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tablealign=center><#FFFFFF><table bordercolor=#003768><tablewidth=100%><:>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0/FIFA_Logo_(2010).svg/2000px-FIFA_Logo_(2010).svg.png?width=40{{{#003768 '''역대 [[FIFA 월드컵]]'''}}}http://www.vectorsland.com/imgd/l99096-world-cup-logo-19144.png?width=25|| ||<width=30%><:> 3회 ||<:> {{{+1 → }}} ||<:><width=30%> 4회 ||<:> {{{+1 → }}} ||<:><width=30%> 5회 ||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1 → }}} ||<:><#DCDCDC>'''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 {{{+1 →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분류:FIFA 월드컵]] [[파일:attachment/Brazil_1950_World_Cup.jpg|width=250&align=right]] [목차] == 개괄 == [[1950년]] [[6월 24일]]부터 [[7월 16일]]까지 개최된 4번째 [[FIFA 월드컵]]으로, 역대 월드컵 중 두 번째로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최된 대회이자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초대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남반구]]에서 개최된 대회이기도 하다.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지난 대회]]와 같이 16개의 팀에게 출전 자격이 주어졌으며, 개최국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 지난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를 제외한 14개의 티켓을 위해 참가한 국가는 총 31개였다.[* 하지만 팀은 32개이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국가)|아일랜드]]의 정세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예선 도중에, 또는 기껏 예선을 통과해놓고 기권했던 국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 대회에서는 경기 수익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경기라도 더 많이 치르게 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경기방식을 토너먼트 대신 리그제로 치렀기 때문에 상당히 기형적인 조편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월드컵 역사상 [[등번호]]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는데 지금처럼 선수에게 매겨진 것이 아니라 포지션에 따라 매겨진 것이었다.[* 즉, 한 선수가 다른 경기에 그대로 뛰어도 포지션이 바뀌면 등번호가 바뀌는 식이었으며 선수가 바뀌어도 포지션은 같은 다른 선수가 스타팅 멤버에 오르면 등번호는 바뀐 선수가 그대로 사용하는 식. 이후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대회에서 월드컵에 데뷔한 [[펠레]]가 이런 식으로 등번호 10번을 부여받았는데, 그 이후 펠레가 눈부신 활약을 선보이면서 세계를 주름잡자, 등번호 10번은 지금도 축구에서 에이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등번호가 된다.] 결승 리그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가 난적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을 꺾고 2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 당시 [[대한민국]]은 [[여순사건| 우리 민족]] [[한국전쟁|최대 비극으로]] 인해 예선에조차 참가하지 못했다.[* 설령 인도와의 티켓 경쟁에서 이겨서 [[브라질]]에 갔다고 해도 [[6.25 전쟁|더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에 기대만큼의 성적을 거뒀을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휘슬이 울리자 [[6.25 전쟁|그 일]]이 시작되었다~~ == 개최지 선정 ==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원래 개최되었어야 할 1942년과 1946년 월드컵은 전쟁, 전후 복구 문제 등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1942년 월드컵 자체가 [[브라질]]이 강력한 개최 후보국이었던 관계로[* 1942년에 세계대전이 없어서 [[FIFA 월드컵|월드컵]]이 열렸다고 가정한다면 당시 개최지 투표에서는 [[독일]]과 [[브라질]]이 월드컵 개최를 놓고 다투었겠지만 이전 두 대회를 유럽에서 개최했기 때문에 [[브라질]] 쪽이 확률이 더 높긴 했다] [[브라질]]에서 1950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것에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굳이 [[독일]]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하더라도 일부 중립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전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FIFA 월드컵|월드컵]]을 개최할 여력이 없었기도 했다. 그래서 [[브라질]]이 단독으로 입후보를 하였고, 개최권을 따오는 데 성공한다. 원래는 1949년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이 월드컵의 개최를 확정지은 1946년의 룩셈부르크 총회에서 1950년으로 확정했다. == 지역 예선 == 이 대회 지역 예선의 자세한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지역 예선]] 그리고 이런 일들이 있었다. * [[전범]] 국가인 [[동독 축구 국가대표팀|동]]·[[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은 여러가지 제재를 받았는데, 이 대회 출전 자격 박탈도 그 중 하나였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은 ~~개털이였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한국]]에도 질 정도로~~ 축구실력이 형편없었으니 아쉬울게 없지만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은...] 때문에 이 대회는 [[FIFA 월드컵|월드컵]] 역사상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초대 대회]]와 더불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이 불참한 단 두 번의 [[FIFA 월드컵|월드컵]][* 그런데 희한하게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이 없는 이 두 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가 우승했는데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이 두 번 밖에 우승을 못했다.