소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 기록에서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당시 선봉의 포진은 안량, 곽도, 순우경 등의 올스타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고 숫자상으로도 1만 이상의 대군이었으며, 지도를 살펴보면 연진에서 백마로 향하면서 조조를 포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를 살펴보면 원소의 구상은 안량 등의 선봉대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그 사이 연진을 확실히 점거함으로서 혹시 모르는 배후 공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백마의 안량과 합류하며 안량을 치러 들어간 조조를 역포위할 수 있으니 오히려 조조의 의도에 낚여주는 척 [[일타쌍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안량이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원턴킬 나면서 결과는 시궁창(...) 관도대전의 명운을 가른 오소전투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소가 넘어갈 경우 보급에 치명타를 받는 게 뻔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본진의 공세를 강화했으며 오소의 원군으로는 기병대만을 파견했다. 이 역시 기동성을 중시한 포진으로 조조가 순우경과 싸우는 사이 조조 본대의 후열을 박살내고 주력군이 빠진 조조군 본진도 정리하는 일타쌍피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고, 이번에도 조조가 순우경군을 먼저 박살내면서 결과는 시궁창(...) 그나마 순우경의 경우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관우|원턴킬]] 났던 안량과 달리 간발의 차로 지긴 했다. ~~원소 : 아니 그걸 왜 못해?(선수들이 답답한 천재 감독)~~ 이런 행보에 대해서는 정규군 10만을 동원한 장거리 원정이라는 군벌시대 당시로서는 유래 없던 일을 벌였던 데다, 내부적으로는 전풍, 저수 등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시키는 초강수를 두며 거창하게 원정을 시작했던 만큼 전쟁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었다는 분석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선을 끝까지 지켜내며 변화를 기다리자는 순욱의 진언 또한 이 과정에서 전쟁이 길어질 경우 언젠간 터지게 될 원소군 지휘부의 내분 요소를 순욱이 간파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전략상의 대립+정치적 문제 등으로 허유가 이탈하면서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본다.~~순욱 : 원소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더 잘났을뿐~~ 또한 저수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고도 하나 [[황하]] 도강 이후 저수의 헌책들은 특별히 대단하다기 보단 세심하게 수비와 경계를 보강한다던가, 혹은 안정적으로 공세 전략을 유지하는 상식선의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원소는 이런 충고들을 모두 거부했는데 그 또한 많은 전쟁을 겪어온 사령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 가지고 외부 경계를 강화하자는 상식선의 조치들을 무시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 경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일종의 [[방심]]이라고 보는게 더 타당할 듯[* 조조도 말년에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계교 전투에서도 본대와 떨어져서 앞서나가다가 다 이긴 판을 공손찬군의 역습으로 죽을 뻔한 전력이 있다. 공손찬 상대로는 특유의 뚝심과 과감한 역습으로 위기를 헤쳐나왔지만 관도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이것이 질래야 질 수 없었던 관도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조조가 오소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굳이 본진을 공격할 이유도 없었고 조조의 오소 습격만 확실하게 막아내고 전세만 유지했어도 충분히 이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성급하게 본진 공격을 지시하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고 여기에 세력 내부의 인사, 정치적인 문제가 터지면서 1선 사령관들의 이반으로 이어진다. [[유비(삼국지)|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삼국지)|조조]]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핑게대며 지원을 늦게 해주는 바람에 유비가 패망했다는 점을 들어서 고작 가족의 병 때문에 거병하지 않은[*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소규모 부대를 동원해서 황하 건너의 교두보 확보를 시도해 보긴 했다. 그런데 [[우금]]이 워낙 잘싸워서 역관광...] 원소의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반박이 만만찮은데, 범엽에게 겉으로 본심을 비친 일이 없었다고 평해졌듯 원소는 기본적으로 자기 감정을 곧이 곧대로 드러내는 인간이 아니고, 더욱이 과거 원씨 일족이 동탁에게 몰살당할 것을 알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역이용한 전적이 있던 원소의 행적까지 봤을때 '자식이 아프다'는 구차한 핑계는 그야말로 군대를 일으키기 싫어서 내놓은 변변찮은 핑계에 가깝다. 