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tablealign=center><#FFFFFF><table bordercolor=#003768><tablewidth=100%><:>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0/FIFA_Logo_(2010).svg/2000px-FIFA_Logo_(2010).svg.png?width=40{{{#003768 '''역대 [[FIFA 월드컵]]'''}}}http://www.vectorsland.com/imgd/l99096-world-cup-logo-19144.png?width=25|| ||<width=30%><|2><:> 초대 월드컵 시작 ||<:> {{{+1 → }}} ||<:><width=30%>1회||<:> {{{+1 → }}} ||<:><width=30%> 2회 || ||<:> {{{+1 → }}}||<:><#DCDCDC>'''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1 →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분류:FIFA 월드컵]] [[파일:attachment/Uruguay_1930_World_Cup.jpg|width=250&align=right]] [목차] == 개괄 == http://ncc.phinf.naver.net/ncc02/2010/5/8/171/uruguay.jpg 이 월드컵의 홈팀이자 우승팀인 당시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표팀]]은 [[최종보스|아주 초강력한 팀]]이였다. 이 당시의 우루과이는 다른 국가들과 축구 실력이 너무 심하게 차이날 정도로 초강력함이 극에 달했는데 그나마 이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의 [[라이벌]]이라고는 지구상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밖에 없을 정도였다.[* 당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 최고의 흥행 카드를 만들 수 있는 팀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였다. 하지만 그 두 팀은 1953년에야 첫 시합을 가졌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비공식 세계 최강팀이라는 명성을 가질정도로 최전성기 시절이었다.] 월드컵이 생기기 전 축구 최고의 무대는 [[올림픽]]이었는데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1924 파리 올림픽|1924년]]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년]] 두 대회를 [[연속우승|연패]]했었고, 그 주축 멤버들이 대부분 [[FIFA 월드컵|월드컵]]에 나갔다. 그 주축 멤버들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80년 가까이 우루과이 A매치 최다 득점기록을 가지고 있던 [[엑토르 스카로네]][* [[디에고 포를란]]이 이 기록을 깨는데 무려 79년이 걸렸다. 그런데 포를란은 82경기, 스카로네는 52경기라는 ~~아주 사소한~~ 출전수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중원의 살림꾼이자 흑진주 [[호세 안드라데]], 그리고 우루과이의 수비의 핵. 우루과이, 그를 넘어 역대 최고급의 [[주장]]이자 첫 월드컵 우승 주장인 [[호세 나사치]] 등이 모두 올림픽 2연패의 멤버들이다. [[흠좀무]].. 1930년에 개최된 첫번째 [[FIFA 월드컵]]으로, 지금의 월드컵과 비교해 보면 전반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월드컵'''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어느 월드컵 보다도 부가가치가 높은 월드컵이 되었다. == 지역 예선 == || http://ncc.phinf.naver.net/ncc02/2010/5/7/164/2.jpg || || [[줄 리메]] || 이 대회는 첫 월드컵이라서 홍보 차원에서 지원하는 모든 팀들에게 지역예선 없이 전부 본선에 진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우루과이]]에서 개최된다고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유럽의 보수세력들은 월드컵을 아예 저질대회로 취급하면서 불참을 유도했고[* 게다가 줄 리메는 프랑스인이고 결국 [[프랑스]]의 주도로 인해 월드컵이 개최된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증오하던 [[잉글랜드]]는 더더욱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독일]],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이 말려들어 유럽의 대다수 국가가 불참했으나, 그나마 [[줄 리메]]의 조국인 [[프랑스]]와, 프랑스의 거의 [[데꿀멍]] 수준의 간청으로 참가해준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참가했다. 말 그대로 [[줄 리메]]는 유럽 각국을 돌며 제발 [[FIFA 월드컵|월드컵]]에 참가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사재를 털어서 맛있는 것도 잔뜩 사줬다. 현재 시점에서 월드컵에 한 번 출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축구 한경기만 뛰어줘, 해달라는 거 다 해줄께. 돈? 말만 해, 얼마든지 있어...~~ == 대회 엠블럼·마스코트·공인구 == === 엠블럼 === [[파일:/image/etimesi/2010/06/17/1_01_Copy(820).jpg]] 첫 월드컵의 포스터이다. 이 당시 월드컵의 공식 명칭은 [[FIFA 월드컵]]이 아니라 줄리메 배 세계 축구 선수권대회였다. 당시 마스코트나 [[월드컵 공인구|공인구]] 같은 건 없었다. === 우여곡절 === 당시 [[우루과이]] 정부에서 선수들의 체류비용과 교통비 등 부대비용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해서 일단 [[우루과이]]가 개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긴 했으나 문제는 그 먼 거리를 항해해야만 하는 부담 때문에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불참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표팀]]도 [[대서양]]을 건너는데 보름이 걸려서야 간신히 우루과이에 도착했다.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팀들이 떨어진 것으로 미루어보면 결과론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항공편 등의 교통수단이 매우 미비했던 때라서 홈 어드밴티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실제로 이 후에 열린 모든 월드컵에서도 남미 지역에서 열린 대회는 모두 남미 대륙에서 우승 팀이 나왔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 가서야 독일이 4강전에서 [[미네이랑의 비극|브라질을 압살]]하고 결승에 올라 접전 끝에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 컵을 들어올림으로써 징크스가 깨진다.] 결국 [[줄 리메]]와 우루과이 정부가 앞장서서 유럽 국가들을 설득시킨 끝에 유럽팀 전원불참은 간신히 모면했다. 