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리그의 심판
후보: 블라디미르
날짜: CLE 20년 7월 27일
관찰
블라디미르가 등 뒤로 긴 머리카락과 로브 자락을 멋들어지게 휘날리며, 신속하게 목적지로 단호한 발걸음을 옮긴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부츠의 뒷굽이 대리석 복도에 부딪치는 소리가 전쟁 학회의 숨막힐 듯한 정적을 가르며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가 은밀한 눈으로 저 앞의 돌로 된 거대한 문을 살핀다.
이 방문객의 위엄 있는 태도는 그저 번드르르한 겉모습에 숨은 본질을 간파하지 못할 멍청이들을 속여 넘기려는 방편일 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하며 사치스러운 옷차림, 잘 손질된 손톱 같은 귀족적인 외양은 전부 다 사기에 불과하다. 통찰력이 있는 자라면 가식적인 차림 따위에 속지 않을 터. 잔인한 생김새의 각진 얼굴형을 보나 손끝을 장식한 으리으리하지만 날카로운 보석으로 보나, 타고난 약탈자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블라디미르는 잠시 멈춰 서서 이 순간을 음미한다. 그리고 변덕스럽고도 탐욕스런 눈길로, 정교하게 조각된 문의 장식을 감상한다. 대리석으로 된 아치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 표범의 유연한 몸매는 석공의 솜씨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위에 새겨진 글귀는 이 곳이 목적지임을 웅변해 준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반들반들한 돌 문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데,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문이 양쪽으로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린다. 문 뒤편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다. 블라디미르는 얇은 입술을 혀로 한 번 쓱 축이고는 쏜살같이 안쪽으로 들어선다.
회고
블라디미르는 회고의 방 안, 침잠하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잠시 동안은 정적과 기대에 찬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곤 속삭임이 들려왔다.
“블라디미르, 자네,”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단박에 알아채고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어둠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키의 희끄무레한 사람 형체가 수수한 수도승의 로브를 걸치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잿빛 머리카락과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파리한 얼굴에서 짙은 선홍색 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드미트리?”
블라디미르가 아연실색하여 물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돌아가셨잖습니까. 내가 분명히 죽였는데.”
희미한 형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어 제꼈다.
“난 죽지 않아, 블라디미르. 난 네 안에 있다.”
방금 한 말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수도승의 몸이 고운 붉은 색 연무로 녹아 흩어지며, 순식간에 주위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블라디미르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따뜻한 증기가 반갑게 끌어안듯 그의 몸을 감쌌다.
힘겹게 몰아 쉬는 날카로운 숨소리에 블라디미르는 문득 몽상에서 깨어났다. 두 눈을 번쩍 뜨자 평화로운 숲 속 공터였다. 흥분한 심장이 마구 고동쳤다. 발치에는 난도질 당해 피에 흥건히 젖은 몸뚱어리 둘이 누워 있었다. 하나는 이미 움직임이 없었지만 하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너무 놀라서 자기 몸을 살펴봤다. 이제 갓 열다섯 소년으로 돌아간 그는 오른손에 사냥 칼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는데, 손잡이를 너무 꽉 쥔 바람에 손바닥에 상처까지 나 있었다. 잘 차려 입은 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시뻘건 피가 배어 있었다.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의 한 장면. 주변에 널부러진 이들은 소꿉친구들, 그가 최초로 살해한 녀석들이었다.
난도질 당한 몸뚱어리가 그를 향해 기어오며 슬픔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그 표정은 혐오감으로 변했다. 녀석이 한 손을 쑥 내밀어 블라디미르의 부츠를 붙잡았다. 블라디미르는 튕기듯 몸을 움츠리며 죽어가는 아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가 비명이라도 지르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그 입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못하고 대신 피가 솟구쳐 나와 흙바닥에 쏟아졌다. 아이는 살인자를 지목하려는 듯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블라디미르의 손에서 힘없이 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시금 어둠이 그를 감쌌다.
이제 그는 산길 아래, 거대한 구조물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앞쪽에는 백랍처럼 핏기가 가셔버린 시체가 꼬챙이 위에 걸쳐져 있고, 밑에는 원시적인 도구로 바위를 파내 만든 피를 받는 주발이 놓여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위를 올려다보며 풍상에 거칠어진 얼굴 위로 한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저 앞쪽 산길엔 비슷한 시신 여남은 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누워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맥박이 점차 빨라지는 감각이 그를 덮쳤다. 원초적 두려움마저 압도하는 황홀경에 취해, 블라디미르는 이끌리듯 계단을 올랐다.
피가 죄다 빨려나간 시체들을 따라 고대의 건물 안 복도를 헤맬수록 흥분감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던 그의 발길이 드디어 대회랑 앞에 멈춰 섰다. 온 몸의 감각은 생명의 근원인 피가 흘러나와 밑에 고인 시신들에 쏠렸다. 이 소름 끼치는 현장에, 흰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로브를 걸친 수도승이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시뻘겋게 핏발 선 두 눈이 살기등등하게 빛나는 수도승은 인정사정 없는 표정으로 희열에 들뜬 방랑자를 손짓해 불렀다.
블라디미르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최면에 빠진 듯 눈 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못박힌 채 이끌려갔다. 수도승 역시 신기한 듯 그를 응시했다.
“두렵지 않느냐, 꼬마?”
그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블라디미르는 아무 말도 못하며,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네가 어떤 녀석인 지 알겠구나,”
수도승이 말을 이었다.
“넌 선구자란다, 아가야. 피를 취하러 온 진홍빛 사신이지.”
수도승은 음산하게 미소 짓더니, 큰 소리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이 뭐냐, 꼬마?”
“블라디미르라고 해요.”
소년이 얼떨떨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넌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야겠구나, 블라디미르.”
나이 지긋한 수도승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블라디미르가 스승의 눈 속을 깊이 응시했다. 그 안에서 엿본 광경에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 했다. 이 남성을 자신이 살해했다. 그리고 그의 피를 마셨다. 드미트리가 스스로 자청한 일이었고, 만약 거절한다면 목숨을 뺏겠다고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둘러싼 방 안이 다시 한 번 깜깜해지며, 또다시 스승의 유령과 단둘만이 남았다. 드미트리는 팔짱을 끼며 기대하는 듯 물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블라디미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요.”
블라디미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눈 앞의 유령이 어리둥절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블라디미르?”
유령이 거듭해 물었다.
“내 고향 녹서스의 영광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요.”
블라디미르가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다.
드미트리는 더 이상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불쾌한 듯 보였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블라디미르?”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블라디미르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이번에는 천천히 다시 대답했다.
“난 피를 원해.”
늙은 수도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또 물었다.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블라디미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흥, 자유로워진 기분이군.”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등 뒤의 문이 활짝 열리며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블라디미르는 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