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상위 문서: [[철학자]], [[철학 관련 정보]] http://cdn8.openculture.com/wp-content/uploads/2013/09/kant-shooting.jpg?width=300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c/Immanuel_Kant_%28portrait%29.jpg/483px-Immanuel_Kant_%28portrait%29.jpg?width=300 Immanuel Kant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 >'''근대 철학의 거성''' --문과생들의 적-- >'''전무후무한 위대한 철학자'''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칸트어로 쓰인 대표적 문장이다. 거칠게 의미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언가 나에게 나타나는 것 없이는 우리는 어떤 사물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가지는 어떤 형식도 없다면 여전히 그 사물은 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학자들도 칸트와 비슷한 형식의 말을 했다.(A 없는 B는 공허하며, B 없는 A는 맹목적이다 형식의 말) [[아인슈타인]]은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 "신앙심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며, 과학 없는 신앙심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1986년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했다.[[http://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57395&rid=253|#]] ~~섹스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사랑없는 섹스는 맹목적이다.~~ ][br]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영어로 옮기면, thoughts without content are empty, intuitions without concepts are blind.] >'''모든 것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경험의 한계 내에서 탐구하되, 경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 형식이 철학적 탐구의 적법한 대상이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법칙)이다.'''[* 별이 빛나는 하늘은 물리적 인과법칙, 내 속의 도덕법칙은 도덕적 응보에 따르는 법칙, 이 둘이 같이 있음은 양립가능론을 의미한다.] >Zwei Dinge erfüllen das Gemüt mit immer neuer und zunehmender Bewunderung und Ehrfurcht, je öfter und anhaltender sich das Nachdenken damit beschäftigt: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목차] == 소개 ==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근대 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칸트에 의해 절정을 이루는데, 그 중 칸트 철학의 깊이가 가장 깊다. 근대 시대에 인간 지식의 근원, 정당화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사조가 유행하였다. 하나는 경험이 모든 지식의 바탕이라는 영국 경험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이성을 중시하여 선천적 지식, 본유 관념 그리고 직관을 강조하는 대륙의 이성주의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칸트는 두 사조를 통합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미학, 윤리학에도 불후한 업적을 남겼다. 순수이성비판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의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그 바탕에는 순수지성 개념(개념틀)이 존재한다. 지식은 경험과 개념틀의 두 가지 복합 작용에서 나온다. 우리에게는 [[가터벨트]]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여성 속옷과 깐깐해 보이는 이 학자분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항목 참고. 당시 [[스타킹]]이나 가터벨트 같은 것은 [[남성]]용이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치마]]가 길어 다릴 드러낼 일도 없었으니... == 업적 == 경험론[* 인간의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무언가 경험을 쌓기 전까지는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영국에서 주창된 설.]과 합리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유관념(本有觀念)은 신에게 선물받은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 없이도 인간은 사색을 통해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 수학 공식 같은 거라든지. 주창자로 데카르트가 대표적.]이 치고박고 싸우던 18세기 유럽철학계를 평정한 거인. 실제로 칸트 이전 세대에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구분이 없었다. 같은 경험주의론자인 여러 영국 철학자조차 자신들이 같은 학파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을 플라톤 학파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라고 지칭하였다. 이러한 학파의 구분은 칸트 이후, 정확히 말해서는 칸트에 대한 연구가 극에 달하던 18세기 후반 19세기초에 와서야 정립되었다. 바꿔 말하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 하나로 17-18세기 존재하던 모든 영국, 대륙철학자들을 단 2개의 학파로 양립시키고 그들이 대립하던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한 후 이를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낸 대단한 인물. 근대철학은 칸트 전과 후로 나뉜다는 얘기나 칸트를 모든 강들이 흘러 들었다가 다시 갈라져 나가는 호수로 비유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의미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도 칸트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이 지켜야할 의무론적 윤리란 무엇이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체계적인 인식론과 실천 이성 구분을 통해 그 구조를 펼쳐보였다. 칸트가 인식론 뿐만 아니라 근대 윤리학의 시작을 알렸다고 봐도 될듯. 게다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인간의 미학 인식까지 구분과 과정을 설명 시도했다. 칸트가 인류 지식 세계에 공헌한 바는 이렇듯 어마어마하다. 칸트가 나타나고 나서야 비로소 철학이 하나의 학(學)으로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칸트 이전까지 철학은 다분히 주관적이면서 고답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칸트가 인식론과 윤리론, 미학론을 펴면서 철학이 객관적인 학문으로 완성되었다고. 칸트 이전에는 그냥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렇다" 식의 철학이 죽 이어져 내려오다가, ~~걍 썰만 늘어 놓다가~~ 칸트가 방대한 논리와 자료로 치밀한 철학 세계를 완성하면서 이후 [[형이상학]] 발전과 완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 물론 칸트 이전의 철학을 연구하다 보면 큰일날 소리긴 하지만. 저명한 철학자 R.샤하트는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을 불완전하게 이해해도 근대 철학 이해에 큰 지장은 없지만, 칸트를 불완전하게 이해하면 근대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말했을 정도. 그 스스로 "[[데이비드 흄]]의 책을 읽고 미망에서 깨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칸트가 읽은 흄의 책은 『인간오성론』으로 추정되는데 이 책은 흄의 첫번째 저서이자 대표작인 『인성론』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문체도 좀 더 다듬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흄은 『인간오성론』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격동일성"에 관한 문제를 『인성론』에서만 논의했다. 만약 칸트가 『인성론』을 읽었다면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리가 없는데 칸트는 흄의 인격동일성 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대 연구자들은 칸트가 『인성론』은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자칫 어렵게 들리는 이 말은 그냥 흄과 칸트 모두 오직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철학의 탐구 범위를 좁히자는데에 동의한다는 말이고, 이 점에서 그는 경험론자와 닮았다. 그래서 칸트의 이 고백은 "경험적인 것, 혹은 수학적인 것이 아닌 모든 책은 불태워 버리라"는 흄의 말과 상통한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완전히 쓸모없다는 데에서 칸트는 흄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현대 영미형이상학에서 흄은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주의자로 자주 다루어지지만 칸트는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와 같은 경험적인 범위 내로 철학의 탐구 범위를 좁히면서도 흄의 방식의 탐구를 반드시 따라가지 않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칸트는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할 원칙이 무엇일지를 탐구했다. 흄의 경험론은 모든 경험이 공유하는 어떤 일반적인 성질, 이를테면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에 대한 나의 관념(idea)은 나의 인상(impression)에서 기인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반면, 칸트는 모든 경험이 가져야만 할 어떤 형식에 주목한다. 