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욱의 모습 | 세바시에서의 강연 모습.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 |
高廷旭, 1960년 11월 04일생.
서울 용산구 출생이며 [1]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으며 동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1살 때의 소아마비로 인하여 지체장애 1급[2]이 되었다. 다리에 힘을 쓸 수 없어 항상 휠체어에 타고 이동하며, 국제장애인연맹(DPI) 한국지부 이사를 맡고 있다.
참고로 고정욱은 고태잠, 박호생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3]
1 생애
1.1 장애가 되다
돌 무렵, 소아마비로 인하여 온몸에 열이 심하게 나더니 온몸이 축 쳐졌다. 다음날 병원에 데려갔더니 어제까지 잘 걸어다니던 아이가 다리에 힘을 쓸 수 없었다. [4] 그래서 영구히 허리 아래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어다니지를 못하여 우울한 삶을 살아야만 했고 어렸을 때 내내 "왜 나만 장애인이 되어야 했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참고로 고정욱이 어렸을 때 옆집 할머니가 고정욱의 어머니에게 찾아와 "이 아이는 공부도 못하고, 직업도 못 가지고, 결혼도 못하는 쓸모 없는 아이이니 홀트 아동 복지회에 데려가 해외로 입양이나 보내버려라"라는 말까지 한다. 할머니마저 ""아이 크면 시계수리나 도장 파는 걸 가르쳐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실제로 어렸을 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이 때문에 어릴 때 고정욱의 하루의 주된 일과는 독서였다. 책을 자주 접하게 되니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란 책[5] 은 다 읽어버렸다. 부모도 독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간섭하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고정욱의 어렸을 때의 풍부한 독서 경험은 나중에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 독서 말고도 공부도 했는데 아버지가 휘하의 사병인 유명 플로리스트 방식을 아들 가정교사로 데려와 그에게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다. 여기서부터 고정욱의 인생에 희망적인 반전이 생긴다.
1.2 학교 생활
사실 걷지 못하여 학교에 가지 못할 뻔했다. 집에서 창천초등학교[6]까지 거리는 500미터였다. 장애가 아니었다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목발도 없이 가기에는 너무 힘겨운 거리였다. 사실 당시에도 휠체어가 있었으나 당시엔 자동차 한 대와 맞먹는 값이었기에 개인이 소유하는 건 흔치 않았다. 고정욱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정욱의 어머니는 '비록 장애아이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라는 일념만으로 6년간 고정욱을 업고 꾸준히 등하교를 했고 괴롭힘을 막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큰 주전자를 들고 와 반 아이들에게 따뜻한 보리차를 돌리기도 하였을 정도로 헌신을 하였다. 참고로 고정욱의 아버지는 당시에 베트남 전쟁에 육군 대위로 파병되어서 집에 없었다. [7]
고정욱은 늘 고민을 안고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같은 반 아이들에게 '절름발이'나 '병신'같은 말놀림은 기본이었고, 몇 번은 싸우기도 했다. 장애라는 이유로 언제나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체육 시간이나 운동회 때에는 남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사흘간 집에서 쇼를 한 뒤 들어간 학교에서 고정욱은 지옥을 맛보았다. 등·하교 때엔 어머니가 업고 다녔지만 수업을 같이 들을 순 없었다. 고정욱은 소변을 참기 위해 의식적으로 국과 물을 피했지만 바지에 소변을 싸는 일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팔십쯤 됐을 1학년 때 신영숙 담임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업고 다니며 소변을 누였다. 고정욱은 "참으로 고마우면서도 괴로웠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의 고민은 두 살 아래 덩치 큰 동생이 한 살 앞당겨 같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소됐다.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성공한 동화 작가의 모습으로 돌아와 동창회에서는 가장 인기가 좋고 제일 잘 나간다고 한다.
사실 고정욱은 남들만큼 마음껏 뛰어놀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밖에서 많이 놀곤 했다. 하지만 그냥은 아이들 사이에 끼기 위해서는 '깍두기'가 되어야 했다. 이런 방법으로 고정욱은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나를 잘 알게 되면 무턱대고 자신을 놀리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으로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초등학교 때엔 집에서 미리 교과서를 다 읽어버려 전교 1등과 체육 제외하고[8] 항상 전과목에서 수를 독차지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1등 자리를 빼앗긴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당시 2등이던 고정욱에게 한참 밀려 지금은 인터넷에 프로필도 안 뜨는 무명인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당시 고정욱에게 밀려 3등이 되었던 친구도 지금 삼성전자에서 높은 자리에 서있다고 한다.
