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위

銃筒衛

조선시대 초기에 있었던 군사기구

내용

1445년(세종 27년) 7월 총통(銃筒:유통식 화약병기)을 방사(放射)하는 임무를 목적으로 설치된 특수 병제. 이 병제의 성립배경은 첫째로 1433년경부터 4군 6진이 개척되면서 야인(野人:만주족) 정벌을 위한 화기 사용이 급증함에 따른 화기방사군의 대량 확보와 과거 중앙에서 총통방사를 맡은 별군(別軍)이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어 본래 임무를 전혀 못하는 데 따른 화기방사군의 질적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1445년 3월 과거에 사용하던 천자(天字)·지자(地字)·황자(黃字)·가자(架字)·세화포(細火砲) 등의 화기를 전면적으로 개주(改鑄)하게 되면서 이를 운용할 화기방사군을 대량 확보하는 데 있었다.
총통위는 설치 초기에는 병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451년(문종 1) 5월 문종의 군제개혁안에 의해 5사(司) 25령(領)에 분속되었으며, 1457년(세조 3년) 3월에 5사가 5위(衛)로 개편되면서 충좌위(忠佐衛)에 속했던 기간 병종이었으나 같은 해 7월, 세종 이래 계속된 흉년·기근으로 인한 총통 주조의 부진 등으로 인해 사라졌다. 세조가 정권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출처 없이 집필자들의 추측일 뿐이다. 세조가 불꽃놀이 덕후라 불꽃쇼 했다는 건 빼놓았다. 세조10년(1464년) 1월4일에는 새해를 맞아 경복궁 후원에서는 화산붕을 설치하고 북악산 정상에도 직상화(直上火)라는 신형 소형대포를 설치하며 화전과 함께 불꽃놀이를 했다. 참고로 이 때의 불꽃놀이는 일종의 군사훈련이고 신형무기들을 보여주는 행사이다. 그래서 사신에게 불꽃놀이 보여주냐 마냐가 국무회의 주제가 되었다.[1]

총통위의 선발시험은 설치 초기에는 그 규정이 경외무역자(京外無役者)로 거의 대소 구분 없이 나이 30세 이상의 달리는 힘이 있는 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1445년 7월에 실질적인 선발시험법이 제정되어 한 위(衛)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이 선발시험법은 일정한 크기의 놋쇠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어 놓고 마개를 빼어 물이 윗구멍까지 다하는 동안에 달리는 힘을 시험하는 것이다.
  1. 성종이후 사림이 집권하면서 명종 때 왜란이 나기 전까지 군사력이 쇠퇴하며 불꽃놀이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