이처럼 그는 경험론적인 틀 내에서 합리론적인 정신을 가지고 세계를 탐구하였다고 볼 수 있기에 굳이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경험론과 합리론자의 종합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흄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칸트의 대응에 동의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칸트는 흄을 알았지만 흄은 칸트를 몰랐는데 흄이 세상을 떠났을 때가 1776년으로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려면 5년이 더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 사상 == 칸트가 그의 철학을 주장할때 가장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직관은 '경험과 최대한 떨어져서 사고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고?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오류의 근원이 되는데다가, 사람들의 경험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하므로 철학이 학문으로 제대로 성립되려면 그러한 불완전한 것이 탐구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칸트의 사상 체계를 적절히 분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식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윤리학),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종교철학). 이 중 앞의 질문은 제1비판, (순수이성비판) 뒤의 두 질문은 제2비판(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어진다. 제3비판(판단력비판)은 이 세 질문의 도식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 칸트 연구의 권위자 중 하나인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 교수는 제3비판에 적당한 질문은 아마도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일 것으로 보고 있지만, 칸트 본인은 이런 언급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괄호 안의 저서는 대표 저서일 뿐이고 제1비판의 경우 『형이상학서설』, 제2비판의 경우 『윤리형이상학 정초』, 『윤리형이상학』,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저서들이 있고 이 책들도 칸트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외에 다른 굵직한 저서들이 많다. 이처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칸트의 사상이 방대한 만큼 그 사상들 중에서도 이 항목에선 가장 대표적인 논의 만을 다룬다.]] === 인식론 === 인식론에서 칸트는 일단 어떤 대상이 가지는 형식들 중에서 그것 없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형식이 무엇일지를 검토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우선 어떤 대상이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 속에 전혀 놓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인식을 할 때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두 감성적 형식이다. 시간은 내적 형식이고 공간은 외적 형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은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경험이라 함은 우리의 오감을 뜻한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그 어떠한 오감을 통해서도 경험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은 보이지도 맛을 느낄수고 촉감으로 느낄 수도, 소리로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것이다. 공간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우리는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과 색을 보는 것이다.], 경험이전의 형식인 선험적 형식[*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 선험이라는 말은 원문에서 a priori이다. 그런데 이 a priori는 한국에서 번역될 때 '선천'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또 '선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자는 최재희 선생이 번역할 당시에 사용된 단어이고, 후자는 백종현 선생이 번역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이 외에도 영어의 transcendental을 '선험'(최재희) '초월'(백종현)으로, 영어 imagination을 '구상력'(최재희) '상상력'(백종현)으로 번역하는 등,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다만, 이렇게 같은 단어를 통일됨 없이 번역하는 것은 첫째로, 한국 칸트학계 안에서 일어나는 암묵의 권력다툼 때문이요, 둘째는 a priori를(또 위의 다른 단어들도) '선천'으로 번역하기에도, '선험'으로 번역하기에도, 심지어 '아프리오리'로 번역하기에도 칸트의 원래 의도를 흐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칸트를 읽어 나아갈 독자들은, 그리고 이후에 위와 같은 단어들이 쓰인 다른 철학 서적을 접할 독자들은 단어를 읽기 전에 먼저 'a priori'와 'transcendental'을 잘 구분하도록 하자.]이기에 필연적이다. [* 칸트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론적 사고를 통해서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역학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왜냐하면 처음 뉴턴 역학이 등장했을때 뉴턴역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전제하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은, 몇몇 철학자들에 의해서 거부되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시간과 공간의 이론에 대해 어떠한 논쟁이 있었는지는 '동서양 문명과 과학적 사유'라는 책 중 '창의성 그리고 과학이론의 기초에 대한 철학적 반성' 챕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 현대에는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역학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은 변화하게 되었다. 뉴턴역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영원하다거나 동질적이라거나 상호 분리되거나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합쳐서 시공간이 되고 시공간이 휘어진다거나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을 그것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공간이 오감으로 경험되는 것들 이전의 것이 칸트의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에 대한 성질을 이야기하지 시공간이 인간의 인식 이전에 있나 이후에 있나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논의가 알고싶다면 김필영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칸트의 시간이론'을 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사물을 보다 지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면, 공간과 시간 이외에 또 몇 가지 형식이 더 떠오를 것이다.(그 사물이 인과 속에 놓일 수 있다던가, 세어질 수 있다던가...) 그리하여 이러한 형식 12개를 구분하고 다시 4개의 범주로 나눈 것이 사물의 지성적 형식,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사물을 이해하는 우린의 인식적 형식이라는 것이 그의 인식론에서 나타나는 연역의 요지이다. 그리고 인간이 지성과 감성의 이러한 형식이 없이는 사물에 대해서 고찰할 수 없다는 것에 의해서 바로 인간의 인식 안에 지성과 감성의 형식이 내재되어 있고 그 틀 안에서 우리가 사물을 구성해 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가 순전히 경험 안으로 탐구의 범위를 제한하더라도 흄과 같은 강력한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사물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 곧 지성과 감성의 형식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칸트에게서 형이상항적 가능성은 선험적 종합판단에 의해 확인된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무엇이냐? 쉽게 말해서 주어가 술어의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상이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판단 형식을 말한다. 단 이때의 종합 판단은 말 그대로 선험적, 즉 경험에 앞서 존재해야만 한다. 칸트의 구분에 따르면 "모든 고양이는 검다."라는 명제는 후험적 종합 판단이다. 왜냐하면 명제의 주어인 '고양이'라는 단어에는 '검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저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직접 모든 고양이의 색깔을 확인해봐야지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순수한 선험적 판단, 예를 들어 '1+1=2'라는 명제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수학의 명제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주장도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비판받는다. 수학의 명제는 종합적인게 아니라 분석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가 이후 분석명제과 종합명제라는 구분자체가 '''경험론의 독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칸트는 경험론의 모든 주장들을 싸그리 부정하지 않고 일부분은 받아 들였다는 걸 기억하자.] 왜냐하면 수리 연산은 경험에 초월적이고 1이라는 개념에는 2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으로도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고 결론내린다. 선험적 종합 판단으로 받아들인 인식은 명백히 보편적이다. 예를 들어 1+1=2라는 명제가 인간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그런 한정된 지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상에 통하는 보편적 인식이다. 어떤 사실을 "정신적 습관" 이라고 주장했던 회의주의의 흄과 달리 칸트는 객관성을 인식으로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시간과 공간은 칸트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기 전에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직관적 형식이 시간과 공간이다. 