졸업식 날,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어미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왜 상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런 당부도 했다. "정욱아, 장애는 부끄러운 일도 상 받을 일도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집에서 학교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고정욱은 이 때까지도 휠체어가 아닌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석우라는 친구가 고정욱의 가방을 들어줄 아이로 반에서 뽑히게 된다. 실제로 1년동안 가방을 들어주었고, 그렇게 친해진다. 하지만 2학년 때 반이 갈렸다. 고정욱은 그친구가 자신을 찾아와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석우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로써 생각하고 결국에는 오지 않았다. 이는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소재가 되었다.
참고로 고정욱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의 개근상을 수여했으며 초, 중, 고등학교를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자료는 현재 2017년 2월 인터넷 검색 프로필에서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1.3 대학 이후
고정욱의 장래희망은 사실 작가가 아니라 의사였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활해보면서,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지지도 받았다. 고정욱은 철저한 이과생이었다.[9] 그러나 장애라는 이유로 의대에 원서 접수를 거부당했다. 사실 의대가 아니더라도 이과 계열에는 장애인이 입학할만한 과가 없었다.[10]
하지만 담임선생님이 구세주가 되어주었다. "신은 인간이 문을 닫으면 창문을 열어주신다."며 문과 계열로 가 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그렇게 처음 서강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했고 아버지의 결정으로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갔다. [11] 사실 세바시 강연에 따르면 고정욱은 당시 의대 진학을 거부당한 이후 가고싶은 과가 없었다.[12] 하지만 굳이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경쟁률이 제일 약한 과에 원서를 접수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학에서는 사실 은근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말을 아주 잘 하는 데다가 기타도 제법 쳤다. 하지만 여자를 사귈 때마다 얼마 안 가 헤어져야만 했는데 여학생의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장애인과 사귀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장애인이 얼마나 싫었으면 어떤 때에는 '다리를 분질러 버린대'라는 말까지도 들었다. 그래서 여자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고정욱은 그냥 과감하게 바로 차버리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까도남이다...
1.3.1 교수 임용의 좌절
박사 학위를 얻기 5년 전에 1987년 박사학위 5학기 때 원생들에게 학부생 강의를 배정하는데 고정욱에게는 배정되지 않았다. 교수는 "칠판에 판서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며 [13] 퇴짜를 놓았다. 아버지가 달려가 항의한 덕에 다음 학기에 강의를 배정 받긴 했지만 나중에는 교수가 아니라 그냥 강사로서 일하며 여러 대학에 원서를 내어 교수가 되어보려다 자존심만 상하고 끝내 교수가 되진 못했다.
1.4 결혼
이 부분이 아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장 심오하게 깨버리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고정욱은 이연숙 여사와 결혼했다.
대학교 후배의 소개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데이트를 하다 보니 마음에 들어 첫날부터 바로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했다. [14] 그러더니 아내에게 '어머... 미쳤어?'라는 답을 받는다. 하지만 고정욱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아내도 고정욱의 열렬한 마음을 알고서 1년간 더 사귀다가 골인하게 된다.
사실 결혼하기까지의 커다란 난관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처부의 반대였다. 이유는 두 말할 것 없이 장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연숙 역시 보통 여자와 달랐다. 집에서 그만 만나라고 매질까지 당했는데 계속 고정욱을 만났고 결혼 직전까지 결혼을 반대했지만 아내는 결국엔 호적을 스스로 파서 결혼을 했다... [15]
2 작가 활동
사실 작가가 된 것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남에게 들이대는 자세 덕분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서 글 잘 쓰는 동기들이 많았고 수업에서도 글쓰기 수업이 많아 글을 쓸 기회가 많았다. 어릴 때의 풍부한 독서 경험과 대학 수업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서 대학교 2학년 때 교내 소설 공모전에 작품을 내었지만 안타깝게 1차 심사에서 떨어진다. [16]
사실 고정욱은 소설 합평을 받을 때마다 항상 붉은 펜 투성이가 되었다. 동기들은 캐릭터가 부실하다거나 스토리가 빈약하다거나 등등의 이유를 대며 소설에다가 붉은 펜으로 난도질하였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을 써나가 4학년 때에 교내 대회에서 마침내 수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후 당시 담당 교수가 고정욱에게 신춘문예 응모를 권했다. 역시 한 번에 붙진 않았고 10년 가까이 한 우물 파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1992년에 33세의 나이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다. 동시에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1999년에 동화 "떠오르는 섬"으로 데뷔했다. 아동문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참고로 고정욱은 독자들의 메일에 답장을 잘 해주기로 유명하다. 또한 일 년에 책을 몇 십 권씩 쓰는데 '가방 들어주는 아이'같은 경우에는 한 시간 만에 썼고 동화는 대개 200자 원고지 100장 내지 150장 분량이고 자신은 녹음하는 방식으로 동화를 쓴다고 한다. [17]
3 유명 저서
고정욱의 목표는 책 500권 이상, 100 여개국어로 자신의 저서 번역, 장애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등이다. |
고정욱은 벌써 2017년 2월 기준으로 저서가 200권을 넘었는데 자신의 말로는 책을 많이 쓰는 이유는 자신이 장애인으로서 장애의 고통과 아픔을 너무 잘 알기에 그렇다고 한다.
