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곳/리그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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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우르곳
날짜: CLE 20년 8월 24일

관찰

우르곳이 거미처럼 생긴 다리로 빵빵하게 부푼 몸뚱어리를 떠받치고서, 전쟁 학회의 대전당을 따라 어기적어기적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서툰 몸놀림을 가장하고서 민첩하게 지나가는 그를 따라, 대리석에 금속이 긁히는 마찰음과 빠직거리는 에너지의 둔한 파열음이 퍼진다. 무서우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덕에, 시선에 깃든 결연함은 눈치 채기 어렵다.

오른팔에는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섬찟한 칼날이 있다. 왼팔 끝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끼워 단 듯한 대포가 손을 대신하고 있다. 그가 아름답게 장식된 대리석 문 앞에 삐걱대며 멈춰 선다. 그리곤 관절로 연결된 금속 다리 하나를 들어올려 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치우려 쭉 뻗는데, 발끝이 닿자마자 문이 미끄러지듯 열린다. 몸을 지탱해 주는 마법 기계공학 엔진에서 흘러나오는 으시시한 빛에 물든 흉터투성이에다 누덕누덕 기워진 피부 위로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우르곳이 종종 걸음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회고

주위를 감싼 낯익은 어둠이 점점 짙어져 간다. 강한 바람이 휙 불어오자 두피를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우르곳은 손에 든 도끼 자루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어라, 내가 손가락이 있었나! 그가 눈 앞으로 손을 휙 들어올렸다. 두 눈이 어둠에 서서히 적응하면서, 그는 멀쩡하게 붙어 있는 다섯 손가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응시했다. 그 손가락 틈으로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지휘관 사이온의 음침한 얼굴이 보였다.

순간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는 번갯불에 저 멀리 검은 형체가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자 우뢰 소리가 대지를 진동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금 이게,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인 건가? 날카롭게 귓전을 찢는 상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르곳은 자기도 모르게, 저 멀리 서 있는 적을 향해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열을 정비하라!”

저 앞에서 군사들이 대오를 이루며, 돌격하는 그를 막으려 데마시아 방패들이 겹겹이 성벽처럼 막아 섰다. 뭔가 잘못됐어. 적의 수가 너무 많다.

우르곳이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선봉에 선 적의 방패를 내리찍자, 적이 뒤로 쓰러졌다. 우르곳은 눈 앞의 위험은 생각조차 않고서 곧장 뛰어들어, 무기를 크게 휘두르며 적의 방어선을 점점 더 허물어뜨렸다. 주위가 아비규환으로 변하면서 전투의 함성이 드높아졌다. 순간, 데마시아 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에서 눈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쓱 닦아내며 우르곳은 난리통을 슬쩍 둘러봤다. 또 다시 번개 줄기가 번쩍이며, 선봉대의 후방에서 참나무 고목을 짚고 선 채 의연하게 목청껏 명령을 내리고 있는 갑옷 차림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우르곳이 다시 전투 도끼를 휘두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전우들의 함성에 더욱 절박해진 그가 적군의 후방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데마시아 군이 재집결하며, 아군은 이제 수적으로 압도당할 판국이었다. 우르곳은 적장을 막으려고 도끼를 높이 쳐들고, 다시 전장 깊숙이 훌쩍 몸을 날렸다.

순간 적이 옆으로 몸을 피하고, 도끼날은 나무 등걸을 깊이 파고들었다. 우르곳은 단단히 박혀버린 무기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납게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은빛 섬광이 번뜩이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두 팔을 쭉 뻗은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시야가 흐려졌다. 절단 당한 두 손목 바로 아래가 불타는 듯 화끈거리며 선혈이 솟구쳐 나왔다.

“기억나나, 우르곳?”

낯익은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우르곳이 말을 건넨 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학살의 현장이 문득 사라지고, 이젠 동틀 녘이다. 지금 서 있는 곳은 숲 속 빈터였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타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 앞엔 데마시아의 힘 가렌이 몇 발짝 앞에 서서, 한가롭게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기억한다, 데마시아인이여.”

불구가 된 전사가 고통을 참으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놈이 내게 한 짓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가렌이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조롱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

눈 깜짝할 새 가렌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서서 환호를 올리는 녹서스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르곳의 오른손이 있던 자리엔 이제 야전 군의관이 붙여준 살벌하게 생긴 검이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발치를 내려보니 흑단 같은 머리칼의 잘생긴 젊은이가 묶인 채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다름 아닌 데마시아의 왕세자 자르반 4세가 두려운 기색도 없이 날카로운 갈색 눈을 들고 자신을 처형하려는 우르곳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패전했을지는 몰라도, 왕자의 몸에 밴 자부심과 위엄만은 꺾을 수가 없었다.

생사를 판가름할 일격을 날리려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우르곳은 싱긋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때, 화살 한 발이 그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으며 휘두르던 팔을 멈춰버렸다. 우르곳이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자, 예의 갑옷 입은 자가 위협적으로 무기를 치켜든 채 말도 안되는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우르곳의 몸뚱이 밑으로, 느리고 둔탁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맞춰 뜨뜻한 피 웅덩이가 삽시간에 고여갔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이럴 순 없다! 이건 자신의 승리를 장식하는 최고의 순간이어야만 했다. 이럴 순 없는 일이야! 시커먼 어둠이 주위를 감싸며, 이제 자신을 살해한 자와 단 둘만 남겨졌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우르곳?”

가렌이 칼에 체중을 실으며 물었다.

우르곳의 힘겨운 헐떡임은 이내 멈췄다. 이제 다시 온전한 몸이 된 그의 금속 다리들이, 분노로 떨며 삐그덕거렸다. 금속으로 된 척추를 따라 강령술의 기운이 뻗쳐 흘렀다.

“복수를 위해!”

포효하는 그의 두 눈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가렌이 끄덕이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우르곳은 대답 대신 머리 위로 강력한 칼날을 치켜들고서 원수의 형상을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가렌의 형상은 어둠 속에 유령처럼 흩어져 버렸고, 우르곳의 검이 가른 것은 그저 허공일 뿐이었다. 눈 앞의 거대한 문이 벌컥 열렸다. 리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