쉽게 말해서 대부분의 인간이 무언가를 경험을 해서 그것을 매개로 삼아 지식을 넓혀나가는데 경험을 받아들일 때 일종의 공통된 조건이 있기에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그 공통된 조건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 인간만이 가진 능력인지, 다른 생물들도 가지고 있는 능력인지는 추가바람]이다. 그래서 칸트는 두 가지 직관 형식은 경험과 이성과 나란히 있는 게 아니라 앞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렇게 직관 형식을 통해 만물을 경험하게 된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데이터(질료라고도 한다.)는 인간에 의해 주관적으로 '개념'화 되고 범주를 통해 지식으로 구분한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은 '순수 지성' 혹은 자율적인 이성 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이성은 이렇듯 스스로 움직여서 판단을 한다는 뜻이다. 범주라는 개념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고안했던 기준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에는 맹점이 있다는 걸 비판하고 다시 자신이 범주 체계를 세웠다. 칸트는 독립된 사물 자체에는 흄과 동일하게 회의적인 자세를 취한다. 인간이 사물의 존재 자체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지만, 그 사물의 본질은 누구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 무언가가 있다, 라는 건 알 수 있지만 그 무엇이 정확하게 어떤 정체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서 눈앞에 까만 바둑알이 있다고 치자. 모든 사람이 눈앞에 바둑알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고는 확실히 인지할 수 있지만 정말로 그것이 '까만 바둑알'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시신경이 구별하지 못하는 특정한 색이 바둑알에 섞여 있을 수도 있고, 모양새만으로 바둑알이라고 단정지었다가 그것이 아닐 확률도 있고. 즉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존재하는 무언가를 직관형식이라는 인식틀에 맞춰서 객관적인 진리를 재구성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인식틀이라는 것도 수만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동물들도 나름대로 인식틀을 가지고 객관적인 진리를 구성하며 심지어 학습을 한다.(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만 본질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후세에 두고두고 말이 나오는 떡밥이 된다.) 칸트는 인간이 감성과 오성(이성)을 이용해 인식하는 사물은 사물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현상만으로도 객관적인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이처럼 철학의 적법한 대상이 자신과 독립적인 사물이 아니라 그러한 사물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식 틀이라는 입장은 그간의 일반적인 철학적 상식을 180도 뒤집은 것이기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이라고 보았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어느 분야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발상을 일컫는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또다른 예로는 계몽의 막을 올린 [[르네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을 들 수 있다.] 선험적 직관 형식이 시간과 공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적어도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경험 이전의 조건이 있다는 칸트의 통찰만큼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철학적 질문은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공학적 질문으로 바꿀 수 있고,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다른 종류의 물리적 장치에 실현하면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현대의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답하려는 질문에 대해 이미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시했던 셈이다.[[http://egloos.zum.com/nullmodel/v/1927414|#]] === 윤리학 === 칸트의 윤리학은 '경험 독립적 지식'에 대한 다른 방향의 추구이다. 경험독립적이라는 말은 '경향성'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무작위하게 선택할 수 있음'이라는 개념이지만, 칸트 및 철학에서 사용되는 '자유'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이라는 의미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가 A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외부적인 강요 내지는 경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사유로부터 결론이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자율로서의 자유'라고 집약시켜 표현한다. 그러므로 뒤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언명령'은 칸트에게 있어 자유로운 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정한 요인으로부터 발생한 경향성에 이끌려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경험과 멀리멀리 떨어져서, 즉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려보자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칸트에게 윤리학에서 철학적 지식의 대상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영역은 의지, 그 중에서도 선의지가 된다. 그런데 이 선의지는 "'''A를 위해서는''' B를 하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가언명령), 그러한 조건 없이 단지 '~를 해라!(혹은 하지 말라)'고만 명령한다. 이를테면 직관적으로 볼 때에, 동일하게 사람을 살리는 행위라 하더라도 '너의 평판을 위해서 사람을 살리라'는 명령에 따르는 행위는 윤리적이지 않은 반면, 선의지로부터 기인하는 명령, 즉 '사람을 살리라'는 명령에 따르는 행위는 윤리적이라는 것이다.앞서 말한 것처럼 가언명령은 '~을 위한 판단'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명령, 칸트식으로 말하면 정언 명령은 칸트에 의하면 크게 1) 보편화 가능성, 2) 인격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할 것, 3) 목적 왕국의 입법자가 어떻게 할지를 고려하여 행위할 것이라는 세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 세 가지 설명이 왜 결론적으로 같은 하나의 정언 명령을 지시하는지는 수많은 논란거리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정언 명령은 그 대상이 자신/타인인지, 혹은 그 행위가 고정적(완전한)인지 아닌지의(불완전한) 기준으로 나뉘어서 총 네가지로 구분되는 명령을 우리에게 준다고 칸트는 정리한다. 이로부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자살 금지),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거짓말, 거짓약속 금지),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능력 계발),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선행)가 따라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무들이 깨어져야만 할 듯한 상황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에 대한 칸트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은 갈리곤 한다. 하나의 해석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그르다'(비록 그것이 요청되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고 칸트를 해석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의 해석은 '결과적으로 사람을 속이게 되더라도 말 자체로 거짓말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독립운동가를 숨겨주고 있을때 순사가 자신에게 그의 행방을 물을때, 전자의 입장을 취하면 독립운동가를 숨겨주고 있지 않다는 적절한 대답은 비록 그 상황에 의해서 요청되더라도 잘못된 행위를 함축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후자의 입장은 '어제 제 집 앞을 지나서 남쪽으로 가고 잇었어요'라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칸트를 해석하게 된다.(샌델이 이러한 방식으로 칸트를 해석했다.) 어느 입장이 보다 적절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이러한 칸트의 윤리관은 양립가능론에 의해서 지지된다. 이를 지지하는 칸트의 직관은 마음의 불투명성, 즉 우리는 어떤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으로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에 따라서, 행위자의 행위는 한편으로는 물리적인 인과의 법칙 하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인 응보의 법칙 하에서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죽어가는 사람을 약물로 살리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혈관에 약물이 흐르는 일련의 과정이나 혹은 내가 그동안 받아온 교육, 경향성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환자를 살리고자 하는 나의 선한 의지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어떤 경우에는 동일한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완전히 다른 두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하며, 결정론은 물리적인 인과 법칙에, 인간의 책임은 도덕적인 응보 법칙에 의해서 확보되므로 우리는 어떤 행위자의 행위를 그가 그동안 겪었던 어떤 과거의 사실들로부터 독립된 채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칸트의 윤리학이 어떻게 다시금 경험 내로 탐구 영역을 제안하면서 흄과 같이 경향성에 의지하지 않고서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설명하는지를 볼 수 있다. 