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릭(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기본 배경

“비명에 휩싸인 나의 군도여....”

오래 전 잊혀진 종교 교단의 마지막 생존자 요릭은 망자를 거느리는, 축복이자 저주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에게로 몰려드는 썩은 시체와 울부짖는 영혼은 그림자 군도에 발이 묶인 그의 유일한 동반자다. 대몰락의 저주로부터 조국을 구원하겠다는 신성한 뜻을 품고 있지만 그의 행동은 괴이하기만 하다.

요릭은 유년기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축복의 빛 군도 해안가 어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 타인의 인정을 받는 일은 요릭에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또래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 요릭은 이제 막 눈을 감은 망자의 영혼들을 친구로 삼았다.

요릭은 영혼을 보고 영혼의 소리를 듣는 자신의 능력이 처음엔 두려웠다. 그래서 마을에 초상이 날 때마다 밤새 뒤척이곤 했다.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찾아올 새로운 영혼을 기다리면서… 요릭은 영혼들이 왜 하고많은 사람 중에 자신을 찾아오는지, 부모님은 왜 영혼과의 조우를 한낱 악몽으로 치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릭은 영혼들이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혼들은 단지 길을 잃어, 다음 세상으로 가려면 도움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영혼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자신 밖에 없었기에 요릭은 인도자를 자청하여 영겁의 세계로 그들을 인도했다.

인도자로서의 일은 달콤하고도 씁쓸했다. 유령 무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하나씩 잠재울 때마다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 가슴이 먹먹했다. 요릭은 죽은 자에겐 구원이었지만 산 자에겐 골칫덩이였다. 마을 사람들 눈에 요릭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정신 나간 소년일 뿐이었다.

요릭이 귀신을 본다는 소문은 마을 밖으로도 퍼져 나가 축복의 빛 군도 중심부에 있는 종교 교단의 귀에 들어갔다. ‘황혼의 수도단’이라는 이 교단은 요릭의 재능이 교단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고 요릭이 사는 마을로 사절을 보냈다.

요릭은 사절단의 요청에 따라 교단의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교단의 교리와 단원들이 몸에 지닌 무기의 진짜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황혼의 수도단에 소속된 수도승은 모두 삽을 소지하고 있었다.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장례 의식을 치르는 수도단의 책임을 상징하는 표시였다. 수도승들은 또한 축복의 빛 군도의 신성한 샘물에서 채취한 성수를 유리병에 담아 항시 목에 걸고 생활했다. ‘생명의 눈물’이라 불리는 이 성수는 산 자를 치유하는 수도승의 의무를 의미했다.

그런데 요릭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수도승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요릭은 신앙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든 능력을 천부적으로 지닌 산 증인이었다. 단원들이 평생을 바쳐 겨우 이해하게 된 것들을 너무도 쉽게 인지하는 요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요릭은 그렇게 배척당하며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묘지에서 일을 하던 중 요릭은 새까만 안개가 피어올라 축복의 빛 군도 전역을 삼켜 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요릭은 몸을 피하기 위해 내달렸지만 안개에 금세 따라잡혀 암담한 그림자 속으로 빠져 버렸다.

검은 안개가 악한 마법을 일으키자 주변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몸부림치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인간, 동물, 심지어 식물까지도 추한 귀신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대기가 요동치는 가운데 온 사방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수도승들은 성수가 담긴 유리병을 괴롭다는 듯이 목에서 뜯어내었다. 그러자 그들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 나와 차갑고 창백한 시체만이 남았고, 요릭은 그 광경을 지켜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막을 찢는 듯한 단원들의 비명 속에서 안개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오직 요릭뿐이었다.

“그건 없애 버려.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자.”

요릭은 목에 건 유리병을 한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목에서 손을 뗀 뒤 영혼들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검은 안개가 격하게 굽이치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요릭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바람은 잠잠해져 있었고 한 때 비옥했던 토지는 지옥처럼 처참하게 변해 그림자 군도가 되어 있었다. 검은 안개 몇 가닥이 남아 요릭에게 붙어 있었다. 아직 부패되지 않은 유일한 생명체를 덮치려는 것이었다. 요릭은 안개가 몸을 감싸다가 목에 걸린 유리병에 닿자 순간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성수만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요릭은 유리병을 손에 꼭 쥐었다.

그 후 요릭은 며칠 동안이나 군도를 헤집고 다니며 생존자를 찾았지만 남아 있는 건 한 때 살아 있던 생명체의 뒤틀린 허물뿐이었다. 비탄하는 영혼이 망자의 육신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이 어디를 가든 눈에 띄었다.

생존자를 찾으면서 요릭은 대몰락이 일어난 정황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꿰맞추었다. 죽은 왕비를 부활시키기 위해 축복의 빛 군도에 왕이 도착했고, 왕비가 살아나는 대신 군도와 군도 위의 모든 것이 파멸된 것이었다.

요릭은 ‘몰락한 왕’을 찾아 왕이 초래한 저주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온 사방을 둘러싼 죽음 앞에서 힘이 빠졌다.