또한 당시 시점에서 보자면, 원소는 서주와 유비의 지원에 그리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는 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의 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다.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즉,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멸망시킨다고 해도 불리해지는 것이 전혀 없다. 원소가 유비를 홀대해야 할 이유는 오히려 '전후처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조조를 적대하는 유비가 세력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조조와 직접 교전한 공적이 있는 유비의 정치적 발언력은 크게 올라간다. 조조와 직접 교전한 공적은 유비에게 돌아가며, 원소는 그저 유비를 지원한 것으로 격하될 위험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 주를 지배하는 유력 군벌로서 유비가 응당 받아야 할 정치적 댓가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원소는 '전후처리'에서 유비에게도 어느 정도 지분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거기다 조조 패망이 확실해지면 유표까지 끼어들 것이 분명하여 원소는 '승리의 과실'을 독점할 수 없게 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해서 이기면 유비, 유표에게도 상당한 관직을 앉혀주고 원소도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궁극적으로 '원소가 주도하는 국가'를 만드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원소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자세력만으로도 조조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유비'따위'를 동맹으로 끼워서 '승리의 과실'을 나눠줄 필요성은 없다고 판단내리는 것이 무리수는 아니다. 원소는 충분히 유비의 1은 조조에게 일단 줘버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세력 4로 조조의 세력 3.5를 전부 삼키는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반 정도는 맞았다. 결국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원소로서는 아주 잘 풀린 셈인데 서주를 차지한 유비는 존중해줘야 할 대상이지만 객장에 불과한 유비는 그저 실권은 전혀 주지 않아도 상관없기 때문. 사실 원소 입장에서는 유비가 조조에게 죽어버려도 '명분'은 이미 얻었으니 상관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살아있는 유비보다는 죽은 유비가 나중에 귀찮지 않으니까 그쪽을 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따지고 보면 한복의 기주목 양도를 위해 장양과 어부라를 격파, 병합해 세를 늘렸지만 장양,어부라의 병합은 물리적인 격파 자체보다는 교섭이 주된 이유였고, 그조차도 역시 실질적인 전력증강에는 일절 도움이 안 되는 한복과의 협상용 패였으며, 업성 탈환 역시 전과 자체로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보이긴 했지만 결국 도승으로 대표되는 흑산적 두령들 사이의 내부분열과 이를 이용한 각개격파에 가깝고, 후기 공손찬과의 전투 역시 대대적인 선전공작을 통해 싸그리 털어먹은 뒤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을 형세의 우위를 통해 소모전으로 압살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조조처럼 전투 자체에 강한 장군이라기보다는 정치,전략적 개념의 연장으로 전쟁을 접하는 정치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원소 자신은 자신이 참전한 모든 전투 중 계교전투를 가장 기적적인 대승[* 원소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은 196년에 헌제에게 쓴 상소문과, 197년에 공손찬에게 보낸 편지인데, 두 글 모두에서 자신이 참전한 수많은 전투중에서도 계교전투가 가장 기적적이고 값진 승리라 언급하고 있다.]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모략을 좋아하며 과감성이 없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국지적인 과감성은 보였을지 몰라도, 형세 자체가 극도로 열세해 사실상 회전을 강제당한 계교전투나 절묘한 판짜기로 조조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생각 외로 전선이 고착되면서 조급증이 극에 달한 관도대전 후반의 모습 정도를 제외하면 전투 자체를 통해 형세를 결정짓기보단 대체로 모략을 통한 형세의 우위로 이미 짜여진 각본 안에서 날로 먹는 전개를 선호했기 때문.[* 곽가는 원소를 평가하면서 일은 많이 벌여놓는데 요령이 없고, 결단이 늦어 후수를 두고, 허장성세를 좋아해 용병의 요체를 모른다며 극딜했는데, 아마 이런 성향의 단점일 것이다. 잘 풀리면 치밀한 모략으로 상대를 옭아매어 이미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결정지은 뒤 압도적으로 확인사살하는 전개가 나오지만, 안 풀리면 살을 주고 뼈를 깎는 군사적 결단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잃는 것 하나 없이 잔꾀로 해결하려다 결국 문제만 더 크고 복잡해지는 전개가 되기 때문. [[십상시의 난]]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애꿏은 양민들이 원소에게 학살당하고 하씨일족과 십상시 등 엮인 사람들까지 싸그리 죽는 수준을 넘어 결과적으론 나라 전체가 풍비박산났다. 