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마 다이묘

外様大名 (とざまだいみょう)

도자마 다이묘 제도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도자마츄라고 불리며 존재했다. 다만 후대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에도 시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각 지역의 다이묘들마다 충성도에 따른 차별 대우를 한 사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불린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 셋으로 나뉘는데, 이 기준은 에도 막부를 수립하는 것에 얼마나 더 공헌했는지로 갈라졌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붙지 않고 서군 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던 세력들이 주로 도자마 다이묘에 해당되었다. 반면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족들이 임명되었고, 후다이 다이묘의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받들던 세력들이 임명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도쿠가와 가문 외에 약 200 가문이 존재했는데, 전투 이후 2년동안 88 가문이 개역당해 가문이 끊겼다. 에도 막부 초기에도 많은 도자마 다이묘 가문이 개역당하고 수 많은 로닌이 생겼났다. 그리고 에도 시대 막부 말기에는 80%에 가까운 지방 세력의 가문이 사라졌다.

이들 도자마 다이묘는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에 충성한 전례가 있고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주로 에도에서 먼 큐슈 등 변방 지역에 배치되었다. 에도 막부한테 견제받고 푸대접을 받아서, 에도 막부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의 주축 세력이 이 도자마 다이묘의 영지인 사츠마(시마즈가), 초슈(모리가), 토사(쵸소카베가) 출신인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