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즐

鄧騭
(? ~ 121)

후한의 외척.

누이동생 등수가 귀인으로 뽑혔고 음황후가 화제의 총애를 잃자 질투해서 등수가 독약을 마실 뻔한 일로 음황후가 폐위되었는데, 화제가 등씨 일족에게 벼슬을 주려고 했다가 등수가 이를 말려 등즐은 화제 때 호분중랑장을 지냈으며, 106년에 상제가 즉위하자 여름 4월 19일에 거기장군 겸 의동삼사가 되었다.

상제가 죽자 부절을 가지고 왕의 청개거를 가지고 안제를 영접했으며, 등즐은 화제가 죽은 이후에는 항상 궁중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오랫동안 궁중에 거주하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 태후에게 사저로 돌아가기를 요청해 사저로 돌아갔다. 107년 여름 4월에는 열후에 책봉되어 식읍 1만 호를 받자 등즐은 사양했으며, 정서교위 임상과 함께 각기 군사 5만을 거느려 한양에 주둔해 강족의 침입에 대비하라는 조서를 받았다.

108년에 한양에 도착했지만 군대가 모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강 부족 수천 명이 기현 서쪽에서 공격해 1천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으며, 겨울에 등즐은 임상, 종사중랑 사마균 등을 시켜 평양에서 강족과 싸우게 했지만 크게 패했다. 11월 29일에 등즐은 회군하라는 조서를 받았고 등즐은 경사로 와서 대장군이 되었으며, 등즐은 현명한 선비를 천거해 하희, 이합, 등을 조정에 참여하게 하면서 양진, 진선 등을 자신의 막부에 배치해 천하 사람들이 칭찬했다.

아들인 시중 등봉이 임상에게 말을 받자 등즐은 처와 등봉을 곤형에 처하면서 이를 사죄했으며, 121년 3월 13일에 등태후(등수)가 붕어하자 등즐은 상채후에 책봉되고 특진에 임명되었다. 태후가 붕어하면서 등씨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태후의 형제인 등괴, 등홍, 등창이 황제를 폐위한 고사를 수집해 평원왕을 세우기로 한 모의를 했다고 모함했다.

이에 등씨 일족 중에 모의에 참여했다고 여긴 자들은 모두 폐해 서인으로 삼고 등즐은 모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특진의 직위를 면직시켜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재물, 전답, 주택은 몰수되었으며, 등즐은 옮겨져 나후에 책봉되었다가 5월 1일에 등봉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후한 때 외척 등씨가 권력을 잡고 등즐은 등씨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권력을 휘두른 것은 등즐의 누이동생인 등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