원소 본인이야 그 와중에서도 이런저런 잔꾀를 부려 가문이 멸족당하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오히려 명분과 여론의 지지라는 정치적 자산만 잔뜩 챙겨서 최대의 실력자로 자리잡았으니 궁극적으로는 손해라고 여기지도 않았겠지만(...)--궁극의 쓰레기--] === 용인술 === '''좋은 결과로든 나쁜 결과로든, 제왕적 독선주의와 카리스마로 숙청을 자유롭게 구사한 정치가.''' 구습을 타파하며 유재시거를 외치던 개혁가 조조 vs 사람을 신분이나 명성으로 판단하는 수구꼴통 원소라는 식으로 왜곡하기도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구현령은 제도적인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구호에 가까웠고, 원소는 한족 기준에선 오랑캐 수령인 답돈을 사위로 맞은 데다, 조조 측의 사람인 이통에게서 도적이나 강도 같은 무뢰배들을 임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며 비판받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이는 완전한 허상에 가깝고, 실상은 사료가 괴멸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비교가 어렵다. 오히려 원소 자신의 직속 측근이 법령을 어기자 이를 처형한 뒤 보고한 견초를 문책하지 않고 기특하게 여기며 높게 평가했다는 일화가 견초전에 남아있기도 한데, 이런 일화를 보면 꼰대스럽기는 커녕 공명정대하고 대인배스러운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일화성 기록을 배제하고[* 사실 이런 류의 세세한 일화는 견초의 일화를 제외하면 남아있지도 않다. 훗날 위왕조에 종사하며 전기가 남을 정도의 활약을 펼친 견초의 인생 전반부에서 중요사건이라 기록이 남았을 뿐, 진수가 딱히 원소에 관심이 있어서 기록한 게 아니기 때문.] 전반적인 행적에서 용인술과 인사관리 측면을 살펴봤을때 기주 입성 이후부터의 원소는 혈족중시+ 자신의 정치적 명성과 권력에 모여든 구름같은 무리들 중 적당한 인물을 필요한 곳에 뽑아 쓰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곧바로 숙청하고 다른 적당한 인물을 뽑는 식의 인사--갑질--를 반복한다는 인상이 유난히 두드러지는데, 권력자의 혈족중시 경향이야 조씨,하후씨의 요직 독점까지 갈 것도 없이 동서고금 무론하고 만국공통이지만, 숙청의 경우 그렇게 괴멸적으로 기록이 적은 가운데 사서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만 주한,장도,유훈,동소,여포,장홍,국의,경포,전풍,저수 등 측근으로 활약하다 숙청당하는 기록이 남은 인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당대 군벌들 중 도무지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정원,동탁,조조,유비,원술 등 내노라하는 군벌들 통수를 치며 배신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여포를 단물만 빨아먹고 통수친 용자라는 점에서 그 클래스를 알만하다.-- 충성경쟁을 조장하기 쉬운 이런 인사는 조직을 경직되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지만, 그만큼 우두머리의 권력은 천하무적이 된다는 이점이 있었고, 원소 자신도 이를 의도한 것으로 보이나 관도대전 패배를 결정지은 장합의 배신이나 관도 패배 이후 세력 내의 전국적인 반란에서 보이듯이, 외부적 요소 때문에 자신의 카리스마가 무너진다면 내분으로 헬게이트를 열 가능성이 높았다. 원소 자신은 군사,정치적인 노회함으로 번번히 위기를 극복했고, 관도 패전 이후에도 무수한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면서 오히려 신격화에 이를 정도로 세력기반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으나, 원소가 죽고난 뒤 후계자가 이런 카리스마를 대체하기는 어려웠고, 여기에 원소가 급사했다는 것, 원상의 나이가 어렸다는 것, 폐출된 원담이 후계에 도전했다는 것, 원상의 후견인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 하필이면 전략적 식견도 포용력도 전무한 심배였다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소 식의 인사에선 심배 같은 부류의 예스맨이 권력 핵심에 남기 쉽다.] 것 당연하게도 이를 틈탄 조조가 쳐들어오는 등의 몇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최악으로 흘러가 사실상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종합해 보면 권모술수에 능하고 위선적이며 부하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용인술인데, 동탁,공손찬,여포,원술,유표 등이 특정 계파를 지나치게 무시해 반발을 사거나 혹은 지나치게 중시하다가 오히려 휘둘리거나 통수를 맞는 것과 비교하면 조직관리의 측면에선 확실히 낫다고 볼 수 있고, 기존의 질서나 가치관 따위는 쥐뿔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권력에만 몰두했던 만큼 인재를 보는 기준은 도적떼의 무리조차 거리낌없이 임용한다고 비판받았듯 권력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의 합리적(?)인 관점이지, 신분과 명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혈족중시 경향, 무수한 친정을 통한 군사적 권위 확보, 열사 이미지를 통한 정치적 권위 확보, 폭넓은 인사 임용,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내부 인사에 대한 가차없는 숙청과 견제, 지속적인 측근 교체와 충성경쟁 유도 등, 궁극적인 목적이 본인 1인으로의 권력 집중/강화라는 측면에서 조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 도덕성 === '''보여주는 명성 관리는 완벽했으나, 실제로는 지배자로서 이기주의를 극한까지 추구하며 모든 것을 이용한 군주.''' ~~조조가 패도 이미지를 가져가 배아픈 진성 패도주의자~~ 기존의 해석으로는 냉혈한 개혁가 조조와 대비되는 우유부단하고 온건한 인물로 여겨졌다. 