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도스 해전

아바도스[1] 해전(Battle of Abydos, 410 BC)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에 일어난 주요 해전 중 하나로, 아테네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함대와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이 해전은 키노세마 해전키지코스 해전 사이에 일어났으며, 마르마라 해의 제해권을 다툰 일련의 교전들 중 하나이다

1 키노세마의 승리 이후

키노세마 해전은 아테네의 우세승으로 끝났다. 이후 아테네 함대는 세스토스를 기지로 삼고 펠로폰네소스 함대와 신경전에 들어간다. 양군은 이후의 교전을 대비하여 함대 규모를 늘리고자 노력했는데, 이 일대의 페르시아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더욱 성공적으로 함대를 증강하여 키노세마의 피해를 모두 복구하였다.

두 세력의 주력 함대가 해협에서 대치하면서 전쟁에 관여된 모든 세력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심지어 소아시아 남부의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마저 이쪽으로 움직여왔다.[2] 이는 마르마라 해, 그리고 마르마라 해의 출구인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로스 해협은 아테네가 흑해에서 식량을 구입해 오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으며, 아테네가 이곳을 상실한다면 곧 항복할 수밖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칠리아의 재앙 이후 아테네의 남은 주력 함대 전부가 이곳에 있었기에 자칫 잘못하여 함대를 전부 상실한다면 아테네는 그날로 멸망하는 길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테네 함대의 완전 상실은 전쟁의 끝을 의미했다. 후의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과 같은 끝을.

2 두 지원함대의 북상

펠로폰네소스 함대의 지휘관 민다로스는 아테네 함대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로도스 섬의 반스파르타 봉기를 진압중이던 시라쿠사 군 지휘관 도리에오스에게 북상을 요구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의 펠로폰네소스 함대들에도 모두 해협으로 올 것을 명령했다.

아테네 함대를 지휘할 장군으로 임명되고도 함대와 합류하지 않았던 알키비아데스도 이를 눈치챘다. 그가 함대에 합류하지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리에오스를 감시하는 것이 임무가 아니었는가 추측되고 있다.[3] 그러나 그는 임무에 실패했고, 도리에오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감시망을 빠져나와 북상하였다. 이에 알키비아데스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이를 추격한다.

3 아비도스 해전

4 전초전

도리에오스는 14척의 배를 이끌고 어둠을 틈타 아테네군의 감시초소를 피해 해협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아테네 초병은 이를 파악하고 세스토스의 아테네 함대에 이를 알렸으며, 아테네 함대는 도리에오스 함대를 로에테온 근처의 해얀으로 밀어넣었다. 아테네 함대를 피해보려던 도리에오스는 한번은 회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시 이번엔 다르다노스 해얀으로 밀려났고, 이렇게 두번에 걸처 아테네 함대에게 몰리는 동안 한척의 배를 잃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아비도스에 주둔하던 민다로스에게 알려졌고, 민다로스는 급하게 함대를 출격시키는 동시에 파르나바조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페르시아군 또한 육상에서 펠로폰네소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4]

민다로스의 펠로폰네소스 주력 함대가 출격하자 아테네군 주력 함대도 이에 대응하여 함대를 발진시켰다. 그러나 민다로스가 빨랐기에 도리에오스 함대와 민다로스 함대는 합류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테네 함대와 교전에 들어간다.

알키비아데스 또한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해협 근방까지 전진해 있었다. 그는 전투 중반에 참전하게 된다.

4.1 양군 규모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먼저 합류에 성공하여 97척의 함대를 집결하였다. 민다로스는 아바도스에 가까운 우익에, 시라쿠사 군은 다르다노스에 가까운 좌익에 포진했고 나머지 함대는 그 사이에 포진하였다.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아테네 함대보다 20척 이상 숫자가 많았고, 거기에 더해 육상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해얀선으로 피할 수 있었다.

아테네 함대는 교전 시작시에는 7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테네군 좌익은 트리실로스, 우익은 트라시불로스가 맡았다. 또한 전투 중반에 18척 규모의 알키비아데스 함대가 지원군으로 합류한다.

4.2 교전

키노세마 해전과는 달리 아비도스 해전은 양군 모두 별다른 계획 없이 부딪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양군 모두 계획되지 않은 교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전의 형식 또한 키노세마 해전과 비슷하였다.

전황이 변한 것은 알키비아데스의 합류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 함대가 접근했을때 양군은 이 함대가 자신들의 지원군이 아닐까 기대하였고, 알키비아데스는 붉은 기를 올려 아테네 함대임을 알렸다. 알키비아데스 함대는 장기간의 교전으로 지처있는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해얀선으로 밀어붙였고, 아비도스 항구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았다.[5]

그러나 여기에 페르시아군이 개입했다.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는 페르시아군을 지휘하여 해얀선으로 밀려난 펠로폰네소스 함선들을 보호했고, 이 도움 덕에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전멸을 피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군이 버티는 사이 밤이 깊어지자 결국 아테네 함대도 물러났다.[6][7]

5 전투 후

비록 페르시아군의 개입으로 완전한 승리는 실패했지만 아테네군은 펠로폰네소스 함선 30척을 포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키노세마 해전이 아테네의 우세승이라면 아비도스 해전은 아테네의 한판승인 셈이다. 다음날 아테네군은 여유있게 또하나의 승전비를 세웠고, 민다로스는 아비도스로 탈출해 함대를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불리한 상황은 아직도 여전했다. 아테네의 국고가 고갈되어 함대 전체가 겨울을 나기에는 부족했고, 해협이 너무 좁은데다 페르시아의 지원까지 받는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심하게 밀리기는 했어도 여차하면 해얀선으로 피신해 함대를 온존시킬 수 있었다.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해병이 다수 필요하지만 당시 아테네는 그런 해병이 없었다. 거기다 에우보이아가 계속 반란상태였기 때문에 아테네는 함대 일부를 빼와야 했다.[8] 때문에 마르마라 해에서의 아테네 함대의 숫적 우위는 곧 사라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아테네에겐 구원이였다. 해협에서 승리하고 귀환한 함대 일부를 차출하여 30척의 함대를 편성한 아테네는 테라메네스에게 이를 맡겨 에우보이아로 파견했고, 과두정들을 무너뜨리고 에우보이아를 다시 아테네의 품으로 들여보냈다. 이후 테라메네스는 마케도니아로 가 피드나 포위를 도왔고, 물자와 재정지원을 받은 후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진입해 트라시불로스와 합류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 사트라프와 협상에 나섰다. 아테네인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사트라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페르시아와 손을 잡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오히려 상황은 그 반대였다. 티사페르네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체포, 사르디스로 압송하였고 이는 알키비아데스가 선전하던 페르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이제는 없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알키비아데스는 곧 탈출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한번의 교전 뿐이었다. 그리고 키지코스 해전이 벌어진다.
  1. Άβυδος
  2.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474
  3.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474
  4.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475
  5. 존 R. 헤일 저, 이순호 역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p336
  6. 존 R. 헤일 저, 이순호 역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p336
  7.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475~476
  8.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