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良房栄
(1515 ~ 1554)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에라 카타노부의 동생이며, 오우치 가문의 가신이자 스에 하루카타의 가신으로 유명한 명장이다. 모토나리와 함께 아마고 가문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활약한 기록이 있다.
1551년에 하루카타가 다이네지의 변을 일으킬 때 스에군의 주력으로 활약했으며, 그 무용은 모리 모토나리도 경의를 표할 정도라고 한다. 이츠쿠시마 전투 때 후사히데가 모토나리와 내통을 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가 퍼지면서 의심을 받자 하루카타의 지시를 받은 히로나카 타카카네에게 스오 이와국의 코하쿠인에서 살해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모리 측에 내통한 것은 사실로 모토나리에게 방대한 양의 수확량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불신을 가지게 된 모토나리가 내통 정보를 고의로 퍼뜨렸다거나 모토나리와 만나서 화해를 제안했다가 하루카타의 의심을 사서 살해당했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운토쿠 타이헤이키(隠徳太平記)에 따르면 모토나리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을 때 와카야마 성에 한 통의 편지가 보내졌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모토나리와 하루카타가 싸울 때 모토나리가 일전에 보슈국을 주기로 약속하여 모토나리를 위해서 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는 모토나리가 후사히데의 필적을 흉내내게 하여 쓴 편지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후사히데의 배반을 확신하지 않던 하루카타가 배반을 확신하여 후사히데를 살해했다고 하지만 이 얘기들은 모두 신빙성이 낮다고 한다.
모리 모토나리에 대한 거품이 걷히는 현대에 와서는 모토나리의 이간질이나 이중계략에 의해 스에 하루카타와 에라 후사히데의 사이가 갈라졌다는 통설은 부정되고 있다.[1] 이쓰쿠시마 전투 이전에는 모리 가문은 아키 지방의 호족연합 수장에 불과했고 후사히데는 주코쿠의 유력가문인 오우치 가문의 명장으로 영향력 자체가 달랐다. 풀어 말하면 에라 후사히데가 모리 가문에 일국을 가증하겠다는 조건을 걸어 모리 가문을 끌어들여 스에 하루카타와 가문 내부항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는 가능 할지 몰라도 아키 일국도 유지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모리 가문에서 일국 가증을 명목으로 후사히데를 끌어들였거나 역첩보전을 노리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오히려 반란으로 주군을 축출하고 가문의 주도권을 잡은 스에 하루카타가 가문 내에서 영향력이 강하고 명장으로 소문난 에라 후사히데를 내통을 명목으로 살해했으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리 가문에 의해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결하였기에 결과적으로 이 모든게 모토나리의 계략이었다는 모토나리 책략가설로 이어졌다는 게 현대의 연구결과다.- ↑ 아마고 가문의 신궁당 사건에 대해서도 그 동안은 모토나리의 계략에 의한 내분이라는 배후설이 있었으나 실제는 가문 계승 과정에서 나타난 내분일뿐이며 모토나리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결론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