원소는 정치적으로 관후하여 백성들에게 칭송받고 조조의 하북 평정 이후로도 원소의 정치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이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동탁, 원술, 공손찬 같이 대놓고 막장 통치를 하던 군벌적인 효율성만을 추구해 가혹한 정치를 편 조조와 비교해 나름대로 도덕군자였다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사실은, 원소는 십상시를 몰아내기 위해 맹진항 사건을 꾸며 백성들을 죽이고, 3년상으로 효자 코스프레를 해놓고선 기회가 되자 낙양의 일족들을 저버리고 반동탁연합의 수장이 되는 등 위선적인 면을 보인다. 후한말 군벌난립기에 온갖 다양한 막장 인간군상이 있었지만 동탁, 원술, 공손찬, 여포는 그저 탐욕만 추구하던 악당이고 간웅이라는 조조는 오히려 직설적이고 솔직한 인물로 보일 지경이다. 후한말의 풍운아로 막장스러운 시대에 출현한 막장스러운 세기말 정치가. 말 그대로 '''시대가 만들어낸 압도적인 정치 괴물''' 이라는 평이 적절할 것이다. 국내 팬덤의 경우 지속적인 미번역 사료 번역과 관련 기록 및 비문 추적, 여러차례에 걸친 꾸준한 해석과 논의로 원소의 [[재평가]]를 심도있게 파고들었던 초창기 원빠들은 빠들의 예상조차 훨씬 뛰어넘은 원소의 굉장한 능력과 거대한 존재감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당대 기준으로도, 현대 기준으로도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패륜적인 정치력에 치를 떨며 원까를 넘어 군벌까로 전향했다(...) 영웅주의 사관의 영향이 강한 삼국지 팬덤에서 흔히 '시대를 선도하는 영웅'과 대비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불평만 많은 지식인' 포지션 쯤으로 취급되던 [[공융]] 같은 인물이 재조명된 것도 당시 원빠들의 영향. 공융 항목에서 그 잔해를 확인할 수 있다. 원소는 삼국지의 부정적인 기록을 부풀리고 재해석한 삼국지연의의 묘사에 다시 이런저런 살이 붙으며 수구꼴통 혹은 [[암군]] 이미지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이를 걷어내고 보더라도 기회주의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의 표상과도 같고, 어떤 의미로는 경지에 달한 통찰력과 카리스마로 정치,외교,행정,군사 등 다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보인 걸물이기도 했던, 명암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도덕 따윈 초월해버린''' 문제적인 책략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도덕을 왜곡해버린 정치가라서 도리어 감탄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조조가 지닌 '간웅'이라는 인물상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수컷을 의미하는 웅자는 확실히 들어맞되, 원소의 우악스러운 카리스마를 덮기에는 부족하다. 표독스러움을 강조한다면 효웅이 들어맞는 표현이겠지만, 哮라는 글자에는 맹렬하고, 거칠고 사나운 정도의 의미가 강해 특유의 표리부동하고 음험한 위선성을 나타내기는 부족하다. 굳이 원소의 인물상에 딱 들어맞는 글자를 찾자면 간(奸)이나 효(梟) 보다는 '거스름. 일그러짐, 사악함, 혼란스럽게 함, (본질을)감춤. 갑자기 나타나다. '등의 뜻을 가진 패(悖)라는 글자가 가장 어울릴 것이다. 패왕 할때 쓰이는 패(覇-으뜸 패) 와는 다른 글자인데, ('패권주의' 할때 보이듯 覇라는 글자 자체도 별로 도덕적으로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 悖는 보통 패륜,패악,패역,행패 등 간이나 효가 무색해질 정도로 정말 안 좋은 의미의 극단을 나타낼때 쓰이며 사실상 간과 효를 포괄하는 개념. --근데 의외로 딱 들어맞는다.-- === 외모와 쇼맨쉽 === 삼국지와 후한서에 남겨진 원소열전 첫머리부터 언급되듯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하며, 신분과 교육수준, 성격,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타인의 환심을 사는 것에 극도로 능숙했던 것은 특유의 쇼맨쉽 덕분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루키즘]]에서 오는 이익 또한 엄청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6년상과 낙양에서의 재야활동/ 맹진 학살과 원씨 일족 몰살이라는 사례를 제외하고 봐도 정치 쇼를 자주 벌였는데, 동탁과 대판 싸우고 낙양을 떠날 때는 낙양성 동문에 관인과 부절을 보란듯이 걸어놓고 나가면서 동탁 집권의 정당성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그러면서도 사례교위직은 잘만 자칭했다.], 한복 자택에 테러를 벌였다는 이유로 주한을 참수했지만, 전풍,심배,주한을 기용하여 대놓고 충성경쟁시키듯 구 한복파에 대한 회색테러를 조장[* 전풍은 경무,민순을 죽였고, 주한의 테러 이전부터 한복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했던 것이나, 경포를 시켜 칭제를 건의하도록 하다가 여론이 나쁘자 경포를 죽여 입막음해버린 사건도 교묘한 느낌을 주기는 마찬가지. 여포의 경우는 세력 내부의 여론이 나쁜 것을 감지하자 여포 스스로 원소에게 자신이 낙양으로 떠나겠다고 건의했는데, 사례교위직을 여포에게 양도하며 환송식까지 거하게 벌여놓고 뒤로는 자객을 보냈다(....). 물론 정치쇼 벌이던 군벌들은 조조유비손권 포함해 한둘이 아니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편. 겉으로는 관후하나 시의심이 많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쇼맨쉽이 꼭 이렇게 더러운(...) 