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 작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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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8일~5월 31일까지 2개월간에 걸쳐 실시된 군단급 작전으로서 퀴논(퀴년)일대의 맹호사단(수도사단)과 투이호아~판랑까지의 해안선 일대의 백마사단(제9보병사단)이 북진하여 진출하여 중간지점인 호아다에서 만나는 1번국도의 VC들을 평정 및 개통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오작교 작전명은 말그대로 견우와 직녀가 만나기 위해서 서로 은하 다리를 놓는다는 설화에서 따온 작전명이다.

2 상황

1966년부터 제101공정강습보병사단이 투이호아~퀴논 사이 지역에서 작전을 펼쳤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는 지역이었고 1번국도 자체가 남베트남의 핵심 교통로였기 때문에 반드시 VC들을 소탕 평정하여 도로를 개통할 필요가 있었다. 도로가 VC들에게 차단당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한국군 백마사단이 1966년 9월에 배치됨에 따라서 한국군으로서도 수도사단과 백마사단간의 상호 연계와 지역 안정화를 위해서 판랑와 퀴논간 사이 약 400km구간의 평정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남베트남이나 미국으로서도 1번국도의 개통은 남베트남의 물류수송등이나 군사작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미군들은 자신들도 못한일을 한국군이 한다는 것에 우려감이 강했다.

2.1 각 사단별 담당지역 평정작전

첫 시작은 3월 8일부터 백마사단 28연대가 백마사단의 취약 후방지역에서의 소탕작전을 시작으로 3월 15일에 수도사단에서 5개 대대의 병력을 연대마다 차출하여 송꺼우 남단 3km에서부터 대규모 소탕작전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특히 수도사단은 그동안의 연합군이 잘 쓰지 않았던 한번 작전지역에서 거의 작전을 하지 않는 점을 VC들이 악용한다는걸 파악하고 있었고 그때문에 반전(反轉) 작전을 수행했다. 즉 한번 소탕했던 지역에서 다시 작전을 수행했다는 의미이다. 덕분에 초기에 한국군의 작전에 대응을 회피했던 VC들이 수도사단의 반전(反轉) 작전에 큰 피해를 입었다.

3월 17일에 백마사단은 1번 국도로 계속 북진하면서 투이호아와 밀접한 1번국도 외곽의 서쪽과 북쪽에서 북진의 기반과 수도사단과의 연계를 위한 소탕작전을 시행했다. 하지만 그 마무리를 하고 있을때 일명 =도깨비 11중대 습격 사건=이 터졌다. 4월 10일 28연대 3대대 11중대가 작전을 마치고 복귀하여 기지에서 쉬고 있었을때 병장급 초소근무자가 리시버를 꽂고 잠을 청하는 바람에 VC들이 초기 침투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영내에 적이 침투하여 내무반(생활관)에 소련제 방망이 슈류탄이 투척되어서 아군 12명이 전사하고 22명이 부상을 입은 작전중 두번째의 큰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전과 사살 43명 생포 2명)

수도-백마사단 각각 연결작전이 시작되는 4월 18일까지 예상보다 빠른 작전수행을 보이며 각각의 연결작전에 들어갔고 수도사단은 608명 사살 272명 생포의 전과와 아군 16명 전사 80명의 부상의 피해와 백마사단은 265명 사살 145명 생포에 아군 19명 전사 57명 부상의 피해와 전과를 각각 기록했다. 4월 18일까지 백마사단의 피해를 제외하면 한국군의 작전상황에서의 피해는 최소화된 상태였고 평정작전의 성과도 매우 좋았다.

2.2 수도-백마사단 연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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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까지 각각의 해당 작전지역에 대한 평정작전 수행과 함께 연계작전을 위한 기반을 확보한 한국군은 18일 10시 30분부로 베트남전에서 사상 첫 군단급 연계작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게 된다. 수도사단 선봉인 26연대 3대대 11중대가 M113(참전자들은 A37이라고도 함) 6대를 앞세워서 남진을 백마사단 선봉인 28연대 2대대 7중대가 북진을 시작으로 투이호아 18km 북쪽의 1번 국도 지점의 호아다 마을에서 만나는 작전이 수행되게 된다. 이 날의 연결작전으로 한국군은 중간지역에서 접촉하여 다시 사단 전투지역을 재분배하고 병력을 재배치하였다. 이는 상호 각각 남진과 북진을 하는 중간지역이 한국군이 담당하지 못한 지역이었고 한국군이 연결작전에만 치중하여 소탕작전이 정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각 사단별로 다시 평정작전과 소탕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2.3 최종 소탕작전

5월 31일까지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적의 조직적인 저항자체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지역내 VC들이 기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전이 잘 풀려갔다는 것에 대해서 한국군내 긴장이 완화되어가던 차였던 5월 16일 02시 20분에 송꺼우 남쪽 무명고지에 주둔해있던 맹호사단[1] 제26연대 1대대 2중대에서도 경계근무자가 졸아서 VC들이 침투하여 아군의 전투식량과 물자를 약탈해갔다. 덕분에 전투가 벌어져서 아군 전사 20명 부상 38명이 발생하여 오작교 작전 이래로 가장 큰 아군 피해가 발생하였다.(적 73명 사살 1명 생포)

3 더 After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 1967년 5월 31일에 최종 종결됨에 따라서 남베트남 중부 해안 도로가 완전히 개통되었고 야간에도 민간버스들과 트럭들이 활발하게 움직일수 있는 기반이 확보되었다. 더욱이 한국군은 1번 국도를 중심으로 북쪽 봉선~판랑까지 총 6800㎢의 작전면적으로 작전활동이 확대되었다. 이 작전은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물류수송-경제-통치영향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했기 때문에 당시 북베트남과 VC들에게는 매우 큰 타격이 된 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1968년 테트 공세가 진행될때까지 안전지대로서의 역할이 되었을 정도로 VC들의 활동이 매우 저조했고 그 덕에 288명의 귀순자들이 나타날정도로 확실한 평정지대를 확보하게 된다.

당시 이 작전에 대해서 해외 언론들에 대한 호평일색의 작전이었을 정도로 매우 큰 작전술적인 성공작전이었으며 베트남전 이래로 한국군의 첫 군단급 작전의 큰 성과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하지만 작전중에 경계소홀에 의한 가장 큰 피해가 2차례나 발생했었던 점등은 아쉬움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 작전이기도 하다. 즉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수 없다라는 더글라스 맥아더의 명언이 결코 잘못된게 아니라는걸 증명한 사례들이었다.
  1. 혜산진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