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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청자기와(靑磁瓦)
고려궁 후원에 연못을 팠다.거기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양이정(養怡亭)이라 했는데
양이정에 청자를 덮었다. - 의종 11년(1157년) 봄 4월《고려사》
1 개요
청자를 이용해 만든 기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 경복궁의 주요전각, 사찰들에 청기와를 덮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보통 용이나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실제로, 경복궁의 침전영역 발굴시, 임진왜란 이전에 사용된걸로 보여지는 다량의 청기와가 발굴된 적이 있다. [1]임진왜란 이후에는 광해군이 인경궁을 중건할때 청기와로 덮은것 이외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널리 사용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인경궁 중건시에도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이유는 조선시대 사용한 청기와는 파란 색깔을 내는 데 염초[1]가 상당량 들어갔기 때문. 염초란 게 원래 귀한 물건이었는데다 당시 명청 교체기+임란 직후라 국제 정세와 경제 모두가 피폐한 상황에서 국방용으로 투자해도 모자랄 염초를 왕궁 지붕 올리는 데 허비했으니...
현존하는 궁궐전각중에는 창덕궁 선정전이 유일하게 청기와를 덮고 있다. 현대에는 청와대가 청기와를 얹은 대표적인 건축물. 일부 사찰에서도 청기와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 기와와 달리 겨울에 눈이 잘 안 쌓여서 좋다고.
2 청기와 찾아 삼만리
일제강점기 시절 개성국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한 미술사학자 고유섭 등은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청기와를 애타게 찾았다.
고유섭은 전설처럼 내려오던 청기와의 흔적을 찾아 고려시대 고분이 밀집된 개성을 집중 수색하다 1944년 세상을 떠나게 되고, 제자인 최순우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청기와 찾기 프로젝트를 이어나간다.
1963년 최순우 팀은 고려청자의 흔적을 찾아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조사를 하던 최순우와 정양모 앞에 소쿠리를 든 아줌마가 나타나 자기 집 마당 앞에서 아들이 주운 청기와 파편을 발굴단에게 팔았고 그것이 단초가 되어 그 아주머니가 살던 초가집 마당에서 청기와 발굴작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당시 역사기록에 나오는 청자기와의 실물을 보고 가슴이 뛰어 말이 안 나왔습니다..우현(고유섭의 호)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했습니다. - 미술사학자 최순우 인터뷰 내용
그곳에서 수십 년간 청자의 신비를 찾아 헤맸던 발굴단 앞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 처럼 500편 이상의 청자기 파편,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청기와 10여 개와 함께 거대한 고려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실전되었던 청기와가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였다.
이후 강진을 중심으로 188개에 이르는 고려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 질산 칼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