쪽으로만 나타난 건 아니라서,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포위되자 도망은커녕 관모를 집어던지며 선두에서 분전해 포위를 풀거나 장연의 업성 전복 소식으로 멘붕에 빠진 참모진을 태연자약하게 하드캐리하는 폭풍간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정태]]는 동탁에게 아첨하면서 원소를 수도에서 나고 자라 외모만 반듯한 멀대 같은 인간이며 한주먹거리도 안될 겁쟁이로 평가했다. 정작 정태는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동탁의 호의를 사 군사를 얻으면 함께 동탁의 뒷통수를 후려갈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본심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본디 원소가 관료로서의 뚜렷한 군사,행정적 업적이나 기반은 거의 전무한 채 재야에서의 반정권 퍼포먼스와 여론몰이 등 명분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나쁘게 보면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방식으로 거물로 성장했던 점을 볼때 나름대로 뼈가 있는 평가. 물론 겁쟁이라는 평가는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각종 암살 위협이 빈번한 마도가 된 낙양을 내부에서 뒤엎겠다는 배짱으로 볼 때는. 한편 겉으로는 온후관대하나 희노의 (진짜) 감정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는 후한서의 평을 볼 때, 정작 스스로는 감정적으로 극히 절제된 채 매사에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무척 --'''정치하는 로봇'''-- 피곤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노동에 가까운 [[삼년상]]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것도 연이어 지냈던 걸 보면 기본적인 체력이 어지간히도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자기학대에 가까웠던 생활양식은 스트레스가 쌓이기 매우 쉽고 또 실제로도 결코 장수한 편은 아니다. 때문에, 체력이 쇠퇴하는 중장년에 접어들면서 급사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유년기부터 친구였던 조조에게서 매사 자유분방하고 괄괄한 성격이 두드러졌던 것과는 매우 뚜렷하게 대비되는 부분. == 오해 == === 사실은 조조 쪽에서 열등감을 느낀 절친 === 익히 알려져 있듯 [[조조(삼국지)|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이 때문에 라이벌 플래그를 만드는 매체들이 많다. 대부분의 삼국지 창작물에서 원소는 어린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열폭하는 모습을 보이나, 원소에 대한 기록이나 원소 자신이 남긴 글을 보면 원소는 조조를 그다지 라이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원소는 오히려 동탁, 원술, 공손찬을 의식했던 기록들이 많다. --실제로 이들이 조조보다 훨씬 강력한 위협이었다.--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를 의식했던 인상적인 기록들이 많다'''. 조조가 젊은시절의 원소를 보며 장차 역적의 우두머리가 될 자라고 욕했다던가(황보밀 일사전), 원소의 편지 한 통에 흥분해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던가(삼국지 순욱전), 조조의 책사들이 원소를 의식하는 조조에게 양자의 재능의 차이를 비교하며 조조를 격려하는 하는 기록이 수두룩하다... 즉, 현대 삼국지에서 원소와 조조의 묘사는 정반대인 셈. 훗날의 대립구도와 개혁가 조조vs수꼴 원소의 이미지 때문인지 서로를 경멸하는 관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나,[* 물론 조조가 개혁가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많으며, 원소는 수꼴보다는 오히려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를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황족을 추대하려고 시도하거나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원소는 조조를 잘 대접했다. 삼국지 원소전 첫머리부터 조조와 유년기부터의 교분이 언급되어있고, 숙청을 밥먹듯이 벌였던 시절에도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고 협천자를 통해 뒤통수를 맞기 전까지 꾸준히 후원했다. 조조 역시 원소의 무덤에서 장례지내며 곡을 한 사건을 보면 정말로 친했을 것이다.[*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했던 일화는 하북 현지에서의 여론을 의식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조조 세력의 공식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조정의 수장으로서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 원소를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자신의 세력이 내세운 정치적 명분을 조조의 개인적인 이유로 완전히 뒤엎은 행동이었다. 덕분에 후대까지도 논란이 되었다.] 조조는 죽기 전에 쓴 유촉에서 원소를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소를 미워하는 감정이 전혀 없으며, 단지 원소가 워낙 편협하고 이기적이라 같이 왕실과 조정을 돕기로 했던 맹세를 어긴 것이~~한실을 돕는다는 분 아드님의 상태가?~~ 안타까울 뿐이라 덧붙였다. 