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계

攝利計

생몰년도 미상

발해의 장군.

러시아의 나홋카 부근에 있는 니콜라예프카 성에서 청동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부절이 발견되었는데, 부절에는 '좌효위장군 섭리계'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에 따라 밝혀진 인물로 이로 인해 발해사의 연구에 대한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게 되었다.

그의 직책인 좌효위장군은 상당히 높은 직급을 가진 직책으로 이를 통해 발해의 직책은 고구려 고유의 것보다는 당의 것과 많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직책은 삼국사기와 중국 25사에서도 여러번 언급된다.

그의 직책인 좌효위장군이 높은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을 사료를 통해 볼 수 있다.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치게 하고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예종 선천 2년에 낭장 최흔을 보내서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으로 책봉하였으며 그가 통치하는 지역을 홀한주로 삼아 홀한주도독의 직을 제수하였다.

개원 7년 대조영이 죽자 현종은 사신을 보내서 조제케 하고 대조영의 적자인 계루군왕 대무예가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을 세습하게 하였다.

대문예는 그의 무리를 버리고 도망해서 당나라로 들어오니 조칙으로 '좌효위장군' 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병들어 죽으니 그의 아들 흠무가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단수간을 발해에 보내고 조서를 내려 흠무를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그 부친의 작위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11월에 왕의 조카 대능신을 '좌효위중랑장' 우후누번장으로 삼고 도독 여부구는 우무위장군을 삼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료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 좌효위라는 작위는 아무에게나 내려가는 작위가 아니며 고구려, 백제 정벌을 시도한 당나라의 여러 장군들 중에서도 원정군 총사령관 또는 부총사령관이었던 사람들이었으며 그리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 당의 동북방에서 여러 제족을 흡수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의 황제에게 당나라는 이 작위를 주어 책봉하였다고 한다.

좌효위(左驍衛)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효의 의미는 날랠 효, 좋은 말 효, 건장할 교로 쓰이는데 이 때문에 기병을 관할하는 장군이나 돌격대, 선봉장을 의미하는 지도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좌효위라는 직책에는 신당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신당서 열전 북적 발해전에 발해의 관직에 대해 서술한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발해의 무관에는 좌우맹분, 웅위, 비위, 남좌우위, 북좌우위가 있는데 각각 대장군 1명과 장군 1명이 있다. 발해의 관제는 대개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다…(후략)

여기에서는 발해의 무관직인 좌효위장군이라는 직책이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고 있으며 연구자들은 발해의 무관직이 이것만 있었다고 보지는 않고 있으며 발해에서 내린 관직인지 당에서 받은 직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발해의 무장으로써 니코라예프키 성을 거점으로 하여 주변 지역을 호령했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