이 문서에 적힌 고정욱의 저서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나 학교로부터 읽기 싫은데 억지로 들어서 읽게 된 책들이 많다.
4 우려되는 점
소아마비 장애인에게는 '포스트 폴리오 신드롬'이라는 게 있다. 몸의 근육 가운데 3분의 2는 하체에 몰려있는데 쓰지 않으니 심폐, 내장, 심장기능이 나이 60이 넘으면 급격히 떨어진다. 이 때문에 소아마비 장애인 가운데 장수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고정욱은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기에 목숨을 걸고 쓴다.'고 말했다. [21]-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17/2009041701284.html?Dep0=twitter&d=2009041701284
- ↑ 참고로 팔다리가 절단된 경우는 3급 내지 4급이 된다.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17/2009041701284.html?Dep0=twitter&d=2009041701284
- ↑ 그 당시에는 한국에선 예방접종으로 인하여 소아마비가 사라지던 때였으며, 참고로 고정욱은 소아마비 백신을 두 차례나 접종한 바 있다.
- ↑ 어른들이 읽는 책도 읽었다. 주먹질은 물론이고 욕설과 출혈이 묘사되는 책까지 부모 몰래 읽었다고 한다.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17/2009041701284.html?Dep0=twitter&d=2009041701284
- ↑ 어머니는 정말로 괴로웠을 것이다. 남편마저 죽을 위기에 놓여있는데 아들까지 장애이니 이런 괴로운 인생을 산 사람도 사실 찾기 힘들다.
- ↑ 항상 우였다.
- ↑ 고정욱은 항상 이과 수업만 들었고 3학년 막판에 문과로 전향했으나 사회는 외우면 되지만 국어의 고전 과목 때문에 문제였다.
- ↑ 사실 이건 요즘도 마찬가지다. 물론 장애인 의사도 있으나 극히 드물다. 다만 현재 같은 경우엔 장애라는 이유로 의대에 원서 접수를 거부하면 그날로 소송 크리다.
- ↑ 장애가 아니었다면 아마 SKY나 해외 유학을 갔을 것으로 예상된다.
- ↑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고정욱은 철저히 이과생이었기에 문과 쪽에는 가고 싶은 과가 딱히 없었을 것이다.
- ↑ 결국에는 장애 때문이다.
- ↑ 사실 강연을 할 때마다 자신은 '들이대'학교 출신이라는 농담을 한다.
- ↑ "아버지가 내 다리몽둥이 부러뜨리고 머리 박박 깎아 버린다고 하니 혹시 결혼식 날 안 나타나면 이 서류로 혼인 신고하라"면서... 아내 역시 고정욱이 말하는 '들이대'에서 수석 졸업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 ↑ 그 내용은 거리를 질주하던 외제 스포츠카가 여공 한 명을 치는데 알고 보니 스포츠카를 몰던 사람은 재벌 2세였다. 그 여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구해주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재벌 2세가 여자의 매력에 넘어가 청혼을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결혼을 거부한다. 그러자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면 결혼해주겠냐고 묻지만 결국 여자는 떠난다. 여자가 떠난 곳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남자는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서 스포츠카 열쇠를 바다에 빠뜨리고 돌아선다.
- ↑ 그러다 보니 망하는 작품도 생기는데 예를 들면 <자전거 태워주는 형>이다. 5천 부 정도 팔렸다.
- ↑ 30만부가 팔렸고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추천도서', '조선일보 선정 좋은책'으로 뽑혔다.
- ↑ 100만부가 팔림
- ↑ 70만부가 팔렸고 6개월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17/2009041701284.html?Dep0=twitter&d=2009041701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