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1]은 7년 전쟁 중 일어난 사건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이 전쟁 패배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말한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사후 벌어진 대 프로이센 포위망 해제는 사실 2차 기적으로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은 총 2번 벌어진 일이다.
2 1차 기적
7년 전쟁 중 벌어진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패배했고 이 전투로 인해 프로이센은 1만 9천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1만 8천명의 병사만이 남아있었고,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을 향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진군해오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9년 8월 16일 베를린의 벽 아래에 파묻힐 각오로 필사적으로 싸울 것을 기록했고 그 날 러시아군은 오데르 강을 넘었고 그 다음날 오스트리아 군도 오데르 강을 건넜으며 설상가상으로 나머지 오스트리아 전군이 작센으로부터 베를린을 향해 북진해왔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에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총 3만 3천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9만명이나 되는 적군과 싸울 채비를 하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프리드리히가 직접 언급하게 되는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지 않고 9월에 철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쿠너스도르프에서 2만명의 병력을 잃는 등 프로이센 못지 않은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적진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보급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또한 쿠너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리드리히의 장군이자 동생이었던 헨리 왕자의 군대가 멀쩡한 상태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요소로 여겨졌다. 수도 베를린을 코앞에 두고 적군이 철수한 덕분에 프로이센이 전쟁 패배 직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사건을 1차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3 2차 기적
2차 기적은 7년 전쟁 막바지인 1762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세상에 잘 알려져있기도 하다. 7년 전쟁 말기 프로이센은 전쟁으로 피폐해져있는 상황이었다. 전쟁 중 프로이센은 120명의 장군들, 1500명의 장교 그리고 10만명이 넘는 병력을 잃는 등 군사적 역량이 한계에 달해가는 상황이었고 대다수 프로이센인들은 이제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동맹인 영국은 평화조약을 맺도록 프로이센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청산가리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던 중 1762년 1월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그녀의 조카인 표르트 3세가 왕위에 올랐다. 표르트 3세는 차르가 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광팬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차르가 되자 곧바로 대 프로이센 정책을 없던 일로 돌려버리고 프로이센과의 평화교섭에 나섰다. 결국 그해 3월, 5월에 각각 휴전조약과 평화조약이 맺어짐으로서 프로이센은 또한번 패배의 운명에서 극적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4 번외편 : 나치 독일
오랜 세월이 지나 이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은 다시한번 세상에 언급되는데 1945년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나치독일에서였다. 당시 나치 독일의 재무장관이었던 크로지크는 자신의 일기에 괴벨스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큰 소리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자서전 특히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부분을 읽어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괴벨스의 낭독이 끝난뒤 히틀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고 한다.
얼마 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크로지크에 의하면 이 소식을 들은 괴벨스가 바로 부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제가 죽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2]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동부전선의 병사들을 비롯한 독일 고위층 사이에서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싸울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서방 연합군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없이 계속 나치 독일을 압박해들어왔고 결국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괴벨스가 바란 또다른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은 망상으로 남게 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