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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부터 1990년대까지 유럽 주둔 미군에게 적용된 군사 교리. 1976년 제시된 "적극방어"(Active Defence)에서 변경되었으며, 현재는 NCW로 요약되는 "전방위적 지배"(Full-spectrum Dominance)로 변경되었다. 같은 개념의 해군 버전으로 공해전(AirSea Battle)이란 개념도 존재한다.
1970년대 뒤푸이 장군[1]이 50-60년대를 풍미하던 핵 만능주의에 입각한 전략들을 베트남 전쟁과 욤 키푸르 전투의 전훈들을 토대로 수정을 거치며 스타트를 끊게 된다. 특히 그의 이론대로라면 전쟁의 승패는 초반기의 격렬한 전투의 결과로 결정되며 더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확실히 속전속결로 승리하게 하는 요소라고 정의했다.
더욱이나 NATO의 당대 유럽 방어는 서독이 최초 방어선이자 최후 방어선인 선수방어를 채택할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서독 동부의 대도시들이 넘어가는 것이 바로 NATO의 패배로 인식된데다[2] 소련군이 라인강을 넘는 순간 핵미사일 날릴 준비가 된 나라도 있었던지라, 전략적 단위의 기동방어가 곤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련은 기동전으로써 선택할 카드가 많았지만 NATO가 선택할 카드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고 인식되기도 했기 때문.
하지만 이 화력전의 극단을 찍을듯한 '뒤푸이 개편'은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왠지 상대가 치열한 전투 한두번으로 박살날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뒤푸이의 화력전은 적이 하루이틀만의 치열한 교전으로 나가떨어져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실 소모전과 별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이후 대안이 논의되는데 전격전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술로 인지되던 당시, '반-전격전'이란 개념으로 적극방어가 도입되었고, 벌지 대전투에서 독일군이 미군을 이기지 못한 이유가 미군의 약점을 돌파하지 못해서라는 심플한 이유로 전격전을 분쇄하려면 여러곳에서 공격군에 대한 공격을 통해 적이 약점을 간파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공세를 좌절토록 한다는 적극방어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이 개념은 도입후 미군과 몇몇 군사전문가들에게 까였으나 어느정도 공지전의 기반이 되기는 했다.
1980년대초, NATO가 바르샤바 조약에 대해 공군력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우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걸로 뭔가를 해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70년대 말에는 각 제대 지휘관들이 상정하는 '전장'의 범위는 지위에 따라 공간과 시간에서 차이가 난다는 '확장된 전장' 이론의 등장으로 적의 후방을 효과적으로 파괴하면 전방에서의 적에게 심각한 약점이 되며, 적이 이 피해를 회복하기 전 공격하여 승리하는 것으로 뒤푸이의 이론을 현실화할수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특히나 이때부터 대두된 정밀무기와 스탠드오프 병기의 개념이 이것을 현실화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특히나 공지전은 지상군과 공군이 빠르게 공간적-시간적 공조를 하여야 더 유효한 타격을 줄수 있다는점 때문에, 이후 미군의 C3I 체계의 빠른 확산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는 이후 걸프전 등을 거쳐 육,해,공,우주,사이버 공간까지 아우르는 전방위적 지배, 효과중심전 교리와 네트워크 중심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럽에 소련이 닥돌을 시전하지 않아 실전사례를 보기가 드물다. 걸프전이 단순 공지전이라고 보기는 또 애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