또한 [[월드컵 공인구|공인구]]가 정해지지 않아 각국 대표팀들끼리 서로 자국의 공을 사용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특히 결승전이 가장 극심했는데 그래서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제 축구공을,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제 축구공을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가 2대 1로 이긴 채로 끝났지만, 후반전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가 3골을 넣어 4대 2로 우루과이의 역전승으로 끝난다] == 대회 진행 == 현재는 개최국이 개막전을 하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에는 전 대회 우승국이 개막전을 치렀다] 우루과이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줄 리메]]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개막전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의 첫경기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대신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로 정했다. 그런데 원래 16개 팀 이상 초청해서 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남미의 팀까지 다 합쳐도 13개 팀밖에 출전하지 않아 조별리그 직후 준결승을 치루는 형국이 되었다. ~~다 패해도 16강, 조2위가 8강~~ 이 대회에서 역대 월드컵 최소관중경기가 나왔으니... 바로 조별리그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대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의 경기 되겠다. 이 경기에서 관중의 수는 불과 300명에 지나지 않아 역대 월드컵 역사상 최소관중경기가 되었다.[* 피파의 공식 보고서에는 2549명이 왔다고 되어있기는 하다만 대부분 이 경기엔 300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10년전의 피파 보고서에도 역시 300명이 왔다고 써 있었다] == 조 편성 ==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4강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 조별 라운드 || || 1조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 || 2조 ||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 || 3조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 ||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 || 4조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 ||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 현재와 같이 조 이름에 알파벳이 쓰이기 시작한 대회는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이다]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 == 결선 토너먼트 == ||<table align=center><width=5%> 경기 ||<width=20%> 대진표 ||<width=5%> 경기 ||<width=20%> 대진표 || || A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1|4강 1경기]] [br]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1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3><:> C ||<|3><:>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2.1|결승]] [br]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2:4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B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s-1.2|4강 2경기]] [br]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6:1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 ||<table align=center><rowbgcolor="#FFD700"> '''{{{+2 1930 FIFA 월드컵 우승}}}''' || || http://www.worldstatesmen.org/uy.gif?width=200 [br]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첫번째 우승 [br] (★) || == 출전선수명단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출전선수명단|항목 참조]] == 기록실 == 첫 월드컵이니 만큼 첫 기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 월드컵 첫 경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개막전, 1930년 7월 13일) * 월드컵 첫 승리: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조별 리그. 1930년 7월 13일) * 월드컵 첫 득점: [[뤼시엥 로랑]]([[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19분(조별 리그. 1930년 7월 13일) * 월드컵 첫 [[페널티 킥]] 골: 마누엘 로사스([[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vs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51분(조별 리그. 1930년 7월 16일) * 월드컵 첫 멀티골: 앙드레 마쉬노([[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43분&87분(조별 리그. 1930년 7월 13일) * 월드컵 첫 [[해트트릭]]: [[베르트 파테노드]]([[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vs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조별 리그. 1930년 7월 17일)[* 본래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나 2006년 11월에 공식 수정] * 해트트릭 * [[기예르모 스타빌레]]([[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조별 리그. 1930년 7월 19일) * [[페드로 세아]]([[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vs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준결승. 1930년 7월 27일) * 월드컵 첫 [[클린시트]]: 지미 더글러스([[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vs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조별 리그. 1930년 7월 13일) * 월드컵 첫 [[자책골]]: 마누엘 로사스([[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vs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51분(조별 리그. 1930년 7월 16일) * 월드컵 첫 퇴장: 플라시도 갈린도([[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vs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조별 