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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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980.5.19

1 소개

김경철 씨는 5.18 민주화운동에 최초로 희생됐다.

1.1 일생

김경철 씨는 어릴 때 바위에 놀다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3개월 넘게 치료를 받은 후 경철씨 어머니는 의사에게 주사놓은법을 배워 집에서 놓았다. 하루에 한번씩해서 반병을 놓아야했다. 그런데 경철씨 어머니는 하루에 두번, 한병을 다 놓았다. 경철씨는 뇌막염을 앓다가 청각을 잃었다. 청각을 잃어 말도 못 배웠다. 김경철 씨는 자라면서 재화기술을 배웠다. 서울에 올라가 양화점에 취직해 기술을 익혔다. 광주에 내려와서도 같은 일을 했다. 28살 때는 같은 처지인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둘사이에 딸을 낳았다. 1980년엔 딸의 백일잔치를 했고 며칠 뒤인 5월 18일에 가족모임을 가졌다. 처남이 영암에 간다기에 같이 나갔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1]

1.2 타박사

5월 18일 7공수여단은 무차별 살육작전에 나섰다. 시위했던 전남대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시위 안 한 학생이나 학생이 아닌 시민까지 무차별로 군홧발로 차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끌고갔다.[2]
그런 상황에 김경철씨가 걸렸다. 경철씨는 7공수여단원들에게 무차별로 공격을 받은 후 연행되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인명은 후두부찰과상&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상지전박부타박상, 좌견갑부관절부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대퇴부타박상 이다. 알아듣게 말해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지고 팔과 어깨가 부서지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3][4][5] [6]

2 김경철 씨 희생 왜곡

김경철 씨 사망을 부정하는 역사왜곡세력이 있다. 그 세력에 따르면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맞아죽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박인갑이라는 사람이 증언했는데 이 사람 증언은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인갑 사람 증언이 근거로 쓰였던적 없다. 김경철 씨 사망은 엄연히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 보고에 똑똑히 기록됐고 국방부장관한테 보고된 것이다.

3 증명자료들

1980년 6월 보안사령부가 검시하고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 보고'라는 검시 자료엔 사명경위가 '계엄군-병실'이라고 분명히 나와있다.

  •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공수부대원들이 진압을 하다 김경철씨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
蔡검사=공수부대원들이 그날 금남로에서 시위를 해산하며 강경진압을 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있나요.

周피고인=19일 밤에 들었습니다. [7]

  1.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7~18쪽
  2. 김영택 동아일보 기자 증언.
  3. 출처: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408쪽
  4. 출처: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5. 출처: 국방부 장관 증언
  6. 출처: 5·18 '충정명령'은 무차별진압 작전
  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