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프랭클린

존 프랭클린

Rear-Admiral Sir John Franklin
(1786.4.16-1847.6.11)

존 프랭클린은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군인이다. 최종계급은 소장. 호주와 북극을 여러차례 탐험하였으며, 최로 북서항로를 열기 위해 139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북극 탐험을 하다가 대원들과 함께 조난, 실종되었다. 후에 그의 탐험대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구조단은 그의 대원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내어 그가 1847년 6월 11일에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나머지 대원들도 결국 모두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어릴때부터 항해에 관심이 있어서 14살의 나이로 해군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당시에는 나폴레옹 전쟁중이었기 대문에, 1801년 덴마크 해군과 교전한 코펜하겐 해전, 그리고 넬슨제독이 지휘해 유명한 트라팔가 해전에도 참전하였다. 이외에도 여러차례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남반구북반구의 탐험을 실시하였고, 이 공적으로 1829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태즈메니아 총독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비극적으로 끝난 북극탐험이었다.

1845년 영국 해군본부의 주도로 계획된 북서항로(유럽에서 출발 캐나다쪽 북극해를 지나 베링해협을 빠져나와 아시아쪽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탐험에 59세라는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로 선발되었다.

이 탐험은 배 두척에 139명의 대원을 포함한 대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이들 중 5명은 그린란드에서 하선해서 최종적으로는 134명의 대원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1845년 5월 영국을 출발하여 그해 7월 베핀만(그린란드와 캐나다사이의 바다)에서 다른 배들에게 최종적으로 목격된 후 소식이 끊겨버렸다. 이후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었다.

해군본부는 이들이 3년분의 식량을 가지고 갔기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3년후에야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험 첫해 발생한 세사람의 시신을 묻은 무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출발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1854년이 되어서야 그들의 행방이 조금씩 밝혀졌고, 다른 탐험가인 존 라이는 이누이트 족으로부터 그들이 아사했다는 증언을 확보하였다. 이후 맥클린턱이 이끈 탐험대는 프랭클린 탐험대가 남긴 돌무더기에 남긴 기록을 찾아내어 프랭클린의 사망일자를 확인했고, 생존한 이들은 유빙에 갇혀 항해가 불가능한 배를 버리고 남하한다는 메시지를 입수하였다. 아마도 이들은 이렇게 남하하다가 모두 굶주림과 추위에 전멸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1980년대 이들이 북극에 남긴 무덤을 발굴해 시체를 검시한 연구팀의 보고는 시신에서 정상치의 10배가 넘는 납을 발견했다. 이 납중독은 당시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통조림을 밀봉하기 위해 사용된 납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문에 탐험대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은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1] 여기에 괴혈병까지 발생하여 프랭클린 탐험대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배까지 항해불능에 빠지자 배를 버리고 육로로 남쪽을 향하게 되지만, 북극의 날씨때문에 모두 사망하는 것으로 끝장나게 되었다. 최종적 단계에서는 식량이 없어서 이들은 식인에 의존했음도 밝혀졌다.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 탐험의 전모는 아직도 대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특히 프랭클린을 비롯한 여러 주요 인물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고, 짧은 쪽지를 제외한 이들의 항해일지나 탐험일지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2], 아직까지도 북극 지방을 다니며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연구팀도 있다. 그 후, 168년만에 프랭클린이 이끌던 탐사선 HMS테러 호가 발견되었다. #

어쨌든 프랭클린은 스콧과 마찬가지로 영웅으로 남았지만, 이 탐험은 북극탐험 사상 최악의 참사로 꼽히고 있다.
  1. 납중독에 걸리면 판단력이 저하되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2. 훗날에 비슷하게 남극 탐험을 하다가 숨진 스콧의 경우는 사진이나 탐험일지가 발견되어 이들의 전모를 대체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