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너/배경

1 단문 배경

"우리는 하나다. 결코 둘로 나뉠 수 없다."

슈리마의 깊은 계곡에 서식하는 강력한 수정 전갈, 스카너. 고대 브래컨 혈통을 지닌 스카너와 그 동족은 뛰어난 지혜를 갖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브래컨의 영혼은 선조대의 모든 사상과 기억이 내재되어 있는 생명 수정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브래컨이 물속뿐만 아니라 육지와도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이들 브래컨 종족은 생명 수정의 마법이 풀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면에 들어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발생한 매우 위협적인 사건들로 스카너가 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수많은 브래컨 가운데 오직 혼자서만 깨어난 스카너는 위해를 가하는 적들로부터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 홀로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2 장문 배경

슈리마의 황폐한 사막 땅에 인간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모래 사막은 태고부터 존재하는 마법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파른 절벽과 제멋대로 솟아오른 바위로 둘러싸인 외딴 계곡. 그곳에는 오랜 혈통을 자랑하는 브래컨 종족이 광활한 모래더미 한 가운데서 수정 원석을 캐내고 있었다. 힘겨운 노력 끝에 자신만의 수정을 발견하면 각각의 브래컨들은 영혼과 결합하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그러고 나면 이 원석에는 생명 수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육신이 죽고 나서도 이 생명 수정에는 브래컨의 영혼이 그대로 남아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브래컨은 천 년이 넘도록 생을 이어가고, 영혼까지 소멸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육체적 죽음에 맞닥뜨린다 해도 그것은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가 죽음에 이를 경우 생명 수정은 계곡 깊은 곳에 묻혀 새로운 브래컨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된다. 생명 수정 그 자체는 외부의 충격에 매우 취약하지만 이런 식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그 속에 내재된 선조들의 지혜까지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 브래컨들이 모두 자신만의 수정을 찾아 헤매는 이유이다. 원시의 마법과 기억이 새겨진 수정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브래컨을 향해 부드럽게 손짓한다. 그렇게 꼭 맞는 브래컨과 수정이 만나게 되면 성스러운 결합 의식이 진행된다. 수정은 선조의 기억과 지식으로 브래컨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태고의 마법이 걸리도록 주문을 건다. 이렇게 되면 원석 수정은 그 영혼에 생명이 불어 넣어진 생명 수정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후 브래컨은 이 생명 수정 없이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기운도 달려 결국 오래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스카너는 여느 브래컨과 마찬가지로 몇 년의 세월을 자신만의 수정을 찾아 헤맸다. 결국 찾지 못하고 죽을 것을 두려워한 스카너는 더욱더 끈질기게 수정 찾기에 매달렸다. 밤이고 낮이고 온 계곡과 언덕을 파헤치며 돌아다녔지만 결코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거의 포기했을 무렵, 스카너는 알 수 없는 옛 선조의 영혼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래로 아래로 쉬지 않고 땅을 팠다. 그렇게 며칠 동안 힘겹게 파 내려 갔지만, 미지의 그 영혼은 마치 더 깊이 파 내려 가라고 주문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스카너의 집게발이 닳고 닳은 돌멩이 하나를 꽉 물었고, 그 순간 스카너는 자신의 뒤에서 희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느꼈다. 아주 희미하게 들렸지만 스카너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카너 자신만의 원석 수정을 마침내 발견했다는 것을.

그 수정은 그가 여태껏 본 가운데 가장 큰 크기였다. 하지만 너무 많이 닳아서 광택은커녕 순간순간 느껴지는 희미한 빛줄기만 겨우 감지될 정도였다. 억겁의 세월을 땅속에 묻혀 지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표면은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둔탁해져 있었다. 스카너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수정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행여 상처라도 날까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후 – 후, 마치 스카너의 숨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수정은 희미한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스카너는 원석 수정과 함께 깊은 땅속으로 내려가며 결합 의식을 시작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무척 힘들고 지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온몸은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벅찬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고, 태고의 기억과 지혜가 자신의 영혼 속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경지였다. 옛 선조들이 경험했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하는 순간, 스카너는 온몸에 마법이 걸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낮게 들려오는 허밍 소리는 자신의 육체가 세상과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말없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그 숨결을 오롯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와중에 룬 전쟁이 점차 격렬해지며 온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브래컨 종족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서 인간이 이 전쟁을 완전히 끝낼 때까지 동면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인간 종족은 분명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정 전갈 브래컨 종족은 슈리마 사막의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다. 젊고 강력한 전갈은 표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제일 먼저 잠에서 깨어나 동족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생명 수정으로부터 얻은 강력한 힘을 통해 스카너는 브래컨 종족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로 우뚝 올라섰다. 종족 보호 차원에서 그는 다른 전갈들이 모두 동면에 들고 난 후 가장 늦게 긴 잠을 청했다.

