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미국 전략 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중앙 정보국|CIA]]의 전신. [[KLO]]도 전략사무국이다. [[한국 광복군]]을 훈련시켜서 미군의 한반도 상륙 작전을 하려고 했으나 예상보다 빠른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나온다고... [[장준하]]나 김우전(광복회 회장을 지냄. 1944년에 일본군 탈영 뒤 광복군 입대) 같은 광복군들이 OSS에서 훈련을 받았다. 광복군 장군인 백파 [[김학규]]나 철기 [[이범석]]이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http://media.daum.net/politics/north/view.html?cateid=1019&newsid=20081127134603458&p=ohmynews|#]] [[http://korea.kr/newsWeb/pages/brief/partNews2/view.do?dataId=155686769&call_from=extlink&call_from=extlink|광복군 창설 70주년]]에서도 나오듯이, 광복 후 국내 진공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김우전은 OSS에서 부대 파견에 큰 힘을 쏟았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041311050663733|#]] 다만 OSS는 임정의 가능성을 크게 점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임정 내부의 분파주의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고, 이는 임정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하여 대표성의 의문으로 확대되었는데, 그 요지는 1) 임정의 분파주의가 심각하며 2) 대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하며 3) 임정을 우대할 경우에 발생하는 여타의 독립 단체에 대한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는 현실적으로 수권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임정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OSS의 견해에서 출발한 것이며, 1920년대 상해 임시정부엔 27개의 분파가 난립하고 있었고 이러한 기류는 해방 직전까지 이어가 해방 직전에 작성된 OSS의 보고서에선 임정의 분열에 대한 불신과 해방후 임정이 해방 한국을 맡을 능력이 부재하다는 설명들로 그득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군정의 한국통치 등에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 한국분단사 자료집 II 34쪽, 신복룡(편), 한국분단보고서(상) 43-44쪽, 신복룡,김원덕 (역)] 1992년, [[안두희]]가 자백을 했는데 OSS 중령이 [[김구]]암살을 지시하고 나중에는 [[장택상]]이 사주했다는 것이다! 이건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미군정]]은 김구를 블랙타이거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황당한 게 OSS는 1945년 9월에 해체되었고, 장택상은 1948년 11월에 영국대사 발령났는데 거절하고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다 낙선했다. 그리고 권총 테러를 받아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당시 특무대장인 [[김창룡]]이 시켰다는데, 김창룡은 당시 [[소령]]이었고 [[국군기무사령부|특무대]]장은 51년에 되었다. 아들 [[김신]]은 어떻게 당시 소령인 김창룡이 단독으로 암살을 지휘하냐고 비판했다(...) [[호치민]]과 인연이 깊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의 OSS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OSS는 호치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치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또한 종전 직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치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치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세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OSS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