리그. 1930년 7월 13일) * 최다 득점 경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 vs 3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조별 리그. 1930년 7월 19일) * 최다 득점차 경기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 vs 1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준결승. 1930년 7월 26일)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6 vs 1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준결승. 1930년 7월 27일) * 월드컵 최초 역전승: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6 vs 1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준결승. 1930년 7월 27일) * 월드컵 첫 결승전 득점: 파블로 도라도([[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1930년 7월 30일, vs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12분 * 무득점팀: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18경기에 70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3.89골을 기록했다. * 이 대회는 유일하게 '''무승부가 없었다.''' == 결과 == '''1위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2위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3위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전적이 같긴 하지만 골 득실차로 3위. 하지만 그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참조] 4위 -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rowbgcolor=#FFD700><:> 1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4 || 4 || 0 || 0 || 15 || 3 || +12 || '''8''' || '''우승''' || ||<rowbgcolor=#C0C0C0><:> 2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5 || 4 || 0 || 1 || 18 || 9 || +9 || '''8''' || 준우승 || ||<rowbgcolor=#B8860B><:> 3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3 || 2 || 0 || 1 || 7 || 6 || +1 || '''4''' || 3위 || ||<rowbgcolor=#F0E68C><:> 4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3 || 2 || 0 || 1 || 7 || 7 || 0 || '''4''' || 4위 || ||<rowbgcolor=#FFA7A7><:> 5 ||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 3 || 2 || 0 || 1 || 5 || 3 || +2 || '''4'''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6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2 || 1 || 0 || 1 || 5 || 2 || +3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7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 3 || 1 || 0 || 2 || 4 || 3 || +1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8 ||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 || 2 || 1 || 0 || 1 || 3 || 5 || -2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9 ||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 2 || 1 || 0 || 1 || 1 || 3 || -2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0 ||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 2 || 0 || 0 || 2 || 1 || 4 || -3 || '''0'''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1 ||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 || 2 || 0 || 0 || 2 || 0 || 4 || -4 || '''0'''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2 ||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 2 || 0 || 0 || 2 || 0 || 8 || -8 || '''0'''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3 ||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 3 || 0 || 0 || 3 || 4 || 13 || -9 || '''0''' || 1라운드 || === 수상 === '''득점왕''' http://3.bp.blogspot.com/_m0u9SiETH-U/S1YbV2jvt9I/AAAAAAAAA2U/8o_rMTiYzB8/s320/Guillermo+Stabile.jpg 기예르모 스타빌레 1위(8골) - '''[[기예르모 스타빌레]]([[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그런데 스타빌레는 이 193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단 한차례도 국가대표 대항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4경기 출전 8골로 이 위대한 선수의 A매치 기록은 끝났다] 2위(5골) - [[페드로 세아]]([[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3위(4골) - [[베르트 파테노드]]([[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베스트 11''' 골키퍼: 엔리케 바예스테로스([[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풀백: [[호세 나사치]][* 우루과이에서는 50년 월드컵 우승 당시의 주장이었던 [[옵둘리오 바렐라]]보다 앞서 역대 최고의 주장으로 손꼽히고, 첫 월드컵 우승팀의 주장이란 프리미엄으로 인해 역대 축구선수들 가운데 주장의 랭킹을 정하면 빠지지 않는 선수 중 하나이다. 