스스로 충신이라고 선언하는 자기 미화--자뻑--를 걸러내고 보면, 조조 개인적으로는 원소 가족의 말로에 대해 죽는 순간까지 내심 죄의식 비슷한 씁쓸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후계자 선정에서 잘못을 했나? === 원소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원담과 원상) 미적거리다가 죽었다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소는 원담을 폐출시켜 원소의 대가 끊어지지 않는 이상 승작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등, 이미 죽기 한참 전부터 원담을 후사에서 명백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담이 독립적인 군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앞선 조치들은 무의미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후계자에서 강제로 밀려난 장자가 군권을 가지고 있을 경우 대부분 쿠데타가 발생했다. 원담을 죽이거나 모든 권한을 제거하지 않은 이상 반란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원소는 원담에게 군권을 주고도 뒤처리를 못한체 급사해 버렸으며 이는 원담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원상의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급사해버려 경력이나 권력기반이 전무한 원상이 가뜩이나 조조와의 대립이 치열한 상황에서 후사를 이어받는 모양새가 되자, 폭발하는 현실론(=원담 대세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원소가 원담을 폐출이라는 극단적인 형태까지 발전될 정도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대해서 사서상의 기록은 없다.[* 후한서에선 여양전투 직후 곽도와 신평이 원담을 부추기며 심배가 원소와 원담의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에 원담이 폐출되었다는 발언을 하고,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다고 여기며 원상을 습격하는 구절이 있는데, 심배는 원상을 옹립하며 사실상 섭정역을 맡았지만 애초에 원상파였다기 보다는, 원담과 오래 전부터 앙숙이었고 원소 사후 원담의 승계를 차단하기 위한 명분으로 원상을 옹립한 것에 가깝다. 때문에 원상의 총애와 별개로 원담 폐출의 직접적인 계기 또한 최소한 하나 이상은 있었을 것.] 원상을 굳이 후계자로 지목해 사후의 후계구도에 풍파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삼국지와 후한서는 모두 원상의 미모를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이라 적고 있고,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텐은 이에 대해 '멋쟁이의 후계자는 당연히 젊은 멋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루키즘에 찌든 발상으로 해석했다. 물론, 루키즘의 이익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누렸으며 그 원소 자신도 기막혀할 정도의 미모였다면 중요한 고려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미모만으로 후계자가 됐다는 사서들과는 달리, 원소 사후 권력기반이 극도로 불안정했을 때 원상은 나이조차 어림에도 상당히 분투하며 유능한 모습을 보였다. 거꾸로 독자적인 기반도 있고 나이도 한참 많았던 원담, 원희의 행보는 심히 졸렬했다. 결과적으로 '''원소의 후계자를 보는 눈은 오히려 선견지명에 가까웠으며''' 미모만으로 후계자를 삼았다는 서술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재평가 여론도 분분하다. --다시는 원소의 통찰력을 무시하지 마라-- 원소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위엄이 있는 타입이라는 묘사를 볼 때, 굳이 아랫것들에게 후계자 선정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요약하자면 후계자 선정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 후계자의 기반을 위협할 세력을 조장시켰고 그것에 대한 뒤처리를 제대로 못하고 죽었으니 후계 문제에 대한 실수는 이쪽에서 평가해야 한다로 정리할 수 있을것이다. === 원소는 우유부단했는가? === 원소는 우유부단해서 확고한 결단력을 지닌 조조에게 밀렸다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고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원소가 살아오면서 했던 각종 숙청이나 전략적 행동력을 보면 오히려 조조보다도 단호한 결단력을 보여준 인물이다. 예를들어, 원소는 하진 휘하에서는 거리낌 없이 십상시 주멸을 건의 했고, 십상시 주멸을 위해 거짓 반란을 꾸미거나 외부군벌을 개입시키는 것도 게의치 않았으며, 이의 부작용으로 외부 군벌 동탁이 정권을 잡고 진류왕을 천자에 옹립하자 반대로 반동탁연합군을 창설하고 동탁이 세운 천자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황손인 유우를 천자로 내세우려고 까지 했다. 당시 원소는 동탁과 대립하며, 동탁이 옹립하고 있는 천자와 이를 위시한 장안의 조정은 인정할 수 없다며, 장안 조정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신하들까지 주저없이 주살하였다. 이런 그의 과거를 살펴보면, 우유부단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단이 빠르고 성급하였으며, 무모해 보이는 계획이라 할지라도 주저없이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었다. 살아생전 결단을 못내려서 실행이 지지부진하거나 주저한 적이 거의 없었고, 불완전한 계획일지라도 일단 실행부터 하다가 되려 뒷수습에 애를 먹을 정도였다. 예컨데 십상시 주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외부군벌을 개입시킨 결과 예기치 않게 동탁이 섭정을 맡게되어 이를 수습하기 위해 꽤 고생하였다. 