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ttachment/사천성 전투/Example.jpg
사천성 전투 | ||
날짜 | ||
1598년 9월 19일 ~10월 1일 | ||
장소 | ||
한국 사천 선진리왜성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명 제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정기룡 동일원 | 시마즈 요시히로 |
병력 | 조선군 2,215명 명나라군 3만 6,800명 총병력 약 4만명 | 사천성 주둔군 7,000명~10,000명 |
피해 규모 | 약 3만 | 불명 |
결과 | ||
조명연합군의 퇴각. 일본군의 승리. |
1 배경
1598년 9월 18일 조·명연합군은 사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주로 향하였다. 이때 왜군은 시마즈 요시히로 지휘하에 사천의 신성에 본진을 두고 1만여의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사천성에는 2천여 병력을 배치하여 14,0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19일 조·명연합군이 진주의 왜군을 물리치고 사천성에 육박하자 사천성의 병력을 사천 신성으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사천성의 왜군이 철수 준비를 하던 28일 밤 경상우수사 정기룡의 조선군은 이 정보를 알고 야습을 감행하였다. 당황한 왜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천 신성으로 들어갔다.
2 전투전개
명 연합군은 사천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 사천 신성 공격을 시작했다.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에게 명하여 적의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창고가 불타버리자 한층 더 궁지에 빠지고,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했다. 요시히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량의 총을 사용하고 지뢰를 묻는 방법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 게다가 명군 진영에서 불랑기포가 오발하여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명군은 우왕좌왕하며 진열이 흩어졌고, 이를 본 시마즈는 전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하였다. 명군은 이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와해되었으며,거기다 식량까지 부족해지자 회의 끝에 진주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3 결말
승리할 수도 있었는데 이기지 못한 아쉬운 전투라고 볼 것이다. 만약 사천이 함락되었으면 부산과 순천의 연락이 끓겨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를 고립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되면 순천 왜교성도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훗날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