羊陟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사조(嗣祖). 팔고(八顧)의 한 사람.
태산 양보 사람으로 대대로 명문가로 양척은 효렴에 오르고 태위 이고에게 벽소되었으며, 고제로 시어사가 되었다. 147년에 이고가 양기의 무고로 죽자 이고의 관리였다는 이유로 여러 해 동안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고제로 기주자사, 호분중랑장, 성문교위, 상서령을 역임했고 태위 장호, 사도 번릉, 대홍려 곽방, 태복 조릉, 대사농 풍방 등이 환관과 혼인해 뇌물을 바치자 양척은 이들을 파면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태위 유총, 사례교위 허빙, 유주자사 양희, 양주자사 유공, 익주자사 방애 등과 함께 맑고 투명한 자들을 추천했으며, 환제에게서 칭찬받았고 하남윤이 되었다. 검소하게 식사했고 당고의 금으로 인해 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