더불어 애초에 원소세력이 조조에 대항해 무너진 이유도 원소의 우유부단함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원소세력이 멸망한 이유는 모든 권력이 지도자에게 집중된 체제를 형성하다가 갑자기 1인자였던 원소가 병사하는 바람에 조직의 단결력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우유부단한 원소'라는 인물평은 조조를 띄우기 위한 왜곡이라는 반론이 나오는 추세다. 굳이 말하자면, 위진 시대의 원소를 까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들이 후세에 전해진 것이나, 후대 정치가들에게서 조조의 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투구 대신에 모자와 정장 차림? === 《부자(傅子)》의 기록에 따르면, 멋을 부리는 경향도 있었는지 전투에 나설 때도 항상 투구를 쓰지 않았다. 대신에 점잖은 패션아이템 정도였던 모자나 [[두건]] 따위를 썼다. 이는 원소뿐만이 아니라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삼국지 8]]과 [[진삼국무쌍 3]]이래 노란색 투구 캐릭으로 변신한, 심지어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에서도 시종일관 투구를 씌워 놓은 [[KOEI]]의 작화는 고증의 에러 측면이 있다. ~~공개된 일러스트를 보면 [[삼국지 13]]에서도 이 에러는 여전하다~~ 정사의 기록(원소전)에 공손찬에게 쫓길 때 "전풍이 원소를 끼고서 퇴각하여 빈 담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원소가 '''[[두무]] 兜鍪'''(흔히 투구로 번역)를 땅에 벗어두고 말하길 “대장부가 적 앞에 당하여 죽게 되어서 담장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 라 했다."는 구절이 있어, 부자의 주석과 달리 투구를 쓴 것 아니냐는 말도 있으나, 이 뜻은 본래 "가마"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투구 외에도 관이나 두건의 윗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당장 두무의 두兜가 두건의 두다) 고로 원소가 투구를 썼다는 근거가 정사에 있다는 해석은 분명치 않다. --관을 벗어던졌으면 레알 투혼인데-- 원소가 전쟁과 동떨어진 듯한 복장을 한 것은 전국적으로 군벌이 날뛰던 세기말에 역설적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선전술의 일환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원소는 '''군주의 위엄'''을 갖췄다는 자신의 외모를 극대화하여,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전쟁터에 나오는 파격적인 선전 책략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전쟁터 한복판에 제왕 같은 외모의 지도자가 전투복 대신 정복을 입고 강림해서 시크하게 [[폭풍간지]]를 날려대는 격이다. 원소는 정치 선전술의 경지를 구축한 인물이었고, 원소 자신만이 아니라 부하들까지 비슷한 스타일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여담으로 동시대의 손견도 투구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는 머리에 화살 혹은 돌을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 == 가족 관계 == (다른 집안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소(紹)라는 이름이나 적모상의 대상이 원술의 어머니였다는 황보밀의 기록을 보아 친부는 원봉이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상술된 바와 같이 정확한 여부는 불분명. 상술했듯 어머니는 노비였으며, 원술과 공손찬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원씨의 핏줄이 아닌 사생아라는 설이 있었다. 원봉의 자식이 맞다면 원봉의 세 아들 중 차남이나 얼자였고, 원성의 뒤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종가에서 폐출된 것으로 보인다. 정작 원소 본인이 똑같은 방법으로 장남인 원담을 폐출시켰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음침하게 보일 수 있는 출생배경이나 이름과 달리 정작 본초(本初)라는 자는 정 반대로 시초,근본이라는 의미이기에 아주 의미심장하다. -- 원소의 행적에 맞춰 해석한다면 기존의 원씨 일족을 모조리 쳐죽이고 자신이 새로운 원씨 일족의 시조가 되겠다는 속내를 표출한 듯 하다. -- [* 떡밥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원씨 일족은 원소에 의해 멸족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 사후 심배,봉기와 함께 원상을 옹립한 주축인 원소의 부인 [[유부인]]은 후처라고 한다. 유부인의 출신이나 원상의 생모가 맞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가 황족 출신인 유부인의 소생이라 외가 쪽으로는 황실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본인이 아니더라도 차대에 원상을 통해 원씨 왕조를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있었다. 원소 사후 [[유부인]]이 총첩 5인을 살해했다는 전론의 기록을 봤을때 상당히 많은 첩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젠틀한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이쪽도 여자 밝히기로는 친구인 조조 못지 않았던 듯(...)[* 조조가 유독 여자 문제로 곤욕을 겪는 일화가 많지만 조조와 동세대 인물들 중 이 분야의 레전드로는 첩 수백명을 들인 [[원술]]과 [[채모]]가 있다. 이들과 비교하면 조조는 차라리 얌전했던(?) 편. ] 삼국지와 후한서는 일관되게 원소의 아들이 원담,원희,원상 셋 뿐이라 적고 있기에[* 오서에 따르면 [[원매]]라는 인물이 원소의 사남이라는 설이 있는데,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원상이 막내아들이라 일관되게 밝히고 있기에 실존성 자체가 의심되고 있으며, 원매가 등장하는 유이한 기록인 조만전에서는 원매가 원상의 동생이 아닌 원상의 형의 아들(=조카)이라고 적혀있어 기록이 엇갈린다.] 