포지션은 수비수]([[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밀루틴 이브코비치]]([[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하프백: [[루이스 몬티]]([[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알바로 헤스티도]], [[호세 안드라데]](이상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공격수: [[페드로 세아]], [[엑토르 카스트로]], [[엑토르 스카로네]](이상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기예르모 스타빌레]]([[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베르트 파테노드]]([[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페어플레이상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 뒷 이야기 == * [[우루과이]]는 월드컵이 개최된 해가 자국의 건국 100주년[* [[우루과이]]는 초대 월드컵이 열리기 100년 전인 1830년에 [[브라질]]에서 독립하였다]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첫 월드컵을 유치하고 싶었고 결국 월드컵 유치도 성공하고 우승도 했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1924 파리 올림픽|1924년]]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년 올림픽]] 우승 멤버이자 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안드레스 마살리[* 마살리는 [[허들]]에서 남미 챔피언을 차지한 적도 있는 뛰어난 육상선수이기도 했다.]가 [[통금]] 시간을 어기고 [[아내|부인]]과 [[데이트]]를 즐기다 걸렸다. 마살리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고 그 이후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그렇게 마살리를 대신하여 나간 골키퍼가 엔리케 바예스테로스였고 그는 초대 월드컵 우승팀의 주전 골키퍼가 되는 영광과 함께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대회 최우수 골키퍼]]가 되었다. ~~후보 골키퍼가 월드컵 최우수 골키퍼하는 본격 지구방위대~~ *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 선수의 선발에는 당시 [[루마니아]] [[국왕]]이었던 카롤 2세의 엄청난 간섭이 있었다.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는 이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당시 진짜 감독이었던 [[가스통 바루]]와 스타 수비수 [[마누엘 아나톨]][* [[바스크]] 출신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대표 수비수. 1929년까지 [[프리메라 리가|스페인]]에서 뛰었지만 대표팀 생활은 프랑스에서 다했다. 1930년 3월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와의 경기에서 40m짜리 중거리슛을 꽂아넣어 유일한 A매치 득점을 해냈다고 전해진다. 통산 A매치 16경기 출전 1골]이 불참했다. 그 때문에 코치였던 카우드롱이 대신 감독을 맡았다. *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의 주장이었던 프레귀뉴는 [[축구]] 뿐만 아니라 [[배구]], [[농구]], [[수구]], [[하키]], 트랙&필드 [[육상]] 경기 선수도 겸업했다. * 축구 선수들이 해외의 클럽에서 뛰는 것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시기라 거의 모든 선수들이 자국 리그에서 뛰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는 [[이반 베크]] 등 3명의 선수가 [[리그앙|프랑스 리그]]에서 활동하였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첫 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배에 마구잡이로 탑승하여 정원초과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는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 이 월드컵은 오직 [[몬테비데오]] 단 한 곳에서만 진행되었으며 월드컵 경기를 진행한 경기장도 '''포시토스 경기장''',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 그리고 결승전을 치룬 '''센테나리오 경기장[* 피파에서 인정한 유서깊은 경기장 중 하나이며 이와 동급인 곳은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웸블리]], [[브라질]]의 [[에스타디우 두 마라카낭|마라카낭]], [[아르헨티나]]의 [[엘 모누멘탈]], [[이탈리아]]의 [[산 시로]], [[스페인]]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등이 있다. 현재 우루과이의 최고 명문팀인 페냐롤의 홈구장이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우리나라 대표팀]]도 2002년 2월에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를 이 곳에서 했었다]'''. 이렇게 3곳 뿐이었다. 메인 스타디움이었던 센테나리오 경기장이 월드컵이 열리는 도중인 7월 18일에 완공이 되었고 이후의 경기는 오직 센테나리오 경기장 한 곳에서만 치뤘다. 그러다보니 1조에서는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와 [[프랑스]]가 경기를 끝낸지 30분만에 같은 구장(센테나리오 스타디움)에서 다음 경기인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는 후안 호세 트라무톨라와 [[프란시스코 올라사르]]의 2명 공동감독 체제였는데 이 중 트라무톨라는 [[1902년]] 생으로 만 27살[* 10월 21일이 생일인지라 아직 생일이 자니지 않아서 만 나이로는 27살이 맞다.]이었으며 이로서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축구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트라무톨라는 유명 하프백이자 국가대표까지 지냈던 올라사르와는 다르게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니었으며 원래는 기술 감독의 자리에서 올라사르를 보좌했었다. 그 이후에 트라무톨라는 감독 자리에 재미를 붙여 아르헨티나 프로팀의 감독 자리를 맡기도 했다.] 심지어는 팀의 미드필더인 후안 에바리스토, 아돌포 수멜수, 공격수인 카를로스 스파달로와 동갑내기였고 같은 팀의 미드필더인 [[루이스 몬티]]보다 1살, 공격수인 나탈리오 페리네티보다 2살, 수비수인 [[라몬 무티스]]보다 3살이 어렸다. 그리고 옆동네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에서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당시 칠레의 감독 [[기오르기 오르스]]는 1901년생이었지만 수비수 중 [[울리세스 포이리에르]]는 1897년 생으로 당시 참가한 선수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나이 차이로만 따지면 칠레쪽이 더 심했다.[* 이런 경우가 현대의 클럽팀에서도 가끔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티아스 잠머]]와 [[위르겐 콜러]]. 둘 다 독일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잠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다. 잠머가 2000년에 수석 코치를 거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위르겐 콜러는 아직 현역이었다. 콜러가 잠머보다 2살 위.]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전에서의 부심 2명은 멀쩡한 참가국인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와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의 감독이었다. 