평화로운 동면은 수 세기가 넘도록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펑! 펑! 갑작스러운 폭발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표면 가까이에서 동면하고 있던 무리는 굉음에 놀라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폭발물은 브래컨이 잠들어 있는 땅속을 겨냥하고 있었다. 생명 수정을 노린 도적떼의 짓이었다. 유일하게 잠에서 깨어난 스카너는 생명 수정의 보호 덕에 폭발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간신히 화를 면한 스카너는 잠시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집게발과 독침으로 도적떼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스카너 혼자 여러 명의 도적떼를 상대하기는 사실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놈들은 하나 둘 나가떨어졌고, 남은 몇몇은 지레 겁을 먹고 있는 힘껏 도망쳤다. 스카너의 완벽한 승리였다. 스카너는 그제야 자신만이 이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깨어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브래컨의 생명 수정은 이미 도난당했다는 사실도 함께.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스카너는 여전히 동면 중인 다른 브래컨들을 깨워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도적떼의 손에 생명 수정을 빼앗긴 브래컨들은 잠시 정신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죽고 말았다. 아예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슬픔을 가눌 길 없던 스카너는 잠든 동료들의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날을 보냈다. 생명 수정은 인간의 손에 넘어가는 즉시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기에, 뼈아픈 상실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부서지듯 흩어지던 어느 해 질 녘. 스카너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메아리를 듣게 되었다.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아주 선명하게 들려오는 생명 수정의 외침이었다. 도적떼의 손에 넘어간 생명 수정들이 스카너를 향해 다시 브래컨과 결합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고 있었다. 스카너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들을 구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브래컨이라도 제대로 지켜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스카너는 포악한 도적떼에게 시달리고 있는 생명 수정의 간절한 외침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수정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했다.

스카너는 생명 수정의 위치를 찾아 나섰다. 아주 고된 여정이었다.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빨리 찾아달라고 부르짖는 수정들의 울부짖음에 그런 생각은 쉬이 사라지곤 했다. 고통 속에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외로움 조차 사치였다. 스카너는 더욱 결연한 의지로 모든 생명 수정을 찾아내리라 굳게 다짐했다.

2.1 꿈노래

인간들이 우리의 기나긴 잠을 깨웠다.

나는 오랜 세월을 지하에서 잠들어 있었지만, 그동안에도 세상의 아찔한 흐름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눈으로 굳이 보지 않아도 하늘의 별들이 폭발해 죽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대지에 따스한 햇살이 스미면서 생명력이 되살아나는 것까지도 생생히 느껴졌다.

처음에 모래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기나긴 잠을 청했을 때만 해도, 나는 지하에서 잠자는 시간이 지극히 고요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 대지가 나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주위에 있는 동족들이 잠결에 뒤척이는 기척이며 나직한 웅얼거림이 모두 내 마음에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들이 꿈꾸면서 부르는 노래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인간도, 공포도, 의혹도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 깃든 노래들.

모래 속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 몸처럼 꿈꿨다. 노래하는 동족들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우리와 함께였다. 모래 알갱이들 사이로 기어가는 벌레들도, 새끼를 낳으려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뒤쥐들도, 심지어는 밤의 휴식을 찾아 어둠 속으로 찾아드는 솜털투성이 거미 새끼 한 마리까지도.

대지를 이루는 돌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부였다. 나는 돌이 차갑고 무정한 존재일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가 더 깊은 지하로 파고 내려갈수록 모래, 흙, 돌멩이 들의 따스한 온기가 우리를 감싸왔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습기를 가득 머금고 비옥해진 대지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지하가 분노로 끓어오를 때에는 지상 가까운 곳까지 진동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면 나도 똑같이 분노의 노래로 화답하며 공감을 나누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다. 그대의 분노는 나의 분노다.’

인간들이 왔을 때 대지는 고통스러워했다. 우리는 대지와 함께 부서지고 찢어지고 깨어지면서 노래가 아닌 비명을 내뱉었다. 우리의 울부짖음이 지진보다 더 큰 소리로 울려 퍼졌지만, 놈들은 아랑곳도 없이 내 동족들을 땅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들은 우리의 몸에서 소중한 수정의 결정체를 뜯어내 훔쳐가 버렸다. 다름아닌 우리의 ‘이름돌’을.
이후로 나는 수많은 밤을 노래하며 보냈다. 내 심장이 텅 비고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그러나 놈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혼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지상을 헤매고 있다. 메마른 바람이 내 피부를 할퀴고, 내딛는 걸음마다 모래가 내 발을 찔러댄다. 다시금 저 깊고 아늑한 지하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치솟는다. 하지만 꾹 참아야 한다.
‘나는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야. 여전히 나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어.’

