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化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자는 원요(元耀).
여남군 사람으로 어려서 여러 책을 널리 읽고 강직하면서 굳센 기운이 있었으며, 신장은 8척 9촌으로 고고하면서도 위용이 있었다.
처음에는 낭중령[1]을 역임해 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조비가 연회를 열면서 그를 희롱해 오나라와 위나라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물었다.
진화가 주역을 인용하면서 운수가 동남쪽에 있다고 했으며, 조비가 주문왕이 서백이었다가 천하의 왕이 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어째서 동쪽에 있냐고 했다. 그러자 진화는 주나라의 첫 기반인 태백이 동쪽에 있었던 것이 주문왕이 서쪽에서 일어난 이유라고 했으며, 조비가 이를 웃고서는 마음 속으로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두터운 대우를 했다.
돌아와서 건위태수가 되었다가 상서[2]로 옮겼으며, 225년 6월에는 태상에 겸임했다.
조정에서 안색이 곧았고 아들, 형제들을 꾸짖어 밭이나 뽕나무 밭을 없애고 봉록에만 의지해 살았으며, 처가 일찍 죽었지만 옛 일을 본보기로 삼아 후실을 들이지 않았다. 오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듣고 진화를 귀하게 여겨 종실의 딸을 짝지어주게 했지만 사양했으며, 70세에 늙었다는 이유로 상소하고 장안현에 거주하다가 집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