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가 우승하기 위해서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을 [[FIFA 월드컵 지역 예선|지역 예선]]에서 탈락시켜야 한다~~ [[징크스]]를 잘 찾아보면 이런 [[징크스]]도 있다]이다. 하지만 같은 전범국이었지만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합병당한거였고, 이탈리아는 X맨이라...-- *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는 [[유로 2012]]에서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유로 2012의 독일의 경우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과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2010 월드컵]]의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그리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2010 월드컵]]의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그리스]]의 경우 [[파나시나이코스 FC]]의 선수들을 과반수 차출했다]마냥 특정팀에서 과반수의 선수들을 차출해서 국가 대표를 꾸렸었다. 하지만, 당시 [[세리에 A]]를 5연패하고 그 국대 멤버 중 과반수가 있던 [[토리노 FC]] 팀이 [[리스본]]에서 [[SL 벤피카]]와 친선 경기를 치르고 오는 도중에 [[수페르가의 비극|비행기 사고]]를 당해 선수 18명과 스탭 5명이 사망했다. 당시 [[토리노 FC|토리노]]의 베스트 11이 전부 사망했으며, [[리스본]]에서 경기를 치렀던 선수들 중 후보 선수 루이지 쥴리아노만 [[여권]] 문제로 [[리스본]]에 묶여 있다가 화를 면했다. 나머지 4경기는 유스들을 콜업해서 경기를 치렀고 결국은 우승했다.[* 1949년에 일어난 이 사고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유명한데, 이 당시에 사망한 선수 중 가장 아까운 이로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플레이 메이커 [[발렌티노 마촐라]]를 꼽을 수 있겠다. 60년대에 이탈리아와 유럽을 주름잡았던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주축 플레이 메이커 [[산드로 마촐라]]의 아버지이다] 정말로 [[망했어요]], [[지못미]]. 결국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는 치명적인 전력의 구멍을 만회하지 못하고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에 밀려 조별 리그에서 탈락, 사상 최초로 디펜딩 챔피언이 1 라운드에서 [[광탈]]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사고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탈리아가 이를 완전히 만회하기까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써야 했으며, 이로 인해 1군 선수를 몽땅 잃은 [[토리노 FC|토리노]]는 리그의 주도권까지 같은 연고지를 쓰는 [[유벤투스]]에게 넘겨주게 된다]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역시 이 대회에 불참했는데 그 이유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 개최의 실패와 더불어 1946년 월드컵 개최에 성공했으나 전후 복구 문제로 인해 그 월드컵이 취소된 데다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의 라이벌 의식이 최악으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의 젊은 공격수 [[아데미르]]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수비수 호세 바타글리에로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6대 2로 승리를 챙겨간 것에 앙갚음하듯 이듬해의 [[코파 아메리카]] 대회 결승전에선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을 홈으로 불러들여 초유의 난투극을 벌인 끝에 2대 0으로 이겼다.[* 이 난투극의 시작점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의 공격수 [[자이르 다 호사|자이르]]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의 [[주장]] 호세 살로몬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관중들이 난입하였고 경찰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경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호세 살로몬은 당시 29살이었고, 이 태클로 인해 다시는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1년 후에 은퇴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두 팀은 10년간 시합을 하지 않았다. 또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지역 예선에서 같은 조에 있던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와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는 자기들끼리 두 번 시합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의 기권으로 인정되지 않고 자동으로 [[브라질]]에 가는데 성공하였다. * 이전의 월드컵에서 강호로 군림했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와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는 아예 출전을 거부했다. * [[FIFA]]에서 [[영국]]을 월드컵에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 홈네이션 4개국[*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웨일스]],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일랜드 북부지방]]-현재의 북아일랜드]들로만 예선을 치룬 후 그 중 상위 2개국을 월드컵에 진출 시켜준다는 파격적인 ~~편애~~ 제안으로 홈네이션끼리만 따로 예선전을 치뤘다. 그 결과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가 1위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가 2위로 진출권을 따냈다. 자세한 내용은 지역 예선 항목 참조. 