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 ||||
조희제 | → | 한시대 | → | 스코필드 |
- 출처 : 국가보훈처
항일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목숨걸고 기록하다치욕을 당하느니 의를 지키다 죽어야 마땅하다.
이름 | 조희제 |
생애 | 1873~1939 |
훈격 | 애국장 |
서훈년도 | 1991년 |
1 공적 개요
○ 항일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목숨 걸고 기록하다
○ 한말 의병장들과 애국투사들의 독립운동 행적 자료들을 수집하여 염재야록(念齋野錄) 저술
○ 1938년 일제 경찰에 구속되면서 원고 압수당함.
○ 1939년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단발 강요에 자결 순국
2 생애
조희제는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했다. 선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책의 표지에 덕촌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덕촌수록은 그가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까지 의병장, 애국지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6권 2책이다. 그는 염재야록 원고를 완성하고 일제 경찰의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염재가 살던 덕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1938년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서문을 썼던 최병심, 발문을 썼던 이병은, 교정을 보았던 김영한 등과 함께 선생은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의 글은 물론이고 집안 대대로 간직해온 다양한 자료들이 모두 압수되었다. 임실경찰서에 연행되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일제의 단발 종용에 결국 자결 순국하였다.
3 그가 지키려고 했던 염재야록
다행히도 마루 밑에 보관해 두었던 덕촌수록을 해방 후 선생의 제자인 조현수가 염재야록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병은이 발문에서 평한 대로 염재야록은 당시 의병운동사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훌륭하구나! 염재가 야록을 만든 일이여! 한편으로는 천고의 충성스런 넋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여러 역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뒷날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바르게 하고 잇속을 챙기지 않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 자를 물리쳐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교훈을 작은 도움뿐이라 하겠는가?
염재야록은 권6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머리에 최병심의 서문과 조희제의 서문 그리고 끝부분에 이병은의 발문이 실려 있다.
1권은 을미사변과 1895·1896년의 의병활동
2권은 을사늑약의 전말과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한 이들의 행적
3권은 1906·1907년의 의병활동
4권은 한일합방의 전말과 합방 후에 일제에 맞서 절개를 지킨 분들의 행적,
5권과 6권은 절의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책 끝에 ‘구한말 절개를 지킨 여러분의 행적 가운데 수록하지 못한 이들의 표’, ‘절개와 의리를 지킨 이들이 지은 글 가운데 아직 수록하지 못한 글의 표’가 실려 있다.[1]
염재야록의 수록 인물에 대한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면 대부분 전우, 기우만, 송병선의 문인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여타 지역에 비해서 호남지역의 인사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4 기타
정부는 항일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목숨 걸고 기록한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 보훈처에서 2016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5 포스터
6 관련 사이트
국가 보훈처 [1]- ↑ 전자의 경우는 을미년, 을사년, 병오·정미년, 경술년으로 구분하고 거주지역과 명단을 기록했다. 후자의 경우는 그 목록만 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