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츠카와 사건

小松川事件
1958년 8월 17일, 일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일본거주 한국인의 범행이란 것 때문에 일본 내에서 논란이 많았던 사건이었다.

1 여학생의 실종과 죽음

1958년 8월 17일, 도쿄 에도가와구에 위치한 코마츠카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학생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8월 20일, 요미우리 신문 앞으로 내가 그 여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전화가 왔다. 이 남자는 여학생의 시체를 유기한 장소를 언급했다.

요미우리 신문의 제보를 받은 경찰이 그 장소로 출동했으나, 시체를 찾을 수 없어 장난전화로 간주했다. 그러나 8월 21일, 이번에는 코마츠카와 경찰서에, 시체를 유기한 장소를 더 자세히 언급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다시 경찰들이 출동하여 전화에서 언급한 코마츠카와 고등학교 옥상을 뒤진 끝에, 살해된 여학생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이후 범인은 대담하게도 피해 여학생의 집과 경찰에 피해 여학생의 유품인 손거울이나 빗을 보내는가 하면, 요미우리 신문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때 범인은 흥분했는지 30분 넘게 통화를 했고, 경찰은 통화추적으로 발신 위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경찰이 발신 위치로 출동해보니 공중전화 박스였고, 이미 범인은 도망친 뒤였다. 그러나 주변탐문을 통해 전화를 건 남자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요미우리 신문의 도움으로 이때의 통화를 녹음한 후 8월 29일에 라디오를 통해 이를 방송했다. 그러자 비슷한 목소리의 사람을 알고 있다는 제보가 빗발쳤다.

2 범인

결국 9월 1일, 범인이 검거되었다. 놀랍게도 범인은 18세의 일본거주 한국인, 이진우였다.

당시 18세였던 이진우는 카메이도에서 태어났는데, 집안 환경이 어려워 절도로 여러 번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의 돈을 훔치거나 자전거를 훔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사건 당일, 이진우는 코마츠카와 고등학교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싶어서 거기로 갔다가, 옥상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여학생을 보고 눈에 거슬렸는지, 나이프로 여학생을 위협했다가 여학생이 소리를 지르자 살해해버렸다고 자백했다. 또 이전인 4월 20일에 다른 여성을 강간 살해한 사실도 자백했다.

그는 이 일을 요미우리 신문의 소설 공모에 '悪い奴'라는 제목의 소설로 적어 출품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피해자를 같은 나이 또래의 남학생으로 바꾼 것을 빼고는 사건의 경과는 일치하는 것이었고, 그 외에 자신이 한국인으로서 겪은 차별대우에 대해서도 적었다고 한다.

3 사형과 논란

이진우는 1940년 생으로, 당시 나이는 미성년자인 18세였지만, 2명의 여성을 살해한 것 때문에 검찰은 살인과 강간치사의 혐의로 이진우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듬해인 1959년 2월 27일, 도쿄 지방법원은 검찰의 구형대로 사형을 언도했다. 불과 몇 달 만에 내려진 사형판결이었다. 이후 2심 재판에서도 똑같이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진우는 최고재판소에 상고하는 것조차도 몰랐다가, 박창희라는 유학생이 상고기한인 1960년 1월 10일에 면회를 와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박창희는 부랴부랴 자신의 은사인 역사학자 하타다 타카시에게 도움을 청해, 상고 마감 1시간을 남겨두고 극적으로 상고신청서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1961년 8월 17일에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하면서 사형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미야기 형무소로 이송된 후 1962년 11월 1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소설가 오카 쇼헤이를 비롯한 일부 일본 지식인들과 재일교포들이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탄원을 내기도 했다. 이진우가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된 데에는, 가난과 재일(在日)한국인에 대한 차별도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정부는 이런 탄원을 묵살했다.

그의 사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당초 이진우에 대한 수사 자체가 부실했다는 지적인데, 일각에서는 일본 경찰이 이진우에게 가족을 한국으로 추방시키겠다고 협박해 자백을 받아낸 것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해서 일본은 일본 국적을 가진 재일 한국인이라도, 범죄인이나 생활보호대상자는 한국으로 추방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진우가 순순히 자백한 것도, 벙어리인 어머니가 무작정 한국으로 추방돼버리면 아무 연고도 없어서 결국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형 확정 이후에도 사형집행이 지지부진한 편인 일본의 전례로 볼 때, 불과 1년 3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면 이렇게 빨리 집행될 수는 없다는 것인데, 확실히 이례적인 건 사실이다. 물론 이전의 미성년자 사형수들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례적인 건 아니라는 반박도 있긴 하다.

4 기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이 사건을 소재로 "교사형"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사건 자체를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사형집행이 실패해 심신상실 상태가 돼버린 사형수와 그를 사형시키기 위해 기억을 되찾게 하려는 교도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형에 대한 논란과 재일 한국인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재일 한국인 기자인 박수남은 이진우와 1961년부터 사형 직전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서, "죄와 죽음과 사랑과"라는 이름으로 책이 발간되었다. 다만 박수남은 지나치게 이진우에게 민족의식으로 모든 걸 환원시키려고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