저 멀리 어딘가에서 공포의 노래가 들려온다. 희미하지만 귀에 익은 멜로디다. 내가 슬픔의 노래로 거기에 화답하자, 한 줄기 희망의 노래가 선명하게 내 마음에 전해져 온다.
‘괜찮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하늘에서 별들이 빙빙 돈다. 별들의 우주가 끝없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이 든다.
‘본래 지하에 있어야 할 내가 이토록 차디찬 지상의 공기 속에 혼자 있다니.’

지금껏 나는 달이 세 번 뜨고 지는 동안 지상에서 지냈다. 그 정도면 눈 깜짝할 찰나이고, 기나긴 삶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지하에서 따뜻한 웅얼거림이 조용히 울려퍼진다. 지상에서도 나는 영원을 느낄 수 있다.

저편에서 인간의 소리가 들려온다. 인간들의 고함 소리가. 인간들이란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모양인지, 언제 봐도 항상 고함만 질러댄다. 그들의 목소리는 아무런 운율도 조화도 없이 할퀴어대고 충돌하기만 한다. 게다가 저 인간들은 가짜 불에 고기를 굽고 있다. 공기 중으로 피어오르는 기름진 연기의 악취에 숨이 막혀온다.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대지가 우리에게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어렴풋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조금만 더’라는 소리. 우리의 이름돌이 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 인간들이 이름돌을 갖고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인간들에게 나의 목적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종족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야 막 땅을 파기 시작했고, 태초의 지하 세계를 거의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말만 할 뿐 노래할 줄은 모른다. 앞으로 차차 터득하게 되리라.

나는 인간들의 마음을 향해 평온한 땅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가 잠들 때 만나게 되는 위대한 아름다움을 그들에게도 일깨워주기 위해. 그리고 죽은 내 동족들을 위한 노래도 부른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훔쳤는지 알려주기 위해.

그러나 인간들은 내 노래에 화답하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나는 목소리를 더 크게 높여, 빼앗아간 이름돌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해본다.
‘돌려줘. 그건 우리 거야. 너희는 이미 우리 중 한 무리를 죽였잖아. 우리의 미래까지 죽이지는 마.’ 나는 애원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 수정들을 깊은 어둠 속으로 가져가야 해. 우리는 그 수정들과 다시 합쳐져야 해. 제발 부탁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잠재우는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고함치고만 있다. 그들 중 하나는 무언가 박자가 있는 소리를 낸다... 웃음소리인가? 내 몸이 공기에 짓눌려 으스러지는 것만 같다. 나는 결국 못 버티고 땅속으로 파고든다. 그러자 나를 감싸오는 모래의 무게에 비로소 좀 편안해진다.

어째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망가뜨렸는지 보지 못하는 건가? 어떻게 감히 우리를 이런 식으로 결딴낼 수가 있나?

‘무자비하고 막돼먹은 것들.’
내 껍질이 분노로 하얗게 달아오른다. 인간들이 우리를 파괴하게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다.

나는 모래 속에서 뛰쳐나간다. 깜짝 놀란 놈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동안, 나는 대지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내 이름돌에 불어넣는다. 그때 한 인간이 내던진 칼날이 내 다리로 날아와 나의 투명한 껍질을 깨뜨린다.
‘너희는 죽음의 노래만 부르는군. 그래, 그 노래는 나도 부를 줄 안다.’
나는 태양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러자 땅에서 날카로운 수정 조각들이 터져 나와 인간들을 공격한다.

인간들이 혼비백산 법석을 떠는 동안 가짜 불이 다른 데로 옮겨 붙는다. 그들이 나뭇가지와 짐승 가죽으로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불집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어둠을 밝히고 인간들을 집어삼킨다. 하늘에서 눈을 깜빡이는 별들을 향해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인간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지만, 아무리 빨리 뛰어도 나를 앞지르지는 못한다. 나는 그들을 한 바퀴 둘러가서 뒤처진 인간 한 명을 발톱으로 해치우고, 또 한 명을 발로 공격한다. 금세 사방이 죽음으로 물든다.

‘너희의 죽음은 우리의 대지를 만질 자격이 없다.’
나는 비통하게 울부짖는다. 이건 노래가 아니라 외침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꼬리를 휘둘러 인간 여럿을 한꺼번에 쓰러뜨리고, 다시금 태양의 에너지를 불러와 수정 조각들을 그들에게 날려보낸다.