칸트의 종교관은 위의 두 입장의 상이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다루는 주된 물음은 '위에서 살펴본 상이한 두 판단(물리적 인과, 도덕적 응보)이 겹치지 않는 현실에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이다. 이를테면 머리가 끝내주게 좋은 어떤 악당이 지금껏 능수능란하게 어떤 처벌도 받지 않도록 자신의 죄를 잘 피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해 보자. 우리는 한편으로 그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죽을때까지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피해나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도덕적 응보에 대한 판단을 포기해야 하는가? 칸트는 이 때 그가 처벌받아야만 한다는 믿음을 유지하라고 주문한다. 비록 결코 현실에서 물리적 인과에 따른 판단과 도덕적 응보에 따른 판단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마치 일치할것처럼, 혹은 일치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일종의 신앙이나, 이 신앙은 오직 윤리의 명령에 대한 신앙이므로, 적절한 신앙은 오직 윤리성에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칸트에게서 신에 대한 신앙은 오직 윤리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에서만 기인한다. 그리고 칸트의 최후의 윤리적 저작인 윤리형이상학에서 그는 '경험 독립적 윤리학'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개되어야할지를 탐구한다. 이 책의 주제는 고도로 추상적이어서 무의미한것처럼 여겨지는 윤리학의 주장들이 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에 대한 탐구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서 칸트는 추상적인 원칙인 네 가지 윤리적 정언 명령들을 법적 의무의 근거(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 혹은 도덕적 의무의 근거로(나머지 세 의무) 분류하고 일상적 혹은 특정한 맥락에서 이러한 명령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규칙이나(법 이론) 행위로(덕 이론) 이어져야 할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인 사례들이 탐구의 대상이 되기에 비록 그 사례들에 대한 판단 중 일부는 현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전혀 칸트답지 않은 면도 있다.(이를테면, 자연의 경향성에 거스르는 행위인 자위나 불륜 등등을 하지 말라든가 손님의 수는 4명 이상 12명 이하가 좋다던가...)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들 역시 추상적이고 경험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윤리학의 대원칙이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가장 옳은 행위를 이끌어내도록 기능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도 고려하면 아마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을런지. === 미학 === 칸트가 말년에 미적 판단력을 다루어 [[미학]]에 기여하게 된 데에는, 칸트가 살던 당시의 계몽주의 풍토와도 연관이 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은 계몽정신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상반된 문화를 만들어냈다. 신고전주의가 기하학적으로 딱딱 떨어지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높게 평가했다면, 낭만주의는 중세 로망스 문학이나 이슬람 하렘 같은 이국적인 문화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무언가를 찾았다. 칸트는 계몽주의 시대의 이런 상반된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룬 내용은 오늘날 미학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판단력 비판』은 '어떻게 우리에게 취미판단 으로서의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지'를 다룬다. 즉, 우리가 가진 취향이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그 취향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판단하는지, 그 취향에 따른 판단이 종합적 판단으로 확대되는 것이 가능한지 따진다. 칸트는 자연을 인식하는 능력인 순수이성(현상계)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정하는 능력인 실천이성(이성적 이념) 사이를 연결하려 시도한다. 즉 경험으로 아는 물질계의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지성[* 독일어 Verstand. 영어의 Understanding에 해당한다. 이전 작성자는 도올 [[김용옥]]의 견해를 수용하여 이 번역어를 '이해력'으로 적어야 한다고 주석을 달아놓았었다. 도올 김용옥은 기존 번역어 '오성(悟性)'이라는 표현은 그냥 이해력이나 비슷한 개념을 의미하는 'understanding'을 번역한 것인데, 이때 번역하는 놈들이 괜히 있어 보이려고 오성이랍시고 번역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바로 수용하여 나무위키에 이해력으로 쓰는 것은 약간은 성급한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 한국의 칸트 전공자들은 독일어 Verstand를 '지성(知性)'으로 번역하는 사람들과 '오성(悟性)'으로 번역하는 사람들로 양분된다. 후자는 전통적인 견해인 데 반해 전자는 비교적 최근에 제안된 번역어로 점점 더 많은 전공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견해이다.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Verstand가 오성의 깨달을 '오(悟)'처럼 어떤 대오각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고하고 개념화하고 판단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 즉 '앎'의 능력이므로 알 '지(知)'를 써서 지성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수용한다면, '이해력'이라는 번역어도 적당한지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지성은 사고, 개념화, 판단, 인식, 이해를 모두 포괄하는 데 반해 이해력은 '이해'에만 한정된 능력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전문적인 논쟁을 나무위키에서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대체로 최근에 나온 책일수록 오성보다는 지성을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이 문서 하단에 소개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의 판단력비판 해제에서도 Verstand가 '지성'으로 번역 표기되어 있는 점, 이 문서의 인식론 문단에서도 '지성'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 통일성을 감안해 여기에서도 일단은 지성으로 쓰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과 철학적으로 어떻게 살것인지 윤리적인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이성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한 것이다. 칸트는 이것이 감정을 판단하는 능력, 즉 쾌와 불쾌를판단하는 판단력을 통해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이를 미, 숭고, 합목적성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살펴본다. 『판단력 비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목적론상 판단력 비판 부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 미학상 판단력비판 * 미학상 판단 분석론 * 미의 분석론 * [[취미판단]]의 제 1 양식 - “성격” * [[취미판단]]의 제 2 양식 - “분량” * [[취미판단]]의 제 3 양식 - 목적의 “관계” * [[취미판단]]의 제 4 양식 - 대상 “양태” * 숭고 분석론 * 수학상 숭고에 관하여 * 역학상 숭고에 관하여 * 미 판단론의 변증론 * 목적론상 판단력비판 * 목적론상 판단력의 분석론 * 목적론상 판단력의 변증론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 반성적 판단력으로 나눈다. * 규정적 판단력: 규정적 판단력은 개별자를 이미 주어져있는 보편자에 포섭시키는 능력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인지심리학등에서 연구하는 인식판단 이에 해당할 듯. * 반성적 판단력: 반대로 반성적 판단력은 개별자가 주어져있는 상황에서 그 개별자가 포섭된다고 생각되는 보편자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철학에서 사용하는 탐구태도와 유사할 듯. 칸트에 따르면 반성적 판단력에는 지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며, 엄밀한 객관성과 필연성을 단언할 수 없기에 이는 주관적이다. 그리고 반성적 판단력을 다시 미학상의 판단력과 목적론상의 판단력으로 나눈다.(위의 목차 분류에서 가장 상위에 해당) 칸트는 이 중에서 미적 판단력을 다루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 미적 판단력: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꽃이나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든다고 느끼는 것이 대표적이다. 칸트는 이를 주관적 취미판단으로 정의한다. * 목적론적 판단력: 이는 목적론적 사고에 의거해 대상의 합목적성을 따지는 능력이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평가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이를 반성적 취미판단으로 정의한다. 칸트는 이 미적 판단력(감성적 판단력, 미감적 판단력, 취미판단)력을 '''성질, 분량, 관계, 양상'''의 4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그리고 이에 따라 취미판단의 4가지 특성을 정리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관심성, 주관적 보편성, 목적없는 합목적성, 주관적 필연성'''이다. * 취미판단의 제1계기: '''성질'''의 범주에 따른 고찰 → '''무관심성''' * 취미판단의 제2계기: '''분량'''의 범주에 따른 고찰 → '''주관적 보편성''' * 취미판단의 제3계기: 취미판단에서 고찰되는 목적의 '''관계''' → '''목적없는 합목적성''' * 취미판단의 제4계기: 대상들에 관한 만족의 '''양상''' → '''주관적 필연성(공통감)''' 더 쉽게 이를 요약하면 '''without interest, concept, purpose'''으로 요약할 수 있다. 