한술 더 떠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의 감독이었던 울리세스 사우체도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경기에 주심을 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페널티 킥]]을 3개나 불었다. 또 결승전에서도 선심을 보았다. 하지만 모두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와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와는 다른 조에 소속된 팀들의 경기였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수비수 로사스는 1912년 생으로 [[FIFA 월드컵|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 18살에 불과하였다.[* 다만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에 로사스보다 2달 늦게 태어난 카르발류 레이치가 있어서 초대 월드컵 최연소 선수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실패했다] 하지만 월드컵 최초이자 초대 월드컵의 유일한 [[자책골]]을 기록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옛날 기록으로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의 경기에서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의 곤살레스가 [[자책골]]을 기록해서 기록을 양분했지만 이것이 [[베르트 파테노드|파테노드]]의 골로 수정되면서 로사스가 독박을 쓰게 되었다]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은 월드컵 2조 첫경기인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이전에 5년 가까이 A매치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이것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이 무기력하게 탈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대표팀]]은 13개의 팀 중 유일하게 후보 [[골키퍼]]가 없는 팀이었다. 결국 유일한 [[골키퍼]]였던 지미 더글러스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후반에 어깨 부상을 당했고 결국 [[시망|시원하게 망했다]]. * 원래 이 대회 득점왕인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주전 선수가 아니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팀]]의 주전 공격수이자 주장이었던 [[마누엘 페레이라]]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시험|중간고사]]를 봐야 한다면서 잠시 귀국해버리는 바람에(...) 그 땜빵으로 들어간게 스타빌레였다. *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는 선수들이 개최국인 [[우루과이]]를 응원하는 문구를 유니폼에 새겨오는 훈훈함을 연출했다. 그리고 저 옷을 입고 실제 시합까지 뛰었다. 하지만 훈훈한건 훈훈한거고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는 2경기에서 8골을 내주며 [[광탈]]했다.~~만약 저 옷을 입고 본선에 진출해서 우루과이를 격파하면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코메디가 되었을 듯 하다.~~ http://cdn.bleacherreport.net/images_root/slides/photos/000/222/740/soccer_g_bolivia1930_576_display_image.jpg?1273610958 우루과이 형님들 잘 좀 봐주세요. Viva Uruguay!! ~~그리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U 유니폼을 입은 한명이 사라져서 [[게이|URUGAY]]가 된 [[사진]]이 남아있는건 안자랑~~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이 대회 4번의 시합에서 15골을 넣어 경기당 평균 3.75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직도 월드컵 우승팀 중 최고의 기록이다. 역대 국가대표 팀 중 자타공인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대표팀]]도 이 기록에는 미치지 못한다. * 첫 우승팀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대표팀]]의 출전 멤버 중 최후의 생존자는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로 1984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보까지 영역을 넓히면 에밀리오 레코바로 1992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2010년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의 대표 선수였던 [[프란시스코 바라요]]가 100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현재 더 이상 이 대회에서 참가했던 선수 중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http://4.bp.blogspot.com/_nljFwmmfk2s/TH0PNTYrczI/AAAAAAAAJD4/IpgBpOJs8Bo/s1600/francisco-varallo-e-homenageado-na-argentina-1266464550372_300x300.jpg 프란시스코 바라요의 100번째 생일 == 대회 이후 == 첫 월드컵 우승의 영광을 놓친 [[아르헨티나]]는 머리끝까지 빡쳐서 결국 자국에 있는 [[우루과이]] [[대사관]]을 때려부수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으며 [[우루과이]]와는 1년 정도 단교를 선언했다. 그런데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브라질]]에서 [[독립]]한 나라이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국기가 닮은 이유가 이것.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잊지 않고자 [[아르헨티나]] 국기를 모방하여 탄생한것이 오늘날까지 쓰는 [[우루과이]]의 국기이다] ~~어?!~~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그 다음 월드컵]]이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자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 유럽 국가들이 대거 불참한 앙갚음으로 불참한다... 만 [[2차 세계대전]] 및 국내문제로 무려 20년 동안이나 월드컵에 불참하고 말았다. 비록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20년 후]]에는 다소 삐걱거리는 면을 보여주었지만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브라질]]에서 [[마라카낭의 비극|다시 한 번 월드컵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각주]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