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국제법의 내용과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더이상 실존하지 않는다.

-벨라루스의 비아워비에자 숲에서 이루어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정상들이 합의한 내용 중-

1 개요

1922년 12월 30일 건국되어 1991년 12월 26일까지 존속하였던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의 맹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하 소련)의 해체를 다루는 문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하게 되었다. 이후 소련의 공화국 15개가 독립하였다. 소련의 붕괴로 제 1세계 vs 제 2세계 구도의 냉전이 종료되게 된다.

2 전개/발단

1991년 이미 소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대다수의 공화국에서 국민투표에서 연방유지가 더 높게 나왔지만 리투아니아 SSR, 에스토니아 SSR, 라트비아 SSR은 이미 독립을 확정지으며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수순을 밟고 있었고 이에 공산당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가 무르게 대응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조인한 뒤 크림 반도에서 하계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서 그가 모스크바에 돌아오기 하루 전 쿠데타를 감행해 고르바초프를 크림 반도의 별장에 감금했다. 새벽6시에 일어난 고르바초프는 아침 식사를 하며 모스크바에서 있을 신연방조약 체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때 올레그 바클라노프, 발레리 볼딘, 올레그 셰닌, 발렌틴 바렌니코프 장군이 소련군 방공부대 사령관과 총참모부 작전본부장 등 3명의 장성을 대동하고 들이닥쳐 겐나디 야나예프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라고 협박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연히 크게 화를 내며 이를 거부했고 이에 장성들은 "고르바초프 씨, 당신을 연금하겠소."고 통보했다. 고르바초프의 경호원들은 그의 수중 하에 있어 별장 내부에서 보호를 받을 순 있었지만 외부로 연락하거나 별장 밖을 나갈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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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감금되어 있던 별장.

쿠데타의 주역들은 올레그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KGB 의장, 발렌틴 파블노프 총리,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그리고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의장,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었고 이들은 야나예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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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부터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올레그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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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 전원과 그 외의 쿠데타 가담 인원들.
왼쪽에서부터 올레그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바체슬라프 게네랄로프 고르바초프의 별장 경호를 담당하던 KGB 소령, 알렉산드르 티지야코프 산업교통통신위원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다시 오른쪽부터 발레리 볼딘 고르바초프 비서실장, 발렌틴 바렌니코프 국방부 장관 대리, 올레그 셰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장, 바실리 스타로두브체프 국제농업연맹의장,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쿠데타의 주역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했고 8월 18일 4시부터 앞으로 6개월간 일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기간 동안 국정운영은 바크라노프 연방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과 야나예프 부통령 등 8명으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맡는다고 알렸다. 신임 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 대통령령으로 긴급동원령을 발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소련헌법 제127조7항에 따라 대통령직을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보도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군 트럭을 동원한 군인들을 모스크바 시내로 진주시켰고 방송국과 공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온 세계가 우왕좌왕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생사와 행방에 대해 각종 예측이 쏟아졌고 소련 최고회의의 오치로프 국방안정보장위원회 부위원장은 고르바초프가 실각한 것같다는 발표를 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보리스 옐친이었다. 그는 저녁 6시 46분 탱크 위로 올라서서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총파업을 하자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에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분노하여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파시즘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외치면서 인간 사슬을 형성하여 모스크바로 진입하는 군 탱크의 저지를 시도했으며, 일부 젊은이들은 탱크 위로 올라가 러시아 기를 흔들면서 병사들에게 모스크바를 떠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은 나라의 경제 붕괴를 치유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며 소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첫째 헌법과 법률에 기초해서 새벽 4시부터 비상사태를 6개월 기한으로 선포하고 둘째 소련 전 지역에서 소련법의 통합을 선언하며 셋째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설치하며 넷째 소련영내 전역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과 지시가 의무적이라고 선포했다.
대통령 대행을 자처하던 겐나디 야나예프는 담화문을 발표해서 소련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헌법과 법률을 유지하면서 오늘부터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발표했고 비상사태 기간 동안 소련의 모든 권력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이양되며 현재까지 채택된 모든 조치는 잠정적이라고 말하고 이 조치가 소련 내전의 위험성을 사전에 막고 소련을 경제파탄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필요성에 따라 취해진 것이라고 강조했고 이번 잠정 비상조치 등으로 소련이 과거에 약속했던 모든 국제공약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선포하고 소련 국민과 각국 정부가 이번 비상조치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있길 희망한다고 미국과 서유럽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행보도 취했다.

미국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이번 사태의 성격을 규명하지 않겠다고 입장 표명을 유보했으며 일본은 소련과의 안보협정이 날아갈까봐 전전긍긍했다. 영국은 걱정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라며 보수파 쿠데타가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비난했고 프랑스는 기다려보자는 입장을 보였다. 독일은 충격을 받았다는 논평을 내놓았고 EC와 NATO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중국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8월 19일 13시~14시 경에 고르바초프 실각 뉴스가 긴급 속보로 타전되었고, 18시[1]부터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관련 뉴스 속보를 계속 내보냈다.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를 비난하며 전 소련 국민들에게 파업을 할 것을 촉구하며 서방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리투아니아 대통령인 란스베르기스가 합세하여 리투아니아인들의 군중집회를 촉구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국내외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민중들의 저지로 실패하였고, 도리어 공산당이 해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1년 옐친 대통령의 주도 하에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대통령이 벨라베자 숲에서 모이고 벨라베자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CIS)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소련은 해체되었다.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소련 보수파 쿠데타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1991년 당시 오후 정규 방송 시작 시간은 18시였다. 1990년까지는 17시 30분이었으나 걸프 전쟁 전후로 정규 방송 시간을 30분 늦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