취미판단의 4가지 특성을 다시 상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적 무관심성|무관심성]](disinterestedness)''' : 다른말로는 무사심성이라고도 한다. 칸트는 미적 대상을 느낄때 우리는 그 대상을 어떤 이해관계없이 보고 만족한다고 보았다. 칸트의 관점대로라면, 우리가 음식이나 섹시함이나 돈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건 진정한 미가 아니다. 반면 흘낏 아무런 관심없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꽃잎이나 유리조각을 '사심없이'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그건 미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과정에는 다른 일체의 개입요소 없이 '''그냥 아름답다''' 고 느끼는게 전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관심성은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 sake)을 주장하는 예술가나 이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예술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하는거고, 예술애호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감상하는 거라는 식의 예술지상론이 이 무관심성에 근거하고 있다. 다른 말로 이를 예술의 자율성(autonomy)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미적 판단은 정치나 경제등 다른 어떤 요소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 무관심성이 정말인지는 후대의 미학자들이나 예술이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게 따지면 오늘날 경매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는 예술품들은 전부 무관심성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그냥 투기하기 위해 사는거지 아름다워서 사는게 아니게 되니까 말이다. 반대로 이렇게 따지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회참여예술 같은 것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녀시대를 좋아하는건 엄밀히 말하면 무관심성에는 위배된다. 따지고 보면 소녀시대 맴버들의 여성적 매력 등에 끌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1. '''주관적 보편성''' :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형용모순인지 알 것이다. 보편성은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 나는 A라고 보는데, 남이 B라고 본다면, 그건 A가 아닌거다. 모두가 A라고 객관적으로 봐야 그건 A라는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미적판단, 주관적 취미판단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소녀시대를 좋아할 때 그 좋아하는 취향 자체는 순전히 주관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팬덤으로 묶인다. 만약 미가 순전히 주관적이기만 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른 걸그룹을 좋아해야 하고 서로들의 취향이 일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걸그룹이나 미인상이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까닭으로 칸트는 모든 인간에겐 공통감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통감각에 대해서는 4번 참고. 1. '''목적없는 합목적성''' : 다른 말로 무목적적인 합목적성. 칸트는 미적 취미 판단은 목적없는 합목적성을 따른다고 봤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의 미를 고찰할 때, 이는 객관적, 규정적이지 않고, 주관적, 반성적, 통제적, 규제적이다. 쉽게 말하면, 물리학적 사실처럼 정확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람이 느끼는 순간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반성하듯 생각하면서 그게 아름다운지 아닌지 판단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칸트는 합목적성은 강제성이 없으며, 단지 그렇게 하도록 요청될 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별히 딱히 소녀시대를 좋아해야 할 목적이나 당위성이 없지만, 그럼에도 소녀시대를 좋아하고, 자기 멋대로 정한 그 목적에 따라 온갖 덕질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답게 느껴야만 하는 의무는 없다.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목적을 느끼며 살지 않음에도, 뭔가를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목적성이 없는 짓이지만, 그 예술을 좋아하고 목적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즉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느낄 줄 알며, 이는 따로 그렇게 하라고 목적을 부여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말 참된 미를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레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1. '''주관적 필연성(공통감각)''' : 칸트는 미적 판단(주관적 취미 판단)이 이론적 인식(경험)과 실천적 인식(선험)을 매개한다 본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주관적인 미적 감정이 객관적, 보편적인 판단처럼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주목한 칸트는 공통감각을 취미판단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주관적 감정에 따르는 취미 판단이 근거하는 보편적 원리. 칸트에 따르면, 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저것은 아름답다'는데 동의하게 해주는 공통적인 상식이다. 즉 다시 말하면, 주관적 보편성이 가능하려면 곧 공통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 공통감각에 의거하는 취미판단은 합목적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반론이 가능하다.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팬덤이 많기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걸그룹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칸트가 말한 미적 판단의 특성들은 굉장히 이상적인 것들이다. 만약 정말 칸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들 모두가 사심 없이 순전히 좋아라 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세계평화 실현일 것이다. 칸트는 미적 대상을 볼때 우리는 이 4가지 특성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주의할 점은 이는 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해석이다. 즉, '''그 대상이 아름다움을 내뿜어서 내가 그렇게 느끼는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느끼고 인식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흄도 이 부분에는 동의하였다. "아름다움은 사물안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안에 있다."] 즉, 소녀시대를 예시로 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칸트가 말한 미적 판단, 취미 판단이 실현되려면 어떤 심미적 대상은 소녀시대 수준 정도로는 택도 없다. 말 그대로 수십억 인류 모두가 좋아하는, 미적판단의 일치가 일어나야 하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칸트는 미가 숭고와 함께 그 자체로 마음에 들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 보았다. 이 둘은 특수한 감정으로서의 반성판단이다.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미적 판단)은 개인마다 따로 느끼지만,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전제했다. 아름다움과 숭고라는 감정은 지성 및 이성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를 요즘 식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취향은 다 다르지만 뭔가 좋아하는게 있다. 칸트는 이를 보편화해 나아가, 우리 모두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것이 서로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 본 것이다. 칸트는 이 취미 판단을 통해 이론적 인식(경험)과 실천적 인식(선험)을 매개할 수 있다 보았다.[* 18세기 당시 사람들처럼 칸트 역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결국 신으로 귀결된다. 기존의 종교적 가치와 자신의 철학적 사유가 조화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우리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즉 신이 만든대로)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탑재하고 있다 본 것이기도 하다. 반면 당시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윤리적 행동도 경험으로 훈련되어야만 할 수 있다 보았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조화시킨 것이고,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칸트를 대단하다 여기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4가지 특성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미와 숭고로 나눈다. * 미(beauty): 칸트는 미를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정의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성은 경험적 대상을 분류하고 규정, 정의하려는 인식능력이다. 반면 상상력은 판단력 산하에 있는 능력으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정신행위이다. 상상력은 앞서 말한 무목적성을 가지며, 따라서 그 자체로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당연히 이는 앞서 이야기한 예술지상주의(예술을 위한 예술)과 연관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때 자기목적성, 자기지시성을 따른다.