‘이제야 내 노래를 듣는군...’
나도 그들처럼 무자비해졌다. 나는 잔혹이다. 나는 죽음이다.

앞으로 나는 꿈속에서 분노만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깊은 어둠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이제 살아남은 인간은 딱 한 명뿐이다. 그 인간 여자는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번쩍이는 물건을 들고 허우적거린다. 나를 죽이려고 저러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물건에서 뿜어져 나온 가짜 햇빛이 내 딱딱한 껍질을 뚫더니, 그 빛이 내 속살을 그을리고 내 수정에 비쳐 반사되면서 나를 마비시킨다. 나는 고통에 빠져 비틀거린다.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제는 끝장인가보다.

그때 어렴풋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리는 하나야.’

여자가 다시 무기를 겨눈다. 그걸 본 나는 퍼뜩 공포를 떨쳐낸다. 그 무기에 우리의 하얀 이름돌이 묶여 있었다. 여자는 우리의 생명 에너지를 빨아들인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끔찍한 노래를 부르는 데에 수정을 낭비하다니. 분노와 고통이 차올라 폭발할 것만 같다.
나는 고함을 내지르며 대지에서 힘을 끌어올려, 꼬리에 박힌 침으로 그 여자를 강타한다. 그리고 곧바로 여자의 무기를 빼앗아 움켜쥐고 단숨에 으스러뜨린다. 무기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우수수 쏟아지고, 내 손에는 하늘의 흰 빛이 담긴 수정만 남는다. 드디어 우리의 이름돌을 되찾은 것이다.

‘나는 여기 있어. 우리는 하나야.’
나는 수정을 혹시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입으로 꽉 물고,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돌아본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앞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이름돌을 훔쳐가지 마라.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우리는 모든 것이며, 오로지 깊은 어둠에 속하는 존재다.’

여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도망친다. 나는 여자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자비심 때문에 살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 여자가 내 꿈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를 들은 이상, 그녀도 반드시 노래하게 될 것이기에.

3 구 배경

스카너에 대해 알고 싶은가? 그럼 먼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의 오딘 계곡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곳에는 브락컨이라는 종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신체는 수정으로 이루어졌고 생명은 태고의 대지 마법의 축복에서 비롯한 신비로운 존재였다. 브락컨은 무척 사나웠으나 그만큼 현명하기도 했던 것 같다. 비전 의식을 통해 자기 생명의 정수를 수정에 옮겨 담은 후 공명을 통해 수정의 마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니까. 이들은 그 강건한 신체와 마법의 힘을 활용해 오딘 계곡을 지켜 왔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적이 대지 마법의 힘과 계곡의 수정을 탐내고 침입해 왔지만, 그 누구도 브락컨의 방어선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브락컨들도 룬 전쟁의 재앙을 피해갈 순 없었다. 오딘 계곡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끔찍한 혼돈 마법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혼돈의 힘이 수정을 오염시키자 브락컨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방어 마법으로도 이를 막아낼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브락컨들은 절멸을 피할 최후의 수단으로 동면을 선택했다. 땅 속 깊은 곳에 잠든 채로 전쟁의 참화가 잦아들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언제 끝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누군가 강하고 현명한 브락컨이 먼저 깨어나 상황을 살피고 동족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했다. 이 수호자 역할로 선택된 이가 바로 스카너로서, 그는 다른 브락컨들보다 지면 가까이, 좀 더 얕은 곳에서 동면하고 있었다.

스카너의 동면은 계획보다 일찍 끝났다. 캘러맨다 마을에서 광산이 발견된 이후 사람들이 무분별한 채굴을 시작했던 탓이었다. 느닷없이 지면에서 파헤쳐진 스카너는 분노와 혼란에 빠져 사방에 무턱대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다 겨우 이성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보니, 스카너를 파낸 자들에겐 적의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리그에 봉사하는 하급 일꾼들에 불과했다.

전쟁 학회에 초대받은 그는 소환사들에게 브락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대신 브락컨들이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룬 전쟁은 이제 끝났으며 인간들은 무시무시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마법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세계는 아직 위험한 곳이었다. 스카너는 잠들어 있는 동족들을 깨우는 대신,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챔피언으로 활약하기로 한 것이다.

"인간들은 아직 마법을 통제할 방법을 찾지 못했소. 예전에 캘러맨다였던 이곳은 이제 이 세계의 역사에 남은 수정의 흉터일 뿐이지." - 스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