슬픔에 잠긴 요릭은 위안을 찾기 위해 어릴 적처럼 주변의 영혼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개와 대화를 시작하자 무덤 속에 묻혀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 요릭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릭은 한 때 자신이 묻어줬던 육신들이 일어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망뿐이었던 심장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리쬐었다. 그림자 군도에서 망자를 구원하려면 망자의 위력과 힘을 이용해야 했다.

저주를 끝내려면 저주를 내려야만 하는 것처럼…

2 최후의 의식

"도…도와 주세요.” 남자가 애원했다.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고 있는 이 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난파선 위에 쓰러져 있었는지 요릭은 알 길이 없었다. 남자의 신음은 절규에 가까웠지만 군도에 들끓는 유령의 비명 소리에 가려 희미하게 들렸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깜빡이는 그의 생명력 주위로 유령 무리가 소용돌이처럼 몰려들었다. 신선한 영혼을 수확하려는 굶주린 유령들이었다. 공포에 질린 남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서울 만도 했다. 망자의 영혼이 검은 안개에 휩싸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요릭은 수도 없이 보아 왔고, 아직 피부에 온기가 남아 있는 이 남자는 그림자 군도에서 보기 힘든 생명체였다.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본 지가 언제였던가… 100년 전이었던가? 요릭은 등에 매달린 검은 안개가 남자를 차가운 품 속에 안으려고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을 보고 나니 오랫동안 잊고 지낸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피어 올랐고, 남자의 생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졌다. 건장한 수도승 요릭은 부상 당한 남자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옛날의 수도원을 향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요릭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며 저항했고, 요릭은 그렇게 신음하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산 자여, 이 곳에 온 연유가 무엇인가?’

목적지에 다다른 요릭은 남자를 업은 채로 수도원의 복도를 지나 낡은 의무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커다란 돌상 위에 남자를 눕히고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갈비뼈는 대부분 산산조각이 났고 한 쪽 폐는 못쓸 지경이 되어 있었다.

“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요릭의 등에 매달린 검은 안개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합창하듯 물었다.

요릭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돌상 위에 놔둔 채 의무실 뒤쪽의 육중한 나무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으로 밀어 보았지만 두껍게 쌓인 먼지 위에 지문만 남을 뿐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깨에 온 체중을 실어 문에 힘껏 기대 보았다.

“애써 봤자 소용 없어.” 검은 안개가 조롱했다. “그 인간은 우리에게 넘겨.”

요릭은 경멸어린 침묵으로 일관했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떡갈나무 재질의 묵직한 문이 수도원의 돌바닥을 긁으며 열리자 두루마리와 약초, 치료제가 가득한 방이 나타났다. 요릭은 과거 자신의 삶이 남긴 유물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용법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는 세월 속에 헤지고 변색된 붕대와 딱딱하게 굳어진 지 오래된 연고 등 눈에 익은 물건 몇 가지를 집어 들고 돌상 위의 남자에게 돌아갔다.

“그냥 놔둬.” 검은 안개가 말했다. “군도에 온 그 순간부터 녀석은 우리 것이었어.”

“입 다물어!” 요릭이 소리쳤다.

돌상 위의 남자는 이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요릭은 남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를 봉합하려 했지만 낡은 붕대는 감자 마자 끊어져 버렸다.

남자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더니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요릭의 팔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남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란 사실을 요릭은 잘 알고 있었다. 목에 건 유리병을 열어 안에 담긴 생명의 눈물을 들여다보았다. 소중한 성수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목숨을 구하기에 충분한 양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설사 목숨을 구한다 해도…

요릭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는 저주 받은 이 땅이 축복의 빛 군도라 불리던 옛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검은 안개 속 유령들이 했던 조롱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자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고, 생명의 눈물을 써 버리면 요릭도 죽은 목숨이 될 터였다. 요릭은 유리병을 닫아 다시 목에 건 채로 두었다.

돌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요릭은 남자의 숨이 끊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은 안개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기대에 찬 유령들이 허둥지둥 팔을 뻗었다. 안개는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눈 깜짝할 새에 남자의 영혼을 육신으로부터 분리해냈다. 남자의 영혼은 맥없는 비명을 희미하게 지른 후 새로운 숙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요릭은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돌상 위에 올려진 영혼 없는 껍질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직 완수하지 못한 임무가 씁쓸하게 떠올랐다. 대몰락의 저주가 남아 있는 한 군도를 찾는 이는 모두 같은 운명을 겪게 될 터였다. 저주 받은 이곳엔 평화가 필요했지만 수년을 헤매 찾은 거라곤 몰락한 왕에 대한 수근거림뿐이었다.

이젠 답이 필요했다.

요릭이 손을 휙 휘두르자 검은 안개 한 줄기가 남자의 시체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잠시 후, 시체가 돌상 위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볼 수도, 들을 수도, 걸을 수도 있는 망령이었다.

“날 도와 줘.” 요릭이 말했다.

망령은 의무실 문 밖을 나서 수도원 복도를 쿵쿵 울리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리고 악취 나는 묘지로 나가, 비어 버린 무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요릭은 망령이 군도 중앙의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지켜 보았다. 그가 답을 가져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