어쩌면 딸부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원소가 죽고 [[조조(삼국지)|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즉 거짓임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는 정도를 넘어서 역사와 고전도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까댄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조조는 이외에도 조정의 야당으로 불리는 공융과 여러가지로 사사건건 갈등을 빚게 되었고 눈엣가시였던 [[공융]]을 숙청해버린다.] == 조조에게 원소가 지니는 비중 == [[1라운드 보스|첫판왕]] [[동탁]]과 [[중간보스]]에 해당하는 [[여포]], [[원술]]에 이은 [[최종보스]]. 한때는 조조조차 그에게 투항하려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고, [[관도대전]] 이후로도 [[넘사벽]]의 세력비를 유지하여 중국의 최강자로서 죽었다. 조조는 원소가 살아있을 때까지 싸움은 커녕 수비하기도 급급한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최종보스. 위의 오해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원소는 협천자 논쟁으로 뒤통수를 맞기 이전까지는 조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원소는 자신의 처지가 약소했던 시절부터 조조를 꾸준히 지원했으며,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에 대한 열등감을 보인 기록이 많다. 그 잔인했던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하고 죄책감을 기록으로 남긴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었다. --후대 삼국지 창작물들이 얼마나 왜곡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삼국지 무제기에서는 '''원소의 가족'''에 관련된 서술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관도 대전]]은 매우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원소전보다 무제기에 실린 내용이 더 풍부하다. 조조의 일대기 자체가 '''조조 vs 원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무제기의 인물평[* 타인의 기전의 인물평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다.][* 또 하나의 예는 유비의 인물평에 언급된 조조.]에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는 등 여러가지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훗날의 [[촉]]과 [[오]] 역시 강한 세력이었으나 각각 산맥과 [[장강|강]]이라는 지형적인 장벽을 두고 오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원소는 황하를 두고 허도의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생존 자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제기는 [[유비(삼국지)|유비]]나 [[손권]]보다도 '''원소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인 [[원상]], [[원담]]에게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위서 유이열전에서는 오와 촉의 신하들은 (원소 시대) 기주의 병사들에 미치지 못하고, 손권과 유비 역시 원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물론, 위는 유비의 한중왕 선언으로 조조가 제대로 엿먹기 이전의 평가라서, 위의 문장만으로 다른 인물들까지 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아무튼 조조의 일대기에 자기 열전만큼 기록이 많다는 점만 보더라도, 조조의 인생에서 적으로든 친구로든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다. --조조에게 원소는 본편의 최종보스, 유비는 확장팩의 히든보스 쯤 될 것이다.-- == 미디어 믹스 == * [[원소/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 爰邵 생몰년도 미상 처음에는 간리를 지냈고 263년 5월에 [[조환]]이 칙령을 내려 촉한의 정벌이 시작되면서 [[등애]]와 [[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을 이끌게 했다가 제갈서는 [[종회]]의 모함으로 제갈서의 병력은 종회가 거느리게 되었고 촉 정벌에 등애 휘하에서 진로호군으로 종군했다. 등애가 산 위에 앉아있는데 흐르는 물이 있는 꿈을 꾸면서 등애가 해몽에 대해 묻자 원소는 주역의 궤를 통해 등애가 가서 공을 세우지만 그 길이 다하기 때문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촉을 이길 것은 분명하지만 돌아올 수 없다고]] 대답했으며, 이를 들은 등애는 크게 낙심하고 허탈해하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후에는 벼슬을 위위까지 지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역에 밝다는 서술과 함께 등애가 주역의 건괘에 나오는 말들을 줄줄 외우는 사람 앞에서 등애는 의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글퍼했다고 서술된다. [[분류:동명이인]] [[분류:후한의 군벌]]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위서 동이원유전 (원본 보기) 원소(삼국지)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