(앞서 말한 무관심성) 그리고 칸트는 미적 쾌의 감정은 결코 사물이 주는 감각적 느낌이나 대상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봤다. [* 칸트의 말을 정말 제대로 따른다면, 진정한 미는 사물화, 구체화할 수 없다. 반면 이전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이 아름답다고 했으니... 둘중 하나가 틀린 셈.] 사물화된 것(예술품 같은 것)을 볼 때의 경험은 인식행위가 된다. 진정한 취미판단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개념을 떠나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합목적성에 의해서, 미적 쾌(만족)는 궁극의 목적을 항한다고 한다. 인간이 제작한 미술작품에 대한 평가는 단지 성질, 분량, 관계, 양상 에 근거하여 형식적으로 미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그래서 미학자들이 어쩔 수 없이 예술작품을 놓고 예를 들며 설명하긴 하지만, 미학자들은 그걸 진짜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라 확정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디까지나 흘낏 미의 특성을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다.] * 숭고(sublime): 아름다움은 일차적으로 모든 대상의 형상에 관계하나 숭고는 우리가 대상의, 그것도 어떤 무한한 크기에 대하여 느끼는 심미적 정서이다. 이것은 조화와 질서가 아닌 혼란과 무질서에 의해 유발된다. 칸트는 숭고를 논한 로마시대 학자 디오니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인용한다. 롱기누스에 따르면 숭고는 신 적인 것이며, 거대한 크기의 감각적 자연을 통해서 파악되며, 그 안에서 완결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물은 단지 이성적 이념을 매개하는 감성적 대상일 뿐이며, 크기를 존재론적으로 완결짓는 요소로 이해하지 않는다. 칸트는 숭고를 다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한다. * 수학적 숭고 : 단적으로 말하면, 매우매우 큰것이다. 칸트는 대표적으로 피라미드를 예시로 들지만, 그보다 더 큰것이라고 했다. 요즘식으로 굳이 말한다면 [[우주]]나 수학의 [[무한]] 개념을 생각해보자. 이 수학적 숭고를 느낄때 인간은 감정, 인지, 사고능력의 한계로 그 크기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 이 때 눈 앞의 감성적 자연은 '절대적으로 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조화나 규칙을 느끼게 되는 미와 달리([[황금비]]를 생각해보자), 수학적 숭고는 아예 인지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런 조화나 규칙을 발견할 수도 없고,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게 아니라 도리어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에 수학적 숭고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접했을때, 우리는 그것을 합목적적인게 아니라 도리어 반목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굳이 표현하면 아름답다고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 크기에 전율하며 압도당하게 된다고 할까? 칸트에 따르면 숭고의 감정은 불쾌의 감정이다. 이 불쾌감은 인간 이성이 이 끝 없는 무한한 것을 완전히 그려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에 좌절하기 때문에 나온다. 인간은 감성적 자연 내에서 절대적 총체성의 이념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한편으로는 도리어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에 한계가 있다는걸 아는 순간 어떤 만족을 얻는다 보았다. 인간 정신이 숭고한 그 어떤 것이 존재함을 인지했다는 것 자체가, 곧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표현하기에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상상력의 한계는 합목적적이라고 했다. * 역학적 숭고 : 수학적 숭고가 대상의 양적 크기를 그 중심 계기로 삼았다면, 역학적 크기는 대상의 힘의 크기가 관건이 된다. 수학적 숭고가 [[우주]]나 [[무한]]처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어떤 것이라면, 역학적 숭고는 폭풍이나 [[원자폭탄]]처럼 역동적으로 크게 휘몰아치는 힘이다. 다만 이 역학적 숭고를 느끼려면 '공포'와 '안전', 두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강화유리벽이 설치된 튼튼한 건물 안에서 경험할때에는 그 허리케인을 숭고롭게 보게되지만, 밖에 나가서 그걸 겪게 되면 끔살당한다. 어쨌든, 역학정 숭고는 대상의 힘의 크기가 무한한 것처럼 판정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길 원한다면 다음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philosophy.snu.ac.kr/center/analysisPDF/5-6.pdf|김상현, 『칸트 판단력 비판』(토픽맵에 기초한, 철학 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6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참고로 위 칸트의 미학론에 대한 내용은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시험 지문으로 출제되어 수많은 학생들에게 불지옥을 경험하게 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http://job.dcinside.com/board/view/?id=exam_new&no=2233051&page=1&exception_mode=recommend|문제가 많은 칸트 씨]] --윤사에서만 봐도 되는데 뭘 국어까지 마중 나오고 그래-- == 영향 == 독일의 칸트 연구자인 회페는 『임마누엘 칸트』에서 칸트의 영향을 다음 네 가지로 나누었다. 1. 독일 관념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셸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로 대표된다. 피히테는 칸트의 철학을 칭송하며, 자신의 철학을 칸트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를 더욱 보완시키는 철학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말년의 칸트 본인은 이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은 그 자체로 완성된 체계라고 반박하였다. 이후 셸링과 횔덜린(휘페리온을 쓴 그 시인 맞다)이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소 낭만주의적인 관념론을 전개하였고, 이후 셸링과 횔덜린의 친구였던 헤겔이 이들을 다시 비판하며 이른바 '객관적' 관념론을 주장하게 된다. 1. [[신칸트주의]]: 1870년부터 1920년까지 약 반 세기 동안 유럽의 강단철학을 지배한 사조이다. 에른스트 카시러, 헤르만 코헨, 하인리히 리케르트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주목해 과학주의적 철학을 전개하였다. 1. 현상학과 [[실존주의]]: [[후설]], 셸러, 야스퍼스, [[하이데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로 칸트가 주장한 '초월성(transzendetal)' 개념을 요리조리 재해석해서 자신들 고유의 사상에 도입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계승하였다. 1. 20세기 중반 이후: 영미권에서는 스트로슨, 셀라스 등의 분석철학 계열과 또다시 이들을 비판한 로티가 칸트를 계승하거나 비판한 학자들이다. 또한 [[롤스]]와 같은 영미권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은 칸트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롤스와 함께 칸트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가장 저명한 철학자로 뽑힌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정점인 칸트에 우호적일 리가 없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같은 텍스트에서 이질성, 다원성 등의 키워드를 뽑아내기도 했다. 가령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칸트 미학의 숭고를 자신의 이질성의 철학을 옹호하는 데 활용한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철학과 = 칸트학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 철학과 교수들은 20%의 고대 그리스 철학과 50%의 칸트철학, 30%의 기타를 공부했고 학생들은 99%의 맑스주의[* 알다시피, 당시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한창이던 시기였다.]와 1%의 기타를 공부했다는 농담도 있다. 영미철학, 프랑스철학의 균형잡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21세기 이후에도 한국 철학계에서 가장 깊게 연구되는 인물은 여전히 칸트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보통 철학과 학생들이 넘어야하는 가장 큰 벽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칸트. 대학뿐만아니라 중고교 교육과정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현행 [[윤리와사상]] 교과서에서도 칸트는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무래도 고교 과정에서는 의무론적 윤리와 목적론적 윤리를 대립항으로 간주하여 교육 및 학습하고 있는데, 칸트는 전자의 대표 주자를 넘어서 거의 유일한 주자로 여겨질 정도이다.[* 오죽 자주 나오면 대충 서양사상가 같고 모르겠으면 칸트로 찍고 푸는것이 [[윤리와 사상]]선택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다(...).] 2007 개정 교육과정 이후에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칸트 윤리학의 현대적 재해석 및 보완까지 교과서에 공식으로 다루고 있다. 로스라는 20세기 윤리학자가 내세운 조건부적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칸트 윤리의 절대주의적 도덕 원리를 다소 유연한 형태로 변형한 것이다. 물론 그 심오한 깊이를 모두 담을 수 없는 실제 수능 기출 문제에서 도덕적 딜레마가 나올 때(예를 들면 가족 1명과 다수의 모르는 사람 중 누굴 구해야하는지) 결과 등에 상관하지 말고 도덕적 명령에 따르셈ㅇㅇ 이러는 선택지 밖에 안나온다. 다만 이러한 태도가 자신의 대원칙이 어떻게 구체적인 맥락에 적용될 수 있을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했던 칸트의 입장을 얼마나 대변하는지는 미지수.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신다. 환경윤리에서 독특한 인간중심주의의 대표자로 나오고, 평화와 윤리에서는 국제연합에 기초한 영원한 평화 구상이 나온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응보주의 형벌론에 기초한 사형제 찬성론까지 다뤄진다. 