枾崎景家
(1513 ~ 1575)
우에스기 사천왕 중 1인으로 카스가야마 성 수비대장을 맡으며 나가오 다메카게와 우에스기 겐신 부자를 대대로 섬겼다. 겐신이 그를 두고 "에치고에서 그를 당해 낼 장수는 없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용맹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는 맹장이었다.
1563년 오다와라의 호죠씨 공략에 참전한다. 다음 해 1564년엔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선봉으로 출진하여 하치만바라에 본진을 두고 있던 다케다 신겐을 공격하여 신겐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이러한 공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신임이 두터워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570년 호죠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을 땐 차남 하루이에를 오다와라성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1574년에 병사하였다고 하는데, 그에 관련한 속설이 있으며 이게 반쯤 통설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는 카게카츠공일대기(景勝公一代略記)의 기록에서 유래하는데, 이에따르면 1575년 엣츄에 출진하였을 때, 적장 오다노부나가와 편지왕래를 해오다 겐신에게 발각되는 데 이것을 카게이에가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판단한 겐신은 카게이에를 엣츄 미즈시마에서 주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기의 기록에 이미 그 아들인 하루이에가 카키자키 가문의 당주라고 되어있는 점, 그 시점에는 아직 오다와 우에스기간에 교전상태가 아니었다는 점, 큰 신임을 받던 우에스기가 중신인 카게이에가 그 정도 이유로 주살되었겠냐는 점 등의 이유로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진다고 한자. 한편,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을 받은 사람은 카게이에가 아니고 하루이에이고 주살당한 사람 역시 하루이에라는 설이 있다. 주살 사건이 카게이에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여 후세에 이를 기록한 사람이 혼돈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며 하루이에가 오타테의 난에서 전사했다는 등, 하루이에가 죽은 시기 마저도 확실하지가 않다.
재미있는 건 후에 겐신이 측간에서 볼 일을 보다 뇌출혈로 쓰러지는데, 측간에서 겐신은 원한에 가득찬 카게이에의 망령을 보았다는 설이 있다.
신장의 야망에서는 우에스기가의 무력 에이스. 천도때까지는 답이 없는 지력이었으나 창조에서는 무려 70대까지 올라서 더욱 쓸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