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무역

1 개요

나무위키에 있는 노예문서에는 이 부분이 거의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는 아프리카 계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노예무역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예무역에 대한 내용은 따로 독립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왜 많은 원주민들이 노예로 끌려갔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이 설명이 곧 노예무역의 활성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예문서 작성된 내용에는 효율성, 즉 노동력 이야기를 했는데 목화재배는 노예무역의 시발점이 아니다. 목화재배는 이미 노예무역이 활성화 된 이후의 시점에 나온 산업이다. 노예무역 막바지에 이슈가 되었던 것이 목화재배인데 이걸 노예무역의 시발이자 모든 근거처럼 말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1 노예무역의 활성화: 시작

노예무역의 시작은 이미 그 역사를 정확히 알기 힘들정도로 오래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전쟁이라는 사회적 힘의 불균형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계층이며 노예이다. 우리가 아는 노예무역은 통상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이 세계적으로 활발해지는 시점은 대항해시대와 관련이 있다. 포르투갈 인들은 아프리카 인들과 교역을 했으며 이 때 처음으로 노예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허용되었으나 유럽권은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구교+신교)가 인권적인 이유로 반대를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되면 만사형통'이라는 포르투갈 인들은 노예무역을 실시한다. 아프리카 왕국 중에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통해 머스킷과 같은 총을 얻은 곳이 있었는데 이것이 자신들의 세력확장 및 유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총을 얻기 위해서 노예를 제공한다. 어차피 유럽인이 가장 큰 바이어였기에 아프리카 왕국들에게도 나쁜 거래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포르투갈 인과 아프리카 인의 노예무역은 대등한 관계였다해도 아프리카 인들이 압도적인 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인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많은 노예를 자꾸 요구하게 되자 이 두 세력간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포르투갈 인들은 안정적인 노예공급을 위해 이들을 정벌하기도하지만 아주 새로운 정복지를 만들어 통치한다. 그 것이 바로 현재의 앙골라다. 쉽게 말하면, 중계상에서 완전한 공급자로 변신한 것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예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1.1 노예무역 시장

수요와 공급이 시장의 기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문제는 수요가 왜 커졌냐는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스페인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이다. 아메리카 인, 인디오들을 주요 노동력으로 현지조달해서 노예화 했는데 그들이 쉽게 쓰러졌다고 한다. 이걸로 인디오들이 매우 약해 빠진 인종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데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 온 병균으로 많이 죽었다고도 한다. 총, 균, 쇠에 있는 내용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노다지를 앞에 두고 노동력 부족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올인한 유럽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노예무역이 활성화 된다. 노동력을 해외에서 충당하는 형식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것이 강제성과 인간을 사고 파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1526년부터 1867년까지 약 12,500,000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노예로 아프리카를 떠났고 약 10,700,000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아메리카 대륙 이외에도 다른 곳으로 팔려갔지만 항해 도중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노예들이 많다. 노예문서에는 노예선이 노예들을 어떻게 실어 날랐는지 보여주는 사진이 있는데 인간으로는 커녕 생명체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상품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적재'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렇게 미친듯 노예를 쓰게 되는 것은 바로 돈때문이다. 단순히 돈때문이네 라고 하기에는 매우 큰 액수이기는 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 되거나 미화되거나 감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령의 아이티는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이 크게 있었는데 이것이 프랑스 재정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국가예산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조그마한 땅에 그러한 수익을 거두었다.

이러한 인간 착취의 역사를 통해 서구 열강은 자라나 지금의 위치에 서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지금와서 보상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반복되거나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살아야 하기에 역사를 우리는 잘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1.1.2 노예무역의 결과

위에 나온 이동 수치를 우리는 잘 봐야 한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못 사는 나라들이 아프리카에 가장 많은 편인데 이유는 단순하다.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가 엄청난 대륙과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노동력은 매우 부족하다. 이는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 인구가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외에도 아프리카를 식민화 한 유럽국가들이 세계 2차 대전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면서 부족문화와 정서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그려 놓은 경계선별로 식민지를 독립시켰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의 형태가 국가와 같은 개념이 아닐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문화상대주의를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을 자세히 보면 자대고 그린 것처럼 반듯한 편인데 이건 다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착취하기 쉽고 또 자신들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통치의 일환이었다.

노예무역은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강제적이고 비인도적인 이주를 당한 아프리카인들은 우리가 듣는 재즈, 힙합, 랩, 탱고, 보사노바, 레게등 아프리카계 문화의 세계화를 이끌어냈다. 하루하루 살기 힘든 가운데 그나마 버티게 해준 애환이 담긴 노동가가 이제는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사회, 역사적으로도 여러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 시작은 강제적이고 비인도적인 아픈 역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