그러나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는 예선전 전부터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에게 밀리면 월드컵 안 나간다고 공언했었고 결국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에게 밀리자 월드컵 진출권을 따 놓고도 기권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대우받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는 정작 본선에서 시망~~ * 50년대 이전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대표팀]]의 월드컵 출전사를 보면 월드컵에 참가했던 선수들 중 A 매치 출전 횟수가 10회를 넘는 선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이 자주 바뀌었고 상당수가 축구선수 외에도 투잡을 뛰었으며[* 예를 들어 하프 월터 바르-Walter Bahr는 고교 교사, 골키퍼 프랭크 보기-Frank Borghi는 삼촌의 장례식장에 고용된 영구차 기사. 다른 사람들도 접시닦이, 우편배달부 등등 다양한 직업이 있고 이 중 상당수는 대학생들이었다] 인접국 출신 불체자들에게 미국국적을 주는 조건으로 뛰게 하기까지 했다.[* 그 잉글랜드전에서 잉글랜드를 격침시킨 이변의 중심에 선 [[조 게이텐스]]는 '''원래 [[아이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대표팀]]은 당시 기준으로 세계최강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를 떡실신시켰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는 당시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고, 처음으로 출전하는 월드컵에서 다른 팀들을 상대로 얼마나 크게 이길까에만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의 언론사들은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대표팀]]이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를 1대 0으로 제압했다는 기사를 믿지 못해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가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대표팀]]을 10대 0으로 제압했다는 오보를 냈다가 나중에 정정 기사를 쓰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월드컵 역사에서 손꼽히는 이변의 경기 중 하나이고 흔히 나오는 월드컵의 이변 시리즈 중 가장 처음을 장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에게 있어서 3년 후에 일어날 [[웸블리 참사|진짜 재앙]]의 서곡에 불과했다.[* 1953년, 자신들의 홈이자 축구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유니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놈들'에게 6-3으로 패하고 멘붕에 빠진 사건이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유럽 대륙의 팀에게 처음으로 패한 사건이었으며 그것도 대패의 굴욕을 받았다. 6개월 뒤 복수를 하겠다며 원정을 떠나서는 7-1로 개발렸다. 그게 바로 1950년대 축구계를 평정했던 [[페렌츠 푸스카스]]의 매직 마자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대표팀]]이었다] 그러나 경기 전날 [[브라질]] 관중들이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가 탈락해야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의 우승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밤새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선수들이 잠자던 [[호텔]]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악기를 연주해대서 제대로 [[잠]]을 못자게 했던 점도 있었다. * 당시 [[아일랜드 공화국|아일랜드]]는 나라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팀이 출전했다. 이는 아일랜드의 당시 상황과 맞물리는데 같은 나라에서 종교 갈등으로 인해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일랜드 축구 대표팀인 FAI]]와 [[성공회]]를 믿는 아일랜드 북부 지방의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북아일랜드 축구 대표팀인 IFA]]이 따로 팀을 꾸려 출전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월드컵 이후에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북아일랜드]]가 정식 출범하고 나서 해결 되었다] 하지만 나라가 완전히 갈라선 것도 아니고 선수의 국적에 대해 민감한 시기도 아니었던 탓에[* 현재는 한 축구 선수가 단 한 번이라도 성인 대표팀에 출전하게 되면 다시는 다른 나라의 대표팀 선수로 뛸 수 없다] 4명의 선수[* 톰 아르네, 렉 라이언, 데비 월시, 콘 마틴]는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북아일랜드]] 양쪽에서 경기를 했다. 두 나라가 다른 조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같은 월드컵에서 두 개의 국적으로 경기를 뛴 유일한 사례'''이다. *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터키]]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는 지역 예선을 통과했지만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터키]]와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는 조금 날로 먹은 듯한 느낌이 들지만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마|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자]]~~ 조 추첨 전에 기권하였다. 그래서 [[FIFA]]는 이 팀들의 자리를 지역 예선에서 탈락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과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일랜드]]로 채워 넣으려 했지만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은 거부하고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와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일랜드]]는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 두 팀은 나중에 기권하였다. 특히 [[아시아]]의 유일한 출전국이었던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가 이 대회에서 기권한 이유는 맨발로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맨발로 축구를 했으며 이 때문에 [[1948 런던 올림픽|1948년 올림픽]]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보고서에서는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가 [[브라질]]까지 갈 돈이 없어서 기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http://news.bbc.co.uk/sport2/hi/football/world_cup_2010/8802642.stm|BBC 스포츠 참고자료]]] 만약 이 대회에 출전했더라면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는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고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진출국 타이틀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다음 대회]]에 출전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이 가져간다. 