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利勝信
(? ~ 1611)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모리 카츠나가의 아버지. 본래 성씨는 모리(森). 초명은 요시나리(吉成). 호는 잇사이(一斎).
오와리 출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키호로슈(黄母衣衆)의 한 사람으로 히데요시로부터 모리 가문의 허락을 받아 모리(毛利)의 성씨를 받아 이름을 카츠노부(勝信)로 고쳤다.
1586년부터 시작된 큐슈 정벌, 히고 국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해 1587년에 부젠, 고쿠라 등의 영지를 받아 6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큐슈 정벌로 영지를 잃은 키이 시게후사가 옛 영지인 부젠 국을 되찾기 위해 부탁하자 이를 들어주지는 않고 대신 세 개의 마을을 내주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 때 제4군의 지휘관으로 1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해 주로 강원도를 공격했으며, 여강, 회양, 철령, 봉화, 영원산성, 경주 등에서 전투를 벌였다. 1598년에는 사천 지역을 점령하면서 선진으로 상륙해 성을 수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에 가담했다가 서군이 패하면서 사형당할 뻔 했는데, 후시미 성 공사 때 곤란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와준 일과 함께 카츠노부가 친하게 지낸 야마우치 카츠토요의 탄원으로 사형을 면하고 토사 번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에야스를 도와준 일은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 공사로 재목이 부족해 이에야스가 곤란해했는데, 당시 부교로 지내던 카츠노부가 몰래 도요토미 가문에 재목을 원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