결국 윤리와사상이든 생활과 윤리든 윤리 계열 교과를 수능에서 택하는 사람들한테 칸트는 넘어야 할 산 중 하나인 셈. 현대 철학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서도 칸트는 곧잘 나온다. 비록 형이상학에서는 흄이 주로 다루어지지만 실천철학에서 그의 입장은 계속되는 떡밥이다. 당장 큼직한 주제만 들어 보더라도 결과주의 vs 비결과주의, 양립불가능론 vs 양립가능론, 공리주의 vs 자유주의, 경향성 vs 실천적 추론과정(혹은 이성)과 같은 모든 주제에서 우측의 입장들은 칸트의 영향을 받은 입장들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데, 칸트가 『영원한 평화』라는 말년 저작에서 제시한 '세계 시민'이라는 정치적, 윤리적 주제의 선구자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가 발달하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면서 한 나라의 윤리적 문제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시민이라는 주제가 생겨났는데, 이게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자기 나라의 문제도 다 해결 못하면서 남에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 이미 윤리적인 문제를 한 나라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랑 전혀 상관없는 [[위안부 문제]]를 미국 의회에서 다루는 데 왜 그리 큰 관심을 가지는지 생각해 보자. 결국 이러한 윤리적 목소리가 독재국가들이 맨날 하는 말처럼 내정간섭이 아니라 정당한 윤리적 비판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현대 윤리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칸트는 인터넷은 커녕 유선전신이 갓 발명되던 시기인 18세기에 이런 문제를 주목하고 현대적인 세계 시민의 개념을 처음으로 꺼낸다.[* 그 전에도 이와 유사한 단어는 있었지만 지금의 세계 시민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그러면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주장하면서 세계 시민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결국 현대에 세계 시민이라는 주제를 윤리학적으로 다룰 때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칸트가 되었다.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의 주장들에도 오류가 있지만 적어도 철학이라는 학문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계속 언급될 철학자로 남을 것이다. == 여담 == 평생 자기가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경 30km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키가 작고(150cm 가량) 등이 굽어 꼽추처럼 보였다고 한다.[* [[학교대사전]]에서는 심지어 얼굴도 골룸처럼 생겼다고 깠다.] 용모가 추했지만 가보지도 않았던 다리의 어느 부분에 나사가 몇 개 박혀있는지를 맞출 정도로 박식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딱 두 번,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번은 [[장 자크 루소|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칸트는 마구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애초부터 귀족 출신이나 엘리트 출신은 아니라는 뜻. 칸트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를 잃었다. 칸트는 경건주의에 충실했던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 신학적 환경이 그의 철학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많이 주었으라 여겨진다. 물론 다니던 학교에서는 머리 좋은 수재로 유명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가정교사 일을 하며 따로 틈틈이 논문을 발표하고 시간강사 자격으로 강단에도 섰다. 엄청나게 박학다식했다. 칸트는 실제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서 온갖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강사 시절에도 철학 뿐만 아니라 별별 학문을 다 가르쳤다. 천문학, 물리학, 역사,수학, 화학, 지리,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강의를 했다. 화학 물질들로 불꽃을 만드는 기술도 가르쳤다고 한다. 재치 있게 말을 잘하고 쏙쏙 귀에 들어오게 요약을 잘해서 그의 강의실에는 항상 수강생들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다른 도시나 국가에서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러 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구 실력도 출중했다고 한다. --[[다마]] 수와 [[학점]]이 양의 정비례 관계에 있는 굇수 [[ㅎㄷㄷ]]--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년간에 걸친 학문활동의 결과 대학에서 수많은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며, 마음먹고 이빨을 까면 어디 가 보지도 못한 지역이나 본 적도 없는 동식물들에 대해 떠들어대는데도 학문적으로 하자가 없고 너무도 흥미로운 나머지 학생들은 눈과 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강좌 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강좌는 '''세계지리'''.[* 칸트가 태어났고 평생 그곳에서 생활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였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2차대전 후 러시아로 영토가 넘어가면서 지명이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고 교명도 '칼리닌그라드 대학'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다 2005년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슈뢰더 독일 총리가 참석한 행사에서 교명이 다시 '칸트 대학'으로 바뀌었다.] 루소의 저서를 접하기 이전까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 했다. 허나 당시의 시대상엔 급진적이었던 그 사상으로 평생 루소가 박해받았던 사실로 보건대, 이후에도 엘리트 주의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어려웠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얘]]도 좀 배웠으면 좋았을텐데-- <순수이성비판>은 세계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이지만, 막상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워낙 책이 장황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순수이성비판>은 칸트가 10년 가까이 시간을 투자해서 완성한 책이였다. 그래서 칸트의 지인이 칸트에게 "칸트 씨. 아무래도 책 판매량이 별로인 거 보니 이번 책은 망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소연하자 칸트 본인은 당당하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이 책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고. 과연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순수이성비판>은 조금씩 철학사의 중요한 저서로 떠올랐고, 칸트가 늙그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그 책으로 인해 칸트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이 사람의 깐깐함이 어느 정도인가 알 수 있는 이런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칸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체구가 왜소하고 용모가 추했기에 나이를 많이 먹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여인이 청혼을 하게 된다. 칸트는 그녀에게 '생각을 좀 해볼테니 기다려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은 후 결혼을 해야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두 썼다. 결국 결혼을 해야할 이유가 4개 더 많아서 결혼을 승낙하려고 했는데...'''7년이 지나있었다.''' 물론 그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서 [[망했어요]]. --맙소사-- …깐깐함이 인간으로 표현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생각보다 다정다감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밥을 혼자 먹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식사하기를 즐겨해서 매일 겨자소스를 만들었는데, 자기는 절대로 그 소스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외에도 집사가 10년 동안 자신이 정한 옷만 입다가 하루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실신 직전까지 갔다고한다.] 또한 술을 너무 마시는 사람이나 술을 아예 안 먹는 사람 둘다 경멸했다고 한다. 칸트는 독일 사람이었지만 맥주를 싫어하고 와인 애호가였다. 오죽하면 칸트에게 식사초대를 받은 사람 한 명이 선물로 맥주를 꺼냈는데 칸트가 식탁에 놓인 맥주를 보자 정중하게 맥주를 마실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니체]]는 이 사람을 저질이라고 말했다. 뭐 이해 안 되는 건 아닌게 저 깐깐한 성격 주제에 자기 욕망을 억누르거나 하지 않아서 70대였던 칸트의 소원이 '''"저 아랫마을 우물가 처녀 엉덩이를 보는 거."'''라고 농담이라지만 거리낌 없이 말하는 양반이었으니….사실 니체는 칸트의 사상과 정 반대에 위치한 철학자였다. 이성과 실증주의의 비대화를 까면서 선악의 존재 개념을 거부했던 니체였으니 칸트의 정언 명령이나 인식론이 무척 쓸데없는 소리로 들렸을 수밖에 없었다. 니체는 "서툴고 고루한 소인배이자 소도시 취향을 지닌, 그러면서 의무감에 사로잡혀 살았단 프로이센의 관리"라며 칸트를 폄하했다.(니체 전집 참조) 하지만 위의 일화들(사실과 다른 것도 꽤 있다고 한다)과는 달리 중년의 칸트는 매우 사교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학문 활동은 생활의 절반만을 차지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사회적 활동으로 채워졌다(오트프리트 회페, 임마누엘 칸트). 또 다른 전기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칸트 선생은 여성들 사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교적인 인물로 통하였으며, ...