게다가,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는 이 후로 [[FIFA 월드컵|월드컵]] 무대에 단 한번도 진출하지 못해서 월드컵과 인연이 멀어진 것은 물론 현재 인도 축구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FIFA 월드컵|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이기 때문에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 입장에서는 땅을 칠 노릇. 어쨌든 이 때문에 4조의 경기는 '''꼴랑 우루과이 VS 볼리비아가 유일한 경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8-0'''으로 난도질해 버렸다. *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터키]]는 예선에서 달랑 [[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시리아]]를 상대로 7-0으로 이기고[* 그 1경기도 안방경기였다] 진출했기에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 못지않은 거저먹기였지만 [[6.25 전쟁]]이 한창인 [[한국]]에 파병하고 [[소련]]이 쳐들어올까봐 노심초사하던 터라[* [[터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터키]]는 총비상이었다. [[소련]]과의 국경에 20만 가까운 병력을 배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기권하게 된 거였다. 여담인데 [[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시리아]]가 왜 [[유럽]] 예선에 포함되어있냐고 궁금하겠지만 1940~50년 [[유로바스켓]]이라든지 월드컵 예선에서도 [[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시리아]]나 [[레바논 축구 국가대표팀|레바논]],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이란]], [[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이집트]]같은 나라들이 유럽 예선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내부 사정으로 한번에 나온 게 별로 없거나 기권했을뿐... *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에서 잘려나갔던 자르 지방(Saar protectorate)도 대표팀을 꾸려서 월드컵에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월드컵 개막 2주일 전에서야 [[FIFA]]에서 가입 승인을 하는 바람에 1950년 월드컵에선 문턱조차 밟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s-2|1954 월드컵 예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갔고 1956년 정식으로 [[서독]]으로 편입되어 사라졌다. == 대회 엠블럼·마스코트·공인구 == === 포스터 === [[파일:/image/etimesi/2010/06/17/1_04_Copy(320).jpg]] 축구공을 차는 축구 선수의 발을 형상화했는데, [[스타킹]]에 세계 각국의 국기를 그려 넣었다. 역시 이 당시의 월드컵도 초창기 월드컵이라서 마스코트와 공인구 같은 건 없었다. == 경기장 == 월드컵이 열린 도시와 구장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 [[벨루오리존치]], 에스타디우 세체 지 세템브루[* 미나스 제라이스 주 소재. 세체 지 세템브루는 브라질의 독립 기념일인 9월 7일을 의미한다. 현재의 이름은 인디펜덴시아] * [[상파울루]], 에스타디우 두 파카엠부 * [[쿠리치바]], 에스타디우 두리발 지 브리투 * [[포르투 알레그리]], 에스타디우 도스 유칼립투스 * [[헤시피]], 에스타디우 일랴 두 헤티루 * [[히우지자네이루]], [[에스타디우 두 마라카낭]][* 당시 개막전과 결승 최종전을 치렸던 그 경기장이며 [[우루과이]]의 센테나리오 경기장, [[아르헨티나]]의 [[엘 모누멘탈]]과 함께 [[남미]] 대륙을 대표하는 경기장이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2014년 월드컵]]에서도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였다] == 대회 진행 == === 조별 리그 ===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결승 리그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사선은 기권국. |||||||||| 조별 리그 || || 1조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 ||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 || 2조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 3조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 ~~[[인도 축구 국가대표팀|인도]]~~ || || 4조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그런데 RSSSF에서는 4조에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터키]]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가 배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자세한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1조&2조]]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3조&4조]] === 결승 리그 === |||||||||| 결승 리그 || || 결승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 진하게 표시된 국가 우루과이가 우승국. 순서는 결승 리그의 순서를 따랐다. ||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rowbgcolor="#FFD700"><:> 1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3 || 2 || 1 || 0 || 7 || 5 || +2 || '''5''' || '''우승''' || ||<rowbgcolor="#C0C0C0"><:> 2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3 || 2 || 0 || 1 || 14 || 4 || +10 || '''4''' || 준우승 || ||<rowbgcolor="#B8860B"><:> 3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 3 || 1 || 0 || 2 || 6 || 11 || -5 || '''2''' || 3위 || ||<rowbgcolor="#F0E68C"><:> 4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 3 || 0 || 1 || 2 || 4 || 11 || -7 || '''1''' || 4위 || 자세한 내용은 밑의 항목 참조.