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9. 13. ~ 1994. 7. 27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출신, 남아프리카의 사진기자.
1 일생
흑인 거주구역에서 활동하며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 헤이트'를 고발하는 기자 모임인 '뱅뱅 클럽'[1] 의 멤버이기도 했다. 캐빈 카터는 1993년에 수단의 극심한 기아 참상을 보도하기 위하여 출입이 통제된 아요드 지역[2]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전염병이 옮겨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구역이었다. 카터는 식량보급소를 향해 가던 도중 한 어린이를 만난다. 아이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한눈에 보아도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안타깝게도 식량보급소에 도착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상태였다. 그리고 아이 뒤에는 독수리가 아이가 숨을 거두기를 기다리며 굶주린 아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해 뉴욕타임스를 통해 카터가 찍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수단 문제에 대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고, 아프리카의 식량난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허기진 어린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 찍을 생각부터 했냐는 거센 항의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소녀의 어머니가 병원에 데려가던 중 잠시 내려놓은 틈에 독수리가 절묘하게 내려앉았고 케빈 카터가 절묘한 위치로 가서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카터를 향해 '인간성 대신 상을 택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퓰리처상은 윤리나 인간성과는 무관한 것이냐는 질책까지 무성했다.
카터의 경우 오해를 산 유형이지만,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당장의 인도주의를 발휘해 도와줄 것인지, 아니면 언론인으로서 이를 알리기 위해 상황을 보도할 것인지에 대해선 언론계에서도 오랫동안 쉽게 풀지 못하는 숙제이다. 카터는 그 사진을 찍은 직후 독수리를 쫓아내 소녀를 구했다고 밝혔지만 분노한 사람들에게 카터의 해명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 사진은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는 34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차안에 집어넣어 일산화탄소 중독을 유발하는 방법으로 자살했다.
단순히 비난 만으로 케빈 카터가 자살한 것은 아니며, 자살 당시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상태였고, 참담한 현실을 찍으면서 상당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뱅뱅클럽'에서부터 함께 했던 절친한 동료인 켄 오스터브룩(Ken Oosterbroek)이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1994년 4월 18일 남아공 흑인거주지역에서 취재 중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정신적 한계에 달했다. 그의 자동차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I'm really, really sorry. The pain of life overrides the joy to the point that joy does not exist... depressed ... without phone ... money for rent ... money for child support ... money for debts ... money!!! ... I am haunted by the vivid memories of killings and corpses and anger and pain ... of starving or wounded children, of trigger-happy madmen, often police, of killer executioners ... I have gone to join Ken if I am that lucky."[3]
"정말로, 정말로 죄송하다. 나는 인생의 고통이 기쁨을 뛰어넘어, 더 이상 기쁨 따위가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 집세도 없고... 양육비... 빚갚을 돈... 돈!!!... 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의 기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해당 사건은 언론인로써의 윤리의식을 가르칠 때 많이 인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