모든 사교 모임에 참석하였다." (뵈티거, I 133)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9살 때 발트시타인백작의 주선으로 본대학에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과목들을 청강할 때 칸트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를 접했다. 그래서 그런지 칸트 철학에 심취해 "하늘엔 빛나는 별. 가슴엔 실천이성"이라는 칸트의 명언을 어디엔가 써놓았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사교모임때도 언제나 와인을 함께했지만 스스로 정해진 양을 지켜가며 마셨으며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자는 보기에 나쁘고 술을 아예 마시지 않는 사람은 너무 심심한 사람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가 죽을 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술을 즐겨마시면서도 딱 정해진 양만 마셨는데 그의 마지막 순간. 이제 가망이 없자, 의사가 포도주를 따르면서 "마지막이니 실컷 드셔도 될 듯 싶군요." 라는 말을 하자 칸트는 '''"아니, 난 죽는 순간까지라도 그 정해진 양을 어기고 싶진 않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또는 취하는 건 싫소...라고 하던지. 하지만 죽기 직전 칸트는 집안인을 오랫동안 봐온 늙은 하인에게 와인 한잔을 청해 마시고는 '''"아, 좋다!(Es ist gut!)"'''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사망했는데 장례식날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운구행렬의 뒤를 따르고 시내의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을 울리는 등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tablealign=center> http://mw2.google.com/mw-panoramio/photos/medium/12077416.jpg?height=280 || http://farm9.staticflickr.com/8476/8101449495_acf7a24f1d_z.jpg?height=280 || |||| 칸트의 무덤 || 칸트는 자신이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묘지에 묻혔는데 칸트의 묘비명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실린 유명한 문구가 적혀 있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법칙)이다.' 근대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워낙 커서 세계 이곳저곳에 칸트 학회(Kant Society)가 있다. 국내에도 한국 칸트 학회가 있으며 주기적으로 세미나와 학회지를 낸다. 2013년 러시아에서 칸트 관련 논쟁을 벌이다가 총격사건으로 일단락된 모양.(……)([[http://www.reuters.com/article/2013/09/16/us-russia-kant-shooting-idUSBRE98F0DI20130916|로이터 기사]], [[http://kk1234ang.egloos.com/2952666|#]])~~실천적인 폭력의 맛 좀 보거라~~ --[[정종섭#s-4|독일의 정종섭이라 카더라]]-- == 저서 == 이 리스트에서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까지는 백종현 역(아카넷)의 칸트 선집에 포함된다. 백종현 역 이외에도 최재희 역(『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등)이나 이석윤 역(『판단력비판』 등) 등 여러 다른 번역본이 있으나, 백종현 역본이 있는 경우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별도로 소개하지 않았다. 번역서가 있는 경우, 번역서의 명칭을 따랐다. * 『형이상학 서설』(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1783): 『순수이성비판』의 방대함을 덜기 위해 칸트 자신이 좀 더 짧고 쉽게 쓴 이론 철학 교본. *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주제 면에서는 『실천이성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서술이 평범한 인간 인식과 대중적 윤리 지혜로부터 분석적으로 진전해가고 있어 일반 독자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다. *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7[1781])''' *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 *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 *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1793): 종교는 인간의 "모든 의무들을 신의 계명들로 인식함"에 그 참뜻이 있고, 진정한 성스러움은 인간이 선한 원리에 따라 '윤리적 공동체' 내지 '덕의 나라'를 지상에서 이룩하는데 있음을 역설하는 저서. 백종현 및 김덕영은 진, 선, 미에 이어 성을 다룬 제4비판서라고 칭하기도 했다. *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 Zum ewigen Frieden, 1795): 칸트는 인권이란 "인간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자 "신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라고 보았다. 신성성은 "우리가 인간들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인권보장이 법치국가에서만, 나아가 국제적으로는 '보편적 국가 연합'을 이룸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 책. 이후 [[국제정치학]]의 이상주의(후에는 자유주의)적 '세계정부' 구상이나, "민주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도일의 '''[[민주평화론]]'''의 기초가 되었다. [[신기동전기 건담 W]]에 등장하는 [[완전평화주의]]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 1797): 1부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와 2부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윤리형이상학이란 ‘자유의 형이상학’으로서 자유의 법칙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말한다. 1부는 법철학(정치철학)을 다루며, 2부는 『실천이성비판』에 뒤이어 도덕철학을 다룬다. 법은 외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도덕은 내면적인 자유의 법칙을 그 내용으로 갖기에, 양자는 하나로 묶이면서도 서로 구별된다. 참고로 이충진 역(2013, 이학사) 『법이론』이 이 책의 1부에 해당한다. *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1798): [[미셸 푸코]]가 박사학위 부논문으로 이 문헌을 불역하고, 긴 서설을 붙였다. 이 서설은 국내에도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2012, 김광철 역, 문학과지성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 『교육학 강의』(Über Pädagogik, 1803[유고. 링크 편집]): 말 그대로 교육학에 대한 강의이다. 조관성 역(2007, 철학과현실사)이 있다. * 『학부들의 논쟁』(Der Streit der Fakultäten, 1798): 이 작품은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과 함께 칸트의 생전에 그 스스로 출간한 마지막 저술이다. 본래 이 작품은 칸트가 순수한 종교론과 경험적 계시 종교론의 충돌로서의 철학부와 신학부와의 논쟁만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장소’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부학적-심리학적 분과인 의학부와 심리학적-형이상학적 분과인 철학부 사이의 논쟁, 순수한 법론과 경험적 정치의 충돌에 대한 철학부와 법학부의 논쟁으로까지 확대 구성하게 된 것이다. 오진석 역(2012, 도서출판b)이 있다. *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Beobachtungen über das Gefühl des Schönen und Erhabenen, 1764): 『판단력 비판』이 쓰여지기 26년전에 나온, 칸트 미학의 초기저술. 이재준 역(2005, 책세상)이 있다. * 「감성계와 지성계의 형식과 원리들」(De mundi sensibilis atque intelligibilis forma et principiis, 1770): 칸트의 교수취임 논문으로, 칸트가 '비판기'로 넘어가는 중간과정에 있는 책이라고 한다. 최소인 역(2007, 이제이북스)이 있다. *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6): 19세기 독일어권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외르스테드가 강한 영향을 받았고, [[쿠르트 괴델]] 역시도 비엔나 서클에서 이 책을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국역본은 없으며, 마이클 프리드만Michael Friedma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의 영역본이 있다. 마이클 프리드만(2012, 박우석, 이정민 역, 서광사)의 『이성의 역학』에 관련된 내용이 약간 소개된다. * 「속설에 대하여」("그것은 이론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실천적으로는 쓸모없다"는 속설에 대하여; Über den Gemeinspruch: Das mag in der Theorie richtig sein, taugt aber nicht für die Praxis, 1793): 오진석 역(2011, 도서출판b)이 있다. * 『칸트의 역사철학』: 이한구 역본(2009, 서광사)의 제목이다. 이 역본은 역사철학에 대한 7개의 논문을 모은 것이다. 이 중 위의 5개 논문은 학술원판 전집 8권에 실려있고, 학부들의 논쟁 2부는 7권, 낙관주의에 관한 시론은 2권에 실려있다. -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4): [[미셸 푸코]]가 말년에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터넷에서 정지인·강유원 역(2006)을 찾을 수 있고, 별도로 영어 중역인 정성훈 역도 있다. -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ürgerlicher Absicht, 1784) - 「헤르더의 인류 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Rezensionen von J. G. Herders Ideen zur Philosophie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1785) - 「추측해본 인류 역사의 기원」(Mutmaßlicher Anfang der Menschengeschichte, 1786) - 「만물의 종말」(Das Ende aller Dinge, 1794) - 「다시 제기된 문제: 인류는 더 나은 상태를 향해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는가?」 (위의 『학부들의 논쟁』 2부) - 「낙관주의에 관한 시론」(Versuch einiger Betrachtungen über den Optimismus, 1759) [각주] [[분류:독일의 인물]][[분류: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