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결승 리그]] ||<table align=center><rowbgcolor="#FFD700"> '''{{{+2 1950 FIFA 월드컵 우승}}}''' || || http://www.worldstatesmen.org/uy.gif?width=200 [br]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두 번째 우승[br](★★) || == 기록실 == * 최초 득점: [[아데미르]]([[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전반 30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1조&2조#s-1.1|조별리그]]) * 퇴장: 없음 * 최초 [[페널티 킥]]: 엑토르 오티스([[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vs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후반 44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1조&2조#s-1.3|조별리그]]) * 최초 멀티골: [[아데미르]]([[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vs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전반 30분&전반 79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1조&2조#s-1.1|조별리그]]) * [[해트트릭]] * 오스카 미게스([[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vs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3조&4조#s-2.1|조별리그]]) * [[아데미르]]([[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vs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결승 리그#s-1.1|결승리그]]) * 최다 득점 경기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8 vs 0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3조&4조#s-2.1|조별리그]])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7 vs 1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결승 리그#s-1.1|결승리그]]) * 최다 득점차 경기: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8 vs 0 볼리비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3조&4조#s-2.1|조별리그]]) * 최초 역전승: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3 vs 2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3조&4조#s-1.1|조별리그]]) * 자책골: [[호세 파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vs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조별 리그 3조&4조#s-2.1|조별리그]]) * 무득점팀: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22경기에서 88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4골을 기록했다. == 결과 == 1위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2위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3위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4위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rowbgcolor=#FFD700><:> 1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4 || 3 || 1 || 0 || 15 || 5 || +10 || '''7''' || '''우승''' || ||<rowbgcolor=#C0C0C0><:> 2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6 || 4 || 1 || 1 || 22 || 6 || +16 || '''9''' || 준우승 || ||<rowbgcolor=#B8860B><:> 3 ||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 5 || 2 || 1 || 2 || 15 || 11 || +4 || '''5''' || 3위 || ||<rowbgcolor=#F0E68C><:> 4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 6 || 3 || 1 || 2 || 10 || 12 || -2 || '''7''' || 4위 || ||<rowbgcolor=#FFA7A7><:> 5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 3 || 2 || 0 || 1 || 7 || 3 || +4 || '''4'''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6 ||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 || 3 || 1 || 1 || 1 || 4 || 4 || -2 || '''3'''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7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 2 || 1 || 0 || 1 || 4 || 3 || +1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8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 3 || 1 || 0 || 2 || 2 || 2 || 0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9 ||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칠레]] || 3 || 1 || 0 || 2 || 5 || 6 || -1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0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3 || 1 || 0 || 2 || 4 || 8 || -4 || '''2'''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1 ||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 2 || 0 || 1 || 1 || 2 || 4 || -2 || '''1'''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2 ||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 3 || 0 || 0 || 3 || 2 || 10 || -8 || '''0''' || 1라운드 || ||<rowbgcolor=#FFA7A7><:> 13 ||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 || 1 || 0 || 0 || 1 || 0 || 8 || -8 || '''0''' || 1라운드 || === 수상 === '''MVP''' 1위 - '''[[지지뉴]]([[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Zizinho. 