源 博雅(みなもと の ひろまさ)
엔기延喜 18년(918년) - 텐겐天元 3년 9월 28일(980년 11월 8일)
일본 헤이안시대 중기의 사성황족이자 관인, 음악가. 60대 다이고천황(醍醐天皇)의 황자인 요시아키라친왕(克明親王)의 장남.
어머니는 좌대신(左大臣)을 지낸 실력자였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의 딸이다.
동생으로는 타다마사(忠雅), 키요마사(淸雅), 스케마사(助雅)의 세 명이 있었고, 히로마사는 4형제 중 장남이었다.
관현, 즉 아악이나 악기에 대한 조예가 당대에 따라올 만한 이가 적을만큼 깊고 뛰어났으며, 스스로 아악 악보인 히로마사후(博雅譜)를 편찬하기도 했을 정도로 음악이라는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아버지 요시아키라친왕은 비록 다이고 천황의 아들이긴 했지만 서열이 낮아서 황태자 낙점에서 번번히 미끄러졌으며, 결국 황위계승에 뜻을 버린 채로 엔쵸延長 5년(927년)에 25세로 요절했다. 이런 사정으로 히로마사와 형제들 역시 황위계승에 대한 미련을 어렸을 때 이미 버리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요시아키라친왕의 윗형들이 요절하며 후사를 남기지 못했던지라, 요시아키라친왕이 죽은 뒤에 히로마사는 다이고천황의 장손으로 대접받게 된다.
죠헤이承平 4년(934년) 형제들과 함께 황위계승을 포기하고 미나모토씨(源氏)를 사성받았으며, 이 해 종사위하(쥬시이노 게従四位下 : 한국으로 따지면 고려, 조선시대의 종사품 하계의 관위)의 위계를 받았다. 텐랴쿠天曆 원년(947년)에 나카츠카사노 타유우(中務大輔), 텐토쿠天徳 3년(959년)에 우효에노 카미(右兵衛督), 코호康保 2년(965년)에 사츄죠(左中將 : 좌중장), 텐엔天延 2년(974년)종삼위(쥬산미従三位 : 우리나라의 종삼품에 해당)의 코타이고구노 곤노다이후(皇太后宮権大夫 : 황태후궁 권대부)의 관직을 지냈다.
앞서 썼듯이 아악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으며, 여러 명수들로부터 악기를 배웠던 것으로 유명했다.
영곡(郢曲)은 아츠미친왕(敦実親王)에게서, 쟁(箏)은 할아버지인 다이고천황에게서, 비파는 미나모토노 오사무(源 脩)에게서 배웠으며,
피리와 필률(篳篥 : 피리의 일종)은 오이시노 미네요시(大石峰吉) · 오이시노 토미카도(大石富門) 부자와 요시미네노 유키마사(良峰行正)에게서 배웠다. 본인이 가장 즐겨 연주한 악기는 필률 중에서도 큰 편인 대필률이었다고 전해지며, 항상 가지고 다니며 즐겨 불었던 필률인 하후타츠(葉二)는 그가 궁성 관문인 스자쿠몬(朱雀門)에서 만난 귀신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전설도 있었다. 그러나 음악에 정통했던 반면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은 싫어했다고 한다.
당대를 살았던 희대의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와 친밀한 사이였다는 내용이 당대의 기록이나 이야기책같은 문헌에 전해져 오며, 이야기책 중 하나인 콘쟈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에 세이메이와 히로마사가 등장하는 귀신이야기나 요물퇴치같은 이야기들이 다수 남아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히로마사 당대에 이름난 악기 중 하나로 황실의 보물이었던 비파 겐죠(玄象)가 귀신에 의해 도둑맞았던 것을 나성문에 찾아가서 귀신과 만나 되돌려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친구가 그 유명한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인 만큼, 당대부터 히로마사 역시 비범한 인물로 구전되기도 했는데, 천년도 훨씬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베노 세이메이를 주인공으로 한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음양사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카노 레이코(테즈카 오사무의 며느리)의 만화 음양사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히로마사 역시 인기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당대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설과 만화 속의 히로마사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귀신에게조차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기도 하며, 천황의 손자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중급 귀족인 세이메이에게 격없이 구는 진솔한 모습을 보인다. 세이메이의 장난에 쉽게 속아넘어가며, 세이메이와 함께 여러가지 사건들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은 많은 팬들에게 히로마사라는 인물을 깊이 각인시키게 했다.
2000년에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판을 원작으로 한 NHK 드라마 음양사에서는 스기모토 텟타(杉本哲太)가 히로마사 역을 연기했고, 2001년 · 2003년에 유메마쿠라 바쿠가 각본을 맡아서 제작되었던 영화 음양사에서는 이토 히데아키(伊藤英明)가 히로마사를 연기했다. 일본 음양사 팬들의 기억에 새겨진 히로마사는 역시 후자인 이토 히데아키의 연기이다.
가문이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부인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노부사다(信貞), 노부아키(信明), 노부요시(信義), 유키미츠(至光) 이 네 아들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악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코호 3년(966년) 나이어린 삼촌인 62대 무라카미천황(村上天皇)의 명으로 몇 해 전 화재로 불타면서 유실된 아악의 악보를 정리하여 신산가쿠후(新撰樂譜)를 편찬했다. 이 신산가쿠후의 다른 이름이 바로 히로마사후 혹은 히로마사후에부(博雅笛譜)이며, 히로마사의 별명이었던 쵸슈쿄(장추경 : 長秋卿)를 따서 쵸슈쿄 치쿠후(長秋卿竹譜)라고도 불린다. 또한 일본 아악의 고유 곡 중 하나인 쵸게이시(長慶子)를 작곡한 인물도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이다. 수백년 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측에서 조선 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연주했던 곡목 중에도 이 쵸게이시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쵸게이시는 현재까지도 악보가 남아있으며, 일본 아악 연주회에서도 드물지 않게 이 곡을 들을 수 있다.
텐엔 3년 9월 28일(980년 11월 8일) 헤이안쿄의 자택에서 향년 63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참고로 히로마사의 절친인 아베노 세이메이는 히로마사보다 25년을 더 살고 칸코寬弘 2년 9월 26일(1005년 10월 31일)에 세상을 떠난다. 세이메이는 히로마사보다 3년 연하인 엔기 21년생(921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