풀 네임은 Thomaz Soares da Silva. 펠레의 어린 시절 우상으로 더욱 유명한 선수이다. [[마라카낭의 비극]]만 아니었어도 역대 최고 선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고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만능형 선수. 특히 드리블에 있어서는 당시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아르헨티나의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함께 40년대 남미 축구를 양분하던 대선수였다] http://cdn.bleacherreport.net/images_root/slides/photos/001/702/015/zizinho_display_image.jpg?1324657680 지지뉴 2위 - [[후안 스키아피노]]([[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3위 - [[아데미르]]([[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득점왕''' 1위(8골) - '''[[아데미르]]([[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풀 네임은 Ademir Marques de Menezes. 195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간판 스트라이커. 총 A매치 출전 기록은 39경기 32골로 아직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대 득점 랭킹에서 9위에 랭크되어 있다] http://www.onordeste.com/administrador/personalidades/imagemPersonalidade/73c60cd84c0ff90959289081377788ba746.jpg 아데미르. ~~턱이 참 [[크고 아름답다]]~~ 2위(5골) – 오스카 미게스([[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공동 3위(4골) – 치쿠([[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알시데스 기지아]]([[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텔모 사라|사라]][* [[라 리가]]의 스페인 국적 선수 중에서 득점 1위에게 주는 텔모 사라상의 모델이 바로 이 사람이다. 라 리가 역대 최다 득점도 갖고 있는 [[아틀레틱 빌바오]] 출신의 레전드],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이상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베스트 11'''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수비수: 예리크 닐슨([[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호세 파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미드필더: [[옵둘리오 바렐라]], [[알시데스 기지아]](이상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바우에르, [[자이르 다 호사|자이르]](이상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공격수: [[지지뉴]], [[아데미르]](이상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페어 플레이상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뒷 이야기 == * 이 월드컵 개막전과 [[한국전쟁]]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 월드컵 개막전은 개최국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경기로, 현지 시간으로 1950년 6월 24일 15시에 시작되었다. 브라질의 표준시는 한국과는 정확히 12시간 차이.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지구 반대편에서는 인민군 전차가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 이 월드컵에서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의 축구 열기를 상징하기 위한 메인 스타디움으로 [[히우지자네이루]]에 [[에스타디우 두 마라카낭|마라카낭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에스타디우 두 마라카낭|마라카낭]]은 세계 최대 수용 인원을 자랑하던 경기장으로 입석까지 합하면 무려 2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이었다.[* 현재는 입석이 금지되고 개보수를 거치면서 78,838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수용 인원이 이 정도면 충분히 대형 경기장이다] 문제는 이 초대형 경기장의 첫 삽을 너무 늦게 뜨는 바람에[* 1948년 8월 2일에 떴다. 월드컵 개막에는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이것을 제 시간 내에 짓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 원래 같았으면 월드컵 기간 내에 짓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브라질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공밀레|노동자들을 밤낮없이 굴린 덕분에]] 그나마 월드컵 개막전을 여기에서 치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경기장까지는 아니었고, 월드컵 중에도 공사를 계속하여 결국 결승전은 완공 상태에서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마라카낭의 비극|그 참혹한 비극]]이 일어날 줄이야... * 그리고 이 월드컵이 브라질에게는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시궁창으로 망친다'''는 징크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마라카낭의 비극]]을 당하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64년 후]]에 이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미네이랑의 비극|그때보다 몇배는 더 참혹한 대참사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 대회 모두 브라질을 쓰러뜨린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앞으로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릴 일은 없을 듯하다.~~ == 대회 이후 == 브라질은 우승을 놓치자 브라질 축구계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비탄에 빠지며 한바